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 행동이 말해줄 거예요.

4부<문을 열며> 제22장 책임

by 박광석

“내일 하진이 올 거예요.”

어제저녁, 정수 실장은 스치듯 말했다.

자초지종은 없었다.

한두 달 전 상담을 그만두겠다고 할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영애는 문 쪽을 이따금 쳐다보곤 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하진이 들어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마른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다.

“저… 죽을 뻔했어요.”

하진의 시선이 멀어졌다.

상담실이 아닌, 하얀 병실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병원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옆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쁜 놈 같으니.’

엄마 머릿속에는 ‘오죽했으면’ 같은 말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 무엇을 원했는지엔 관심이 없었다.

며칠 뒤, 엄마가 말했다.

‘학교는 꼭 나가! 유급 일수 얼마 안 남았어!’

죽을 뻔했다는 하진의 말에 영애의 얼굴은 잠깐 굳어졌다가 이내 잔잔해졌다.

영애는 의자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그래… 여기 앉자. 천천히 얘기해 줄래?”

하진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영애의 시선은 계속 그를 따라갔다.

하진은 낮게 말을 꺼냈다.

“상담 마치던 다음 주요. 엄마가 또 시작했어요. 숙제했는지, 학원은 갔다 왔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저도 모르게…. ‘그만하라고!’ 소리쳤거든요. 근데 엄마도 같이 소리 질렀어요. ‘너 어디서 엄마한테!’”

하진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찔거렸다.

“방으로 피했는데,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제 목덜미를 잡았어요. ‘반년씩이나 쉬었으면 정신 차릴 때도 됐지.’ ‘상담실에서 오냐오냐하니까 더 버릇없어져서.’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뿌리쳤는데, 엄마가 문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저한테 달려들었어요. 그래서… 밀어냈어요. 문밖으로. 그리고 잠갔어요.”

말이 멈출 때마다 하진의 손끝은 더 세게 무릎을 눌렀다.

“그날 밤, 엄마가 형 픽업하러 나가자 엄마 서랍에서 약을 꺼냈어요. 다 잊고 그냥 잠들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서…. 엄마가 병원에서 처방받은 항우울제와 수면제였어요. 눈 떴을 땐…. 병원이었어요.”

하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학교엘 가니까… 엄마가 학원도 이미 다 알아봐서 미리 등록해 놓고… 제가 부탁할 때까지 못 기다려요. 관리인지, 집착인지, 통제인지… 그 순간 생각했어요. 엄마랑 살려면 그냥 다 받아들여야 하나? 꼭두각시처럼, 노예처럼….”

눈물이 둑을 넘쳐흘렀다.

“그렇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싫고요. 이번 생은… 망했어요. 엄마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아무리 바뀌어도, 부모는 안 바뀌잖아요.”

그는 눈물을 닦은 휴지로 코를 풀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엄마가 살아 있는 한… 이 관계는 끝나지 않아요.”

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죄를 덜 짓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면….”

잠시, 시계 초침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담실을 둘러봤다.

벽에 붙은 자료들이 낯설게 보였다.

그 위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영애에게로 돌아왔다.

“제 행동이… 제가 원하는 걸 얻는 데 도움이 안 됐던 것 같아요. 너무 충동적이었죠.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특히… 선생님께 피해를 줄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어요.”

하진은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병실에 있을 때… 엄마가 정수 실장님이랑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선생님을, 자살 예방을 잘 못 했다며 고소하자고….”

목소리가 떨렸지만, 또렷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부탁했어요. 학교도 다시 나갈 거니까… 제발 선생님 힘들게는 하지 말라고요.”

하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삶을 포기하겠다고 한 건… 제 선택이었어요. 그건 비효율적인 행동이잖아요. 다시는 하면 안 되는….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져야 하고요.”

영애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물었다.

“책임진다는 게, 너한텐 어떤 뜻이야?”

하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제 행동이 보여요. 전에는 다른 사람들 행동만 봤거든요. 특히 엄마가 나를 대하는 걸 보면서, 저는 제가 실패자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지금은 다르게 보여?”

“네. 진짜 실패는, 제 행동이 비효율적일 때예요.”

하진은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엄마의 태도는 엄마가 선택한 행동이에요. 그건 저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거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 행동이 말해줄 거예요.

영애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진에게 몸을 돌렸다.

“책임을 진다는 건… 벌을 받겠다는 건 아니지?”

하진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뭐예요?”

“네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 길을 잘못 들었으면, 차를 세우고 다시 방향을 잡는 거.”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말이, 묘하게 앞으로 돌진하고 싶은 맘이 들게 했다.

앞으로.

영애는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내 탓이다’, ‘내가 미련했다’ 이렇게 자신을 탓하는 건… 얼핏 양심 있어 보일 수 있어. 심지어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사실은…”

“사실은요?”

하진이 숨을 죽였다.

“그건 아주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야.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이지.”

하진이 눈을 깜빡였다.

“왜요?”

영애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라는 사람과, 네가 한 행동을 한번 구별해 볼래? ‘내 탓이야’라고 할 때, 그건 너 자신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네가 한 행동을 말하는 걸까?”

하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라는 사람?”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라는 사람’은 ‘환경’ ‘유전’ 그리고 ‘내 행동’ 중에 어디에 해당할까?”

하진은 손을 턱밑에 갖다 댔다.

“나라는 사람은 기질적인 걸 말하니까, 유전?”

하진은 영애를 쳐다봤다.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린 환경이나 유전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

“그렇지만, 그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거잖아요? 내가 선택한 행동만 바꿀 수 있고요.”

영애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영애는 마치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듯 말했다.

“지난여름, 형이랑 같은 옷을 입고 나갔는데 너만 땀띠가 났다고 쳐. 어떤 사람은 날씨 탓, 어떤 사람은 피부 체질 탓을 하겠지. 그런 데서만 원인을 찾으면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지겠지? 그게 무책임 아닐까?”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책임 있다는 건 뭐예요?”

“네가 이 티를 입기로 선택한….”

영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진이 말을 받았다.

“내가 선택한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 거죠? 그래야 다음에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

영애는 하진을 지긋이 바라봤다.

“일이 잘못됐다고 해서, 그게 전부 네가 선택한 행동 탓일까?”

하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환경이나 유전도 영향을 주니까, 다 제가 선택한 행동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거죠?”

하진은 마음이 가벼워져 영애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잘못한 결과에 대해서는요?“

영애는 가볍게 말했다.

“간단해.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야. ‘아, 내가 이렇게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구나.’하고. 그리고 다음엔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면 좋겠지? 그 전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찾아내야 하고…. 넌… 무엇을 원해?”

하진은 시선을 떨군 채 무릎 위 손가락을 천천히 맞부딪쳤다.

시선이 다시 영애를 향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엔 단단한 결이 묻어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바람이 낙엽을 몰고 지나갔다.

그 낙엽이 멈춘 자리 위로, 햇빛 한 줄기가 길게 드리웠다.

하진의 눈은 그 빛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찾아봐야겠어요. 내가 뭘 원하는지.”

하지만 자책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그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이 최근에 겪은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그 원인은 환경이었나요, 유전이었나요, 아니면 당신이 선택한 행동이었나요?

이 세 가지 중, 당신은 어디에 더 초점을 두고 있나요?

그리고 무엇이 바뀌기를 바라나요?


※책임

현실치료는 “우리는 자기의 행동을 선택한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행동은 과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생존, 사랑, 힘, 자유, 즐거움)를 충족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본다.

책임은 벌을 받거나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다음에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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