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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빌 언덕 Apr 18. 2016

'심리학' 글이 싫은 이유

인문학적 조미료가 필요해

사람들은 인생 살다가 힘이 들 때 종종 심리(학)와 관련된 책을 읽고 위로를 얻는다.

그럼 심리학자는 힘들 때 무슨 글을 보며 위로를 얻을까?


나는 인생이 고단하고 힘들 때 심리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문학, 예술, 역사, 철학 등의 책을 볼 때 위로를 얻는다. 


시중에 넘쳐 나는 다양한 인간과 심리에 대한 글들이 잘못되어서도 아니고, 

깊이가 얕아서도 아니며, 도움이 안 되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심리와 관련된 글들, 책들 읽기를 주저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지나친 압축성

소설의 줄거리만 읽고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느리고 불편하고 때로 지루하더라도 주인공의 삶 구석구석을 직접 보고 같이 겪어야 비로소 주인공이 이해되고, 감동이 올 수 있다. 우리의 경험 하나하나는 압축하지 않고 그냥 낱낱이 드러날 때 비로소 살아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심리학 책들은 우리의 복잡한 삶을 지나치게 압축하고 사례화해 버린다. 



2. 작가 전능 주의

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구조가 형성되고 동작하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해하기까지 인류 문명보다 긴 시간이 걸렸고, 많은 글과 책들은 불과 백 년 전후의 연구만을 담고 있을 뿐인데도 인간에 대해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에 대해 '나는 다 안다'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이렇지는 않을까?", "또 다른 면은 없을까?"

그런 질문을 던져주는 심리학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3. 일방향성

위대한 문학작품일수록 작가와 독자가 깊은 교감을 나눌 때가 많다.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질문도 하고, 조언도 하고, 하소연도 하지만 그것은 전혀 불편함이 없다. 작품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고, 그 느낌과 해석에서 한 가지 방법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에게 수 백, 수 천 가지로 다른 여운을 주는 작품일수록 명작이 되고, 한 가지 느낌으로 남는 작품일수록 졸작이 된다. 


심리학 글은 태생적으로 그 바탕이 되는 이론을 설명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모든 결론이 결국 작가가 정해놓은 목적지로 가게 된다. 동의하며 책을 읽던가, 부인하며 책을 덮던가 둘 중 하나만 존재한다. 심리학 책에 비판적 독서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4. 심리 만능론

마음은 위대하지만, 마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순 없다. 내려놓기만 한다고,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기만 한다고 우리의 삶이 다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는 일과 더불어 우리의 물리적인 현실도 매우 중요하고, 갑작스레 닥쳐오는 일들도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마음과 몸, 개인과 사회 현실 등이 함께 다루어져야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온전히 이야기할 수 있다. 


심리학 글들은 종종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서 심리학 글을 읽고 용기를 얻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허무해지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떻게든 사람을 낚으려고 제목으로 유혹하는 부실한 책들은 사람을 더 허기지게 한다. 


5. 편협한 어휘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단어에 담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광대한 인간의 마음이 좁은 단어에 담기는 순간 그 빛을 잃기 쉽다. 심리학글들은 종종 그럴듯한 '용어'를 들먹거리기 좋아하는데 그 짧은 단어에 인간의 마음을 담는 순간 감동도 사라지고, 여운도 사라져 버린다. 


고민하고 고통스럽지만 살아가야한다는 굳은 의지를 먹고 있는 한 사람의 숭고한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펄벅은 대지라는 470페이지의 소설을 사용했다. 그 주인공의 내면은 470페이지에 담긴 수 많은 묘사와 행동을 글자로 읽고나서야 비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한 두 단어로 정의되고 개념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 진실성 

문학에도 허구와 창작이 넘쳐난다. 그러나 문학에서 나오는 글들은 어쨌거나 작가의 뼈와 살을 녹여 만든 작가의 자식같은 것들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것이 당연히 픽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독자는 그 안에 깃든 작가의 진정어린 그 무엇을 찾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 책을 쓰는 사람들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한 것처럼 글을 쓴다. 내담자(환자)의 경험을 주워듣고,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주워들은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의 것처럼 이야기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태생적으로 많은 사례를 듣고 그것을 의미있게 분류하는 일들을 직업적으로 하기 때문에 글 속에 자신을 녹여내기보다는 통계적으로 대게 이렇다더라 하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심리학적 글에 거부감이 있으면서도 나는 심리학적 글쓰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남들을 비판했으니 나는 또 얼마나 잘 써야 할까. 그럴 수는 있을까. 


어떤 글을 써야 하나 생각해본다. 

심리학 글들이 인문학의 향기를 담았으면 좋겠다. 사람에 대한 존경과 연민이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내담자와 환자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척박한 현실과 또 다가오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도 담겼으면 좋겠다. 작가도 환자 또는 독자와 똑같은 입장으로 내려와서 썼으면 좋겠다. 결론보다 질문을 던져주는 글이면 좋겠다.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 동일하게 참가시켰으면 좋겠다. 가끔은 결론 없이 푸념이나 한탄으로 끝나도 좋겠다. 많은 것을 담기보다 실재했던 하나의 이야기를 담았으면 좋겠다.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기보다 현실과 마음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그저 마음은 이런 일을 했다고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글쓰기 기법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쓰는 태도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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