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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가 건네는 철학적 질문

상담실 이야기

by 비빌 언덕

공감을 잘하는 감정형이 아닌, 사고형 상담사인 저는 그 기질을 십분 활용하기도 합니다. 청소년 상담을 할 때, 내담자인 청소년이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그때에 저는 '철학적 고민'을 제안합니다. 다만 철학,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은 달지 않고, 그저 뜬금없고 재미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 질문을 잘 들어봐. 너는 누군가에게 납치당했고, 어떤 방에 갇혀 있어. 한 달이 지나면 너는 무조건 죽음을 맞이할 거야. 그건 바꿀 수 없어. 방에는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과 음식은 다 갖추어 있어. 공간도 쾌적하고. 다만 외부와 연락할 수 없고, 죽는다는 것만 정해져 있어. 죽는 방식도 고통스럽지는 않아."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네 앞에는 기억을 지워주는 알약이 하나 있어. 그 약을 먹으면 너는 한 달 후 다가올 죽음에 대해 모른 채 그저 안락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다, 그날이 오면 잠자다 그대로 평화롭게 죽을 거야. 알약을 먹지 않으면 너는 한 달 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한 달을 보내고, 그리고 죽게 될 거야."


"너는 알약을 먹겠니? 그리고 네 선택의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줘."

그림 - 제미나이

어떤 아이는 용감하게 알약을 먹지 않고, 남은 한 달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전해질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담은 일기와 편지를 남기는 데 사용합니다. 어떤 아이는 삶의 유한성을 빨리 인정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고 행복하게 보내다가 죽음 역시 담담하고 순응적으로 맞이합니다.


이 질문은 제가 아이들에게 종종 던졌던 질문입니다. 정답은 없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비난받거나 지적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이유와 각자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저는 아이들이 답을 듣고, 더 나아가는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때로는 그것을 위해 작은 반박을 만들거나 논리의 함정을 파기는 합니다.


이 질문은 많은 줄기로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최근 점점 우리 가까이 다가오는 '존엄사', '연명치료 거부'와 같은 주제도 가능하고, 삶의 이유, 인간의 존엄, 고통을 대면하는 태도, 선택이라는 것의 무게 등 생각할 것은 많습니다. 청소년에게 던지기에는 너무 비관적인 질문이기도 하지만, 비관을 낭만으로 여기는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친근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고졸 자격검정 문제로 유명한 '바칼로레아'의 철학 논술 분야 문제에는 이와 비슷하게 풍성하게 사유해 볼 수 있는 질문이 잔뜩 있습니다. 아예 이 문제들을 출력해서 내담자 청소년과 함께 풀며 신나는 논박을 주고받은 경험도 있습니다. 청소년은 논리와 사고의 전개가 다소 미흡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오류와 허점을 예리하게 집어내는 멋진 비판가이며, 사람들이 좀처럼 시선을 두지 않는 작고 사소한 것들에 애정을 보내는 인류애적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들 내면에 꿈틀거리는 성장 욕구와 자아실현 욕구가 좀 더 구체화될 수 있도록, 더욱 예리한 어휘들과 문장들, 그리고 더 깊이 나아간 사고의 예시들을 쥐어줄 때 저는 RPG 게임 속에서 무기들을 파는 NPC 상인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용사와 전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원하며, 이 단검과 물약을 어서 가져가라고 호객하는 것입니다.


나름의 고민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제가 항상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네 고민은 정말 심각하고 중요하지만, 그 고민을 하는 사람이 네가 처음은 아니야. 네가 어떤 고민을 하든, 인류 역사에는 똑같은 고민을 먼저 했던 선배가 반드시 있어. 그 선배들은 너와 같은 고민 앞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러면서 저는 종종 헤르만헤세의 책들을 권해줍니다. 헤르만헤세는 청소년들에게 아주 뛰어난 NPC입니다.


그림 - 제미나이


집에서 기가 센 부친에 억눌려 마음이 쪼그라들었던 중학생 청소년이 있었습니다. 상담이 6개월쯤 흘러 아이가 어느 정도 밝아지고 힘을 찾았을 무렵, 아이는 상담실에 들어와 지난주에 영화 하나를 봤는데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영화 제목을 물으니 '레 미제라블'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아이가 영화의 어떤 때문에 가슴이 불끈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저는 호들갑스러운 공감보다는,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민과 백성의 차이가 뭐인 것 같니?"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현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시민은 통제는 받지만, 지배는 받지 않아요."


"그럼 너는 집에서 시민이니 백성이니?"

아이는 약간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백성인 것 같아요."


저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주려는 마음을 담아 물었습니다. "앞으로는?"


"시민이 되어야죠." 아이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림 - 제미나이

대답대로 1년을 채운 상담이 끝날 무렵 아이는 씩씩하고 대견한 모습을 찾았습니다. 부모에게 거칠게 반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할 말과 주장은 의연하게 할 줄 아는 그런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심리적인 변화는 생각의 변화를 낳기도 하고, 또 생각의 변화가 심리적인 변화를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담에서도 생각의 성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철학은 고조선부터의 조상님이고, 심리학은 산업혁명 이후의 어린 후손쯤 됩니다. 항렬이 까마득합니다. 그러니 후손은 항상 겸손해야 하고, 조상님의 역사와 유구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힘이 부족할 때도 조상님 힘을 좀 빌어와야 합니다. 조상님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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