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물탱크

4부<문을 열며> 제24장. 자기에게 하는 외부통제

by 박광석

곧 12월이 온다.

겨우 남은 은행잎 하나가 바람에 휩쓸려 허공을 돌다 땅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진은 그 궤적을 따라갔다.

버티려 해도 힘이 빠지고, 붙잡을수록 더 흔들린다.


영애는 한숨 쉬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왜? 맘대로 안 되는 게 있나 보지?”

하진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더는 부모의 얼굴도, 잔소리와 한숨이 얹힌 그 무거운 눈빛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모가 불쌍했다.

놀러 다니지도, 자기 삶을 즐기지도 못한 채 오로지 자식 공부에 매달려 살았다.

고맙지만 그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엄마 아빠가 원하는 아들이 되고 싶어요. 성적도 좋고, 자랑스러운 아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안 돼요.”

하진은 무릎을 긁적이며 말했다.

“미워해야 하는데, 불쌍해서요. 자기 인생은 없고 전부 우리한테 걸었으니까. 그래서 제가 못 해주면 죄인 같아서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아들이 되려 해도, 제겐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럴 바엔 차라리…”

하진은 영애를 흘깃 쳐다보며 애써 웃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뭐 지난번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영애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능력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형만큼 좋은 성적을 말하니?”

“아니요. 부모님도 이젠 그런 걸 기대하진 않겠죠. 그저 열심히 노력만 해도 될 텐데.”


영애는 하진의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공부하려는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뜻이니?”

“네.”

하진은 고개를 숙였다.


영애는 서랍에서 인쇄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거 한번 해볼래? 관계 점검표야.”

그녀는 색연필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파란색은 아빠, 빨간색은 엄마. 두 분이 각자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 표시해볼래?”


종이의 왼쪽에는 ‘관계를 해치는 행동’이 적혀 있었다.

비판하기, 잔소리하기, 협박하기 같은 말들.

오른쪽에는 ‘관계를 좋게 하는 행동’이 있었다.

경청하기, 존중하기, 격려하기….


“이 행동들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 1, 2, 3으로 표시하면 돼.”

하진은 펜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하나씩 표시해 내려갔다.


몇 분 뒤, 하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영애가 물었다.

“어때? 네가 표시해 놓은 걸 보니까?”


하진은 종이를 보며 말이 없었다.

아빠와는 거의 말을 안 했다.

반면 엄마와는 자주 부딪혔다.

그래서 늘 ‘엄마는 편하지만 불편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결과를 보니, 엄마가 관계를 해치는 행동이 더 많았다.

비난, 잔소리, 협박.

반대로, 아빠는 관계를 좋게 하는 행동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나왔을까?’

아마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건, 염려하는 걸까?

그 염려가 결국 관계를 해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걸까?

이런 사랑은 원하지 않는다.

염려하여 관계를 해치는 사랑은 원하지 않는다.


영애가 다시 물었다.

“보니까 어때? 새로 알게 된 게 있을까?”

하진은 종이를 보며 말했다.

“네… 엄마가 아빠보다 저한테 외부 통제를 더 많이 하네요.”


영애는 빙긋이 웃으며 초록색 펜을 내밀었다.

“그러니? 그럼 이번엔 네가 너한테 하는 행동을 볼까?”

하진은 펜을 쥐었다.

쉽게 시작한 손은 멈추기를 반복했다.


표시를 마쳤을 때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엄마보다, 아빠보다…. 자기가 자신에게 관계를 해치는 행동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영애는 미소로 눈짓했다.

“어때? 네가 방금 본 그 결과, 소감이?”


창밖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창틀이 덜컥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틈새로 스며들며,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를 냈다.

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셋 중에 제가 가장 심하네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네가 너를 가장 모질게 대했다는 말이니?”

하진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네. 그러네요.”

“모든 증상은 단절이 원인이라서 말이지. 엄마, 아빠, 너. 이 셋 중에 누구와의 단절이 가장 힘들었을까?”

하진은 한참을 침묵하다 낮게 중얼거렸다.

“전… 정말 몰랐어요. 제가 저한테 이러는 줄.”

영애는 잠시 후 그를 보며 물었다.

“당위적 사고라는 말 들어봤어? must, should 같은 말 말이야.”

“아, 그거. 영어에서 배워요. 저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오히려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는걸요.”

영애는 놀리듯 웃었다.

“너 자신에게 엄청나게 잔소리했나 보구먼.”

하진도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정작 자신이 하는 잔소리는 눈치채지 못했다니.

단절이 무엇인지 진짜로 느껴졌다.

영애는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네 안의 네가, 너한테 친구가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맞다.

엄마도 내 편이 아니고, 아빠도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나도 내 편이 아니었다니….


“네가 너한테 그렇게 모질게 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응?”

영애가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안 좋은 건 분명한데… 뭐지?

하진은 망설이며 말했다.

“내 편이 없는 거죠.”

영애는 말꼬리를 잡듯 물었다.

“내 편이 없으면, 그게 뭐, 어때서?”

하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살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 굶주렸는데, 뛸 수 있을까?”

하진은 그 말에 허기가 느껴졌다.

배에서일까, 가슴일까, 아니면 머릿속일까.

어디선가 욕구의 굶주림이 들고일어났다.

영애가 A4용지를 내밀어 하진을 생각에서 불러냈다.

“봐봐.”

그녀는 흰 종이에 물탱크를 그리고, 그 위쪽에 수도꼭지를 그렸다.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물이 나오려면, 이 물탱크 안에 물이 어느 정도 차야 할까?”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볼펜을 받아 금을 그었다.

“이 정도요.”

영애는 다시 펜을 받아 들었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만약 여기 밑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줄줄 샌다면? 자기에게 외부통제를 해서 말이야.”

“구멍 뚫린 물탱크라면… 물이 채워지지 않겠죠.”

“그렇지.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이젠 다 찼겠지?’하고 수도꼭지를 틀게 되잖아?”

시계 초침 소리만 지금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렸다.

침묵이 흐른 뒤, 영애가 말했다.

“선생님 얘기 하나 해줄까?”

하진은 물탱크 꿈에서 깨어난 듯 영애를 쳐다봤다.

“네, 좋아요.”

선생님 얘기라니 궁금했다.

“선생님이 어느 날, 종일 강의하고 발이 퉁퉁 부었는데, 선생님 남편이 밥 먹으라고 성화인 거야. 몸 상한다면서. 그때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밥이 아니라, 발을 씻고 누워서 쉬는 거였거든.”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의 절정에서 엄마가 밥을 재촉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그때 깨달았지. ‘지금 내가 원하는 걸 허락하는 게 나를 위하는 거구나.’ 밥을 영원히 안 먹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쉬고 싶다는 거니까.”

하진이 곧바로 말했다.

“저도 그래요. 엄마가 원하는 걸 영원히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은 그냥… ”

영애는 하진의 맞장구에 미소 지었다.

“네가 지금 now. 지금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볼래?”

하진은 영애의 의도를 이해한 듯 웃었다.

“수도꼭지를 틀기 전에, 물탱크부터 채우려면요?”

상담실을 나온 하진의 발걸음은 오랜만에 가벼웠다.

쌀쌀한 바람에도 마음이 잔잔했다.

나를 옥죄던 당위적 사고들이 바람결에 씻겨 나가길 바랐다.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언젠가 누군가에게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젠가, 그 ‘누군가’ 속에는 과거의 나도 포함될 수 있을까?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혹시 당신도 자신을 다그치며 이렇게 말하지 않나요?

“나는 이래야 해. 이건 절대 하면 안 돼.”

하지만 그 말들이 오히려 당신을 더 지치게 만들진 않나요?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좋은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듯, 당신 자신에게도 지지와 격려를 건넨다면요?

※자기에게 하는 외부 통제

외부통제(External Control)란, 내가 원하는 대로 타인을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한 타인이 나를 행동하게 만든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4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①내가 너에게. ②네가 나에게. ③서로가 서로에게. ④내가 나에게.

내가 나에게 하는 외부 통제는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내면화된 외부 힘의 요구에 따르려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태도이다.

이는 자기가 처벌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처벌받는 자가 된다.

결국 에너지를 소모하고 좌절감을 일으켜, 자존감, 동기, 정서적 건강을 침식시킨다.

또한 탈진·우울·자기 파괴적인 대처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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