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문 안에서> 제20장. 증상과 역설적 기법
“지쳐 보이네?”
하진의 침묵이 길어지자 영애가 입을 열었다.
“수업도 어렵고, 앉아 있는 것도…. 내가 할 게 없다는 게.“
하진은 간신히 말했다.
”공부는 잘했냐고 물어요. 엄마가.“
하진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만 웃었다.
“엄마 표정이 어땠는지 아세요? 얼굴엔 화색이 돌고. 모처럼 살겠다는 듯. 제가 학교에 간다는 것만으로 좋은 거죠.”
그는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후회돼요. 생기있는 엄마 얼굴 보니까. 누구 좋은 꼴 보려고 학교에 갔나…. 제가 선택한 건 맞지만, 엄마가 좋아하니까….”
하진은 목을 길게 늘여 가슴을 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숨쉬기가 어려워서요. 검사를 받아봐야 할까요?”
영애는 오히려 하진에게 물었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네가 힘들다는 증거가 되겠지?”
“그렇겠죠.”
“그럼 엄마가 네게 좀 더 따뜻해질까?”
하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럴 리가.
따뜻해지긴커녕 더 원망하겠지.
남들 다 하는 걸 왜 못하냐고.
엄마가 혹시 따뜻해진다 해도, 하고 싶은 말은 있다.
검사를 해야만 내가 힘든 걸 아느냐고.
하진이 고개를 돌리자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영애는 지긋이 얼굴을 올려 대답을 권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엄마는 제가 병이면 덜 미안할 거예요. 자기 책임이 아니니까요.”
“그렇구나.”
영애는 실눈을 하고 물었다.
“심리검사를 하면 진단명이 붙을 텐데, 괜찮겠어?”
“좀 그렇긴 해요….”
영애는 하진을 지켜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진은 머리를 들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점은, 환자니까 더 이상 요구받지 않을 것 같아요. 회복될 때까지 좀 기다려주겠지요.”
하진이 말이 없자, 잠시 후 영애가 물었다.
“나쁜 점은?”
하진은 눈을 깜빡였다.
초등학교 때, 교문 앞에서 사서 온 병아리가 병든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그 진단명에 맞는 사람이 될까 봐서요. 요구받지 않으려면, 진짜 환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하진은 병아리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부르르 털었다.
“선생님은 심리검사 안 해요?”
“필요하면 하지. 대화를 시작할 실마리를 찾으려고. 자기 어려움을 잘 말하지 않는 내담자들이 있거든. 주로 남자들이 그래. 자기 어려움이 뭔지 몰라서일 수도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진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로 자신이 그랬다.
지금까지 뭐가 문제인지도 제대로 몰랐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 그런데 선생님이 걱정되는 게 하나 있어.”
영애의 목소리를 듣고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뭔데요?”
“약을 처방받게 될까 봐.”
“약이 왜요?”
“약을 먹으면 증상은 줄겠지만, 약을 먹는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영애는 물을 한 입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글라써 박사도 그런 이유로 약물치료를 경고하는 책을 썼거든. 책 제목이… ‘정신의학은 정신건강에 해롭다’였지?”
하진은 턱을 괸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럼 검사할 필요가 없겠네요.”
“그럴 때도 있지만, 진단이 꼭 검사를 통해서만 되는 건 아니지. 마음이 괴롭고 몸이 힘든 데는 언제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진의 눈이 반짝였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거죠? 단절된 관계라는 거죠?”
“그렇지. 행복한 사람이 정신건강 문제가 있는 것 봤어?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는 늘 불행할 때 아니겠어?”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물은 절대로 안 돼요? 근데 왜 처방해요?”
“도움이 되기도 해. 감기 걸렸을 때 해열제를 쓰면 후유증을 예방하고 고통을 덜어주잖아? 그게 병을 낫게 하진 않아도…. 그런데 오래 쓰면 약에 의존하게 되기도 해서.”
“약물 의존이요?”
“점점 양을 늘리거나 약이 더 세져야 한다고 하더라구.”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염 걸렸을 때가 바로 그랬다.
“더 걱정되는 건, 약으로 증상이 좋아지면, 진짜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거야.”
하진은 영애의 입을 지켜봤다.
“증상이 나타나면 불행의 원인인 단절을 다루어야 하는데…. 고통만 피하면 된다는 거지. 고통을 안 느끼는 게 꼭 좋은 걸까?”
하진이 되물었다.
“좋은 거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지.”
영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이 문제야. 약을 먹으면 괴로움은 줄지만, 기쁨도 함께 둔해져서…. 느낌을 죽이는 거니까…. 고통은 고마운 측면도 있거든.”
하진은 눈을 치켜떴다.
“고통이 고마워요? 말도 안 돼.”
영애가 빙그레 웃었다.
“하진아, 뜨거운 난로에 손을 데었을 때 아픈 게 좋아? 아프지 않은 게 좋아?”
하진은 눈을 끔뻑였다.
“아프니까 손을 피하겠지? 안 아프면 계속 대고 있을걸? 그러면 손이 다 타버리고….”
하진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고통이 왜 고마운 건지.
”고통을 느껴야 행동을 바꾸려고 한다는 말이죠?“
영애는 활짝 웃었다.
“고통스럽다는 건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잖아?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자기 행동을 바꿀 때 사람은 성장하거든. 아프면서 큰다는 얘기 들어봤지?“
하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통을 피하려 약을 쓰는 사람, 고통을 없애려 행동을 바꾸는 사람….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구나.’
하진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약을 먹는 건 쉬워요. 값도 싸고. 고통만 피한다면 그게 제일 빨라요.”
영애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근데 좀 그렇잖아요? 쉽게 쉽게 산다는 게…. 성장통을 겪더라도 키가 큰 게 좋잖아요?’
영애는 찡긋하고 웃었다.
“성장통을 겪더라도 마음도 성장하고 싶구나?”
하진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담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새삼스럽게 시계 초침 소리가 커졌다.
하진은 영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엄마에게 숨쉬기 힘들다고 말하면, 장염 때처럼 병원으로 데려갈 것이다.
엄마는 내 마음엔 관심을 두지 않고, 태도 역시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진은 영애를 쳐다봤다.
이제 영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영애는 늘 ‘과거’가 아닌 ‘지금’을 묻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만 묻는다.
“선생님, 숨 막힐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엄마 잔소리를 잊으려 하면 더 생각나서요.”
영애가 웃었다.
“처방? 숨 막힐 때, 약물 말고 행동 처방을 원하나 보네?”
“네.”
“좋아. 숨 막힐 때마다, 숨 막히기를 선택해 보는 거야. 어때?”
“네?”
하진의 눈이 토끼 눈처럼 커졌다.
영애가 미소 지었다.
“숨 막힐 때 목 근육이 조여오지 않든? 호흡도 빨라지고?”
“네. 그래요.”
“그럼 이번엔, 네가 직접 조여보는 거야. 빠르고 얕은 호흡을 선택하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잘 되면 1분간 하던 것을 2분으로, 2시간 간격을 1시간으로 좁혀보는 거야.”
하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피하고 싶은 걸 선택하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한번 해보자’라고 마음먹는 순간 숨 막힘이 두렵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거라니.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 * *
하진이 떠난 상담실.
여름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선 영애.
가을바람이 스쳤다.
시끄럽던 여름이 이젠 좀 잠잠해 질려나?
‘역설적 기법’
고통에 대한 처방.
내담자에게 그 고통을 오히려 선택하라고 처방하는 것이다.
위험부담이 좀 있지만, 하진에게는 이 처방이 무방하다고 믿는다.
그만큼 상담환경이 잘 가꾸어져 있고, 하진에게도 그 정도의 내적 힘은 있으니까.
그런데도 영애는 펜을 멈추었다.
효과가 있을지, 여전히 마음 한편이 신경 쓰였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은 어떤 증상으로 고통을 겪을 때 피하고 싶었나요?
그 고통을 오히려 ‘선택’해 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겪는 고통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증상과 역설적 기법
증상이란 단절된 관계로 인해 욕구 충족이 좌절되었을 때, 그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으로 우리가 선택한 행동이다.
증상은 전행동 4가지 요소 중 한 요소 또는 그 이상의 요소가 결합하여 비생산적,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보일 때를 말한다.
역설적 기법은 고통스러운 증상 행동을 선택하라고 지시하는 처방이다.
내담자가 증상을 스스로 선택해 봄으로써, 이 증상을 자신이 선택했으므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돕는다.
그러나 증상의 원인은 단절된 관계에 있으므로, 어떤 종류의 증상이라 할지라도 증상의 근본적 해결책은 관계의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