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문 안에서> 제19장. 지각된 세계
여름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햇살이 뜨거웠다.
하지만 나뭇잎 긴 그림자는 가을을 맞이할 자리를 폈다.
매미의 울음소리도 힘겨웠다.
등교를 시작한 지 열흘.
교실에 있는 동안은 가방을 메고 있는 듯 묵직했다.
상담실 의자에 기대자 하진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지쳐 보이네? 오늘은 어땠어?”
영애의 목소리는 익숙한 이불처럼 따스했다.
“힘들어요…”
묻기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다.
“애들은 많은데, 혼자인 것 같아요.”
매미 울음처럼 힘겨운 목소리이다.
“그렇구나… 정말 버겁겠다.”
영애는 하진이 보는 쪽을 보며 물었다.
“하진아, 지금 네가 원하는 건 뭘까?”
“…애들이랑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잠시 침묵.
영애는 하진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하진아, 네 의견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
“말해보세요.”
“너처럼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아이가 있어. 그러면, ‘나만 저들과 다르다. 어울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들 거야.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이 아이에게 너는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런 마음은 당연하다고요. 오랜만에 나왔는데 계속 다니던 애와 같을 순 없다고요.”
하진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견디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영애의 물음에 하진이 손을 저었다.
“아니요. 등교 안 하기로 선택했으니, 이런 느낌을 감수할 책임이 있다고요.”
영애는 입술을 깨무는 하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견디는 거, 힘들지 않아?”
“힘들어요.”
하진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 영애의 눈가가 붉어지는 걸 흘깃 보았다.
“네가 힘들게 견디는 걸 조금 도와주고 싶은데. 괜찮아?”
복음이라도 들은 듯 하진은 반가웠다.
“학교에서 제일 힘들었을 때 하나만 말해줄래?”
영애는 검지를 들어 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혼자 있는 건 괜찮았어요. 근데 어떤 애가 ‘오랜만이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꼭 왜 다시 왔냐고 묻는 것 같아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영애는 하진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널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구나.”
하진은 시선을 떨구며 힘없이 대답했다.
“네…. 반가워서 한 말일 수도 있겠죠.”
팔걸이를 문지르는 하진을 영애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진아, 친구에게 ‘배고프지?’라고 물었을 때 다 똑같이 반응해?”
하진이 웃었다.
“아니요. 어떤 애는 ‘떡볶이 먹자!’ 하고, 어떤 애는 ‘내가 돼지처럼 보여?’ 하며 화내죠.”
“그래? 왜 그럴까?”
하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다르게 느끼니까요.”
“맞아. 같은 현실도 사람마다 다르게 지각하니까, 행동도 달라지지.”
“지각요? 학교에 지각하는 것은 아닐 테고. 하, 하.”
자기가 한 농담에 소리 내어 웃는 하진을 보며 영애는 싱겁게 웃었다.
“하진아, 저 차트를 봐. 복잡하지?”
영애는 상담실 벽에 붙은 차트를 가리켰다.
“저걸 보고 ‘우리는 현실을 알 수 없다’라고 설명할 수 있겠니?”
하진은 턱을 괸 채 오래도록 차트를 바라보았다.
“감각 체계는 보는 것, 듣는 것… 그런 걸 말하는 거죠?”
하진의 눈이 전깃불 켜진 듯 반짝였다.
“그거죠? 모든 걸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니까요.”
영애의 눈이 대답했다.
“맞아. 네가 잠든 사이에 눈이 와도 모를 때가 있잖아. 네가 몰랐다고 해서 눈이 안 온 건 아니지?”
하진은 얼굴이 환해졌다.
그를 보며 영애는 다시 물었다.
“엄마와 게임 약속을 어긴 적 있었지?”
“많았죠.”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어?”
“시간이 넘었지만, ‘여기까지만….’ 말하고 싶었어요. 깔끔하게 끝내야 공부도 잘되니까요.”
“그런데 네 마음을 모르는 엄마는?”
“화냈죠. ‘넌 왜 그렇게 자제력이 없냐!’라고 요.”
하진은 엄마 말투를 흉내 냈다.
“엄마가 네 마음을 알았다면?”
“덜 화냈겠죠.”
“그래.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까. 누구나 자기 생각대로, 느낀 대로 행동하지.”
하진은 여전히 차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제 생각 속에서 사는 거네요. 현실과는 관계없이. 그렇죠?”
영애는 지긋이 그를 바라봤다.
예전에 “너 내 제자 할래?”라고 말하던 때의 눈빛이었다.
“하진아, ‘지각된 세계’가 뭐라고 생각해?”
하진은 시선을 멀리 두었다.
“음… 내가 만들어 낸, 나만의 세계요?”
하진은 일어나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오며 말했다.
“결국 저는, 제가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렇죠?”
영애는 하진이 건넨 물을 받으며 말했다.
“누구나 그래. 나도 그래. 그런데 너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 기분 나쁜 빨강 세상, 아니면 기분 좋은 노랑 세상?”
하진은 물을 급히 삼켰다.
“제가 제 세상을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 원한다면. 쉽진 않아.”
하진은 눈을 크게 떴다.
‘원한다면? 쉽진 않다고?’
영애는 그의 표정을 보더니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진이 눈을 반짝였다.
“예전에 중학교에서 집단 상담을 할 때였어. 한 아이가 엄마한테서 온 문자를 보더니 ‘아이씨, 빡쳐!’ 그러는 거야. 내가 물었지. ‘무슨 문자인데?’ 그랬더니 ‘엄마요. 학교 끝났는데 지금 어디냐고요. 아침에 말했는데도 또 물어요!’”
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빨강, 노랑, 초록 카드를 들어보라고 했거든. 너라면 어떤 색을 들겠어?”
“음… 빨강이요.”
“그 아이도 그랬지. 그런데 옆의 아이는 노란 카드를 들더라고.”
“노랑이요?”
“그래. 왜 그랬을까?”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르게 지각했으니까요. 지각된 세계는 각자 다르잖아요.”
“맞아.”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노란 카드를 든 이유를 물었거든. 그 아이가 말했어. ‘저는 엄마가 안 계세요. 그런 문자가 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에 교실이 조용해졌어.”
하진은 고개를 떨궜다.
잠시 후 하진은 벽시계를 흘깃 보았다.
말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돌다 이내 삼켜졌다.
정적이 흐르자,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네 상황이 힘든 건 사실이야.”
“그래도 제가 원하는 건 학교에서 잘 지내는 거니까요.”
하진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멈췄다.
영애가 말했다.
“그래. 애들이 널 ‘앗싸’로 본다고 느끼는 건, 너한테 도움이 안 되겠지?”
“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다르게 지각할 수 있을까 하고요.”
영애는 하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 예전에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오히려 잘된 일도 있었어? 전화위복 같은 거.”
하진은 영애에게 고개를 돌렸다.
“음… 원하지 않던 반에 배정됐을 때요. 그때 재우를 만났어요. 지금 제일 친한 친구예요.”
“또?”
“게임에서 지고 나서 전략을 배우게 된 적도 있긴 해요.”
영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구나. 어때? 현실이라는 게… 좋다, 나쁘다, 단정 짓기는 어렵지 않니? 저기 차트에 현실은 파랑으로 되어 있지?”
하진은 차트를 바라봤다.
“그러네요.”
영애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어려운 질문 하나 해도 될까?”
“무슨 질문요?”
하진은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이 어려운 상황이… 너에게 도움 되는 점도 있을까?”
하진은 숨을 내쉬며 작은 웃음을 지었다.
“있겠죠. 근데 그게 뭔지는 아직 잘….”
상담실 밖에서는 매미 소리가 유난히 컸다.
있는 힘을 다해 울고 있었다.
이런 날도 길지 않을 테니까.
예전엔 저 소리가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귀를 막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지.
근데… 지금은 그냥, 저것도 살아보겠다는 노력 같다.
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매미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걸 바라보는 내 눈이 조금 달라진 걸까?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이 지금 보는 세상은 어떤 색인가요? 빨간 세상인가요, 노란 세상인가요?
지금 당신이 보는 세상은, 당신이 원하는 삶을 돕고 있나요? 방해하고 있나요?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지각된 세계(perceived world)
지각된 세계는 인간이 오감을 통해 받아들인 외부 현실을, 자신의 지식과 가치라는 개인적 필터를 거쳐 해석한 주관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현실치료의 창시자 윌리엄 글라써는, 인간은 실제 현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석한 현실(지각된 세계)을 바꾸려고 행동을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지각된 세계에 따라 느끼고 행동하며, 대부분의 갈등과 오해는 이 지각을 현실이라고 믿는 데서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