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너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니?

4부<문을 열며> 제23장 최선의 선택

by 박광석



“그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한심해서….”

하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낮게 이어 말했다.

“다시는 안 그럴 거지만, 이렇게 매일 버티기만 할까 봐… 겁나요.”

눈가가 붉어지자, 영애는 휴지를 그의 무릎 위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마음이 무겁지? 자신이 실망스럽고….”

“참 바보 같죠?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하진은 코 먹은 소리로 말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영애가 물었다.

“지금 같으면 그러지 않았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진아, 그날 이전의 너와 이후의 너는 같을까?”

“… 다르겠죠?”

“어떤 점이?”

하진은 눈물이 마른 눈으로 영애를 보았다.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걸요? 왜 그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땐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는 거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진에게 영애는 말을 이었다.

“그때 너는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고. 지금 너는 그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구나. 맞니?”

하진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바로 그거예요.”

영애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네가 달라졌네? 이걸 보면, 우리는 나날이 배우고 성장하는 게 맞는 것 같아.”

하진은 성장이라는 말이 신기했다.

조금 전까진 바보 같았는데, 이제는 어제보다 한 뼘 자란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

“그때는 네 경험이 거기까지였고, 지금은 네 배움이 늘어났으니까… . 그래서 그럴까?”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날이 성장하는 자신을 그려본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언젠가 영애샘처럼 누군가를 돕게 될까?

하지만 곧 불안이 밀려왔다.

아무리 달라져도, 그때의 행동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진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래도 자꾸, 제가 바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영애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그 일을 자책하는구나.”

잠시 후 영애가 덧붙였다.

“그 행동 말고, 어릴 때 한 행동 중에 후회되는 일은 없어?”

하진은 ‘어릴 때’라는 말이 고마웠다.

철없던 시절이니까.

“많지요.”

하진은 짧게 웃었다.

“글라써 박사가 해준 얘긴데, 들어볼래?”

하진은 바로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식물원에서 한 젊은이가 발가벗은 채 선인장밭으로 뛰어들었다네. 온몸이 선인장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겠지?”

하진은 ‘으!’ 하고 진저리를 쳤다.

“바보같이 왜 그랬대요?”

“그 젊은이가 이렇게 말했대. 그 순간,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고.”

하진은 시선을 피하며 혼잣말을 했다.

“꼭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영애가 덧붙였다.

“엄마 아빠도 싸우고 나면 후회하겠지. 그래도 그 순간엔 꼭 그래야 할 것 같았을 거야.”

하진이 한숨을 쉬었다.

“인간은 참 어리석네요.”

“맞아, 모든 인간이 그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선생님도요?”

“물론이지, 나도….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나아졌으니, 내일은 더 나아지길 희망하면서….”

영애가 웃자 하진도 따라 웃었다.

잠시 후, 영애가 차트를 가리켰다.

“하진아, 저기 영어 문장 보이지? 한번 읽어볼래?”

하진이 더듬거리며 읽었다.

“No matter how painful or self-destructive it appears…”

“아무리 고통스럽고 자기 파괴적으로 보여도,”

영애가 해석했다.

하진이 이어 읽었다.

“Every total behavior is our best attempt to get what we want… 모든 전행동은 우리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한 최선의 시도, 그런 뜻이죠?”


영애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하진은 차트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그런데 total behavior가 뭐더라?”

“전에 얘기한 것 기억나? 전행동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 그거. 활동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신체 반응. 그런 거요?”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모두가 다 행동이라는 뜻이지.”

하진은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그럼 소리 지르기도,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울해하거나 배 아픈 것도, 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얘기예요?”

“그렇지, 그때는…. 시간이 지나서야 더 좋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고.”

하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바보같이….”

창밖은 이미 겨울 문턱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어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마지막 붉은 잎 하나가 힘겹게 떨어졌다.

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땐 제일 땡기는 행동이 최선이라 믿었지만… 꼭 좋은 방법은 아니었네요.”

영애가 물었다.

“그게 혼란스럽니?”

“아니요. 경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영애의 질문에 하진은 시선을 멀리 던지며 말했다.

”누구랑 의논할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중요한 문제는요.“

하진의 시선이 돌아오자 영애는 말했다.

“어때? 지금도 너 자신을 자책하고 있니?”

“조금은요.”

영애는 의자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

“그 순간의 너로선 그게 최선이었는데, 그걸 어쩌겠니? 그러니까….”

하진은 영애의 입을 쳐다봤다.

“누구도 비난하면 안 되겠지?”

“저도요?”

“그럼. 그리고….”

하진은 숨을 죽여 들었다.

“남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듯, 너 자신도 비난하면 안 되지. 비난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거든.”

하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애는 그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비난은 욕구 충족은커녕 모든 욕구를 좌절시키니까. 그래서,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그가 한 잘못이 아니라 그가 받는 비난이 아닐까?”

하진은 시선을 떨구었다.

영애는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남이 너를 비난하면 피하면 되지만, 네가 너를 비난하면 어디로 도망가겠니?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되는 거지.”


하진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나를 사랑하는 방식.

하진은 영애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영애가 물었다.

“너 이런 말 들어봤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이, 성경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그건 예수님이나 할 수 있는 거죠.”

영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기가 새 바지를 입고 넘어졌다면, 그건, 아기로선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하진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렇죠.”

“새 바지 무릎이 뚫어졌다고, 아기에게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요. 아기들은 다 넘어질 수 있잖아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그렇지. 어제의 너는 오늘의 너에 비하면 아직 아기일지도 몰라. 그 아기를 보듬어 줄 수 있겠니?”

하진의 눈빛이 잔잔히 흔들렸다.

영애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게 최선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하진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그런 행동도 어느 정도 이바지하는 바가 있긴 하거든.“

“어떤… 거요?”

”네가 말하는 허접한 행동이 부모의 통제를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준 건 사실이지? 학교에 가라고는 했지만, 성적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때는 그렇게 해서 숨을 쉴 수 있었어요.”

“그렇지. 그건 네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던 거지?”

“….”

영애는 하진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의 너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니?

하진은 용서라는 단어가 마법의 알약처럼 느껴졌다.

이 알약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의 너는 허접했던 게 아니라 살아내려 애쓴 고육지책,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그러니 지금의 네가 그때의 너를 안아줄 수 있어야 해.‘

그러나 하진은 다시 흔들렸다.

허접했던 과거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혹시 누군가의 행동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나요?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돌아보면 우리 자신도 그렇지 않나요?

거짓말, 분노, 후회되는 행동조차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행동은 분명 잘못되었더라도 사람 자체를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혹시 지금, 당신이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안에 ‘과거의 나 자신’도 있지 않을까요?

※최선의 선택

선택이론에서 ‘최선의 선택’이란 완벽하거나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순간 내가 가진 조건 안에서 욕구를 충족하려는 최선의 시도라는 뜻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기본 욕구인 사랑과 소속, 힘, 자유, 즐거움, 생존 욕구를 충족하려는 시도이며, 그 사람이 가진 자원과 인식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마련한 행동을 선택한 것이다.

잘못된 행동조차 욕구 충족을 향한 시도이므로 비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무가치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행동은 평가하되, 사람은 수용한다는 관점이다.

현실치료는 과거가 아닌 지금-여기에서의 행동을 더 효율적인 것으로 선택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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