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자가 생산

4부<문을 열며> 제26장. 정서적 자립

by 박광석

엊그제 수능 점수가 발표 났다.

기적은 없었다.

엄마가 설거지할 때, 그릇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찌릿찌릿했다.

아빠는 TV 볼륨을 키워 그 소리를 덮으려 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한탄했다.

‘그렇게 과외를 시켜줘도… 이 성적으로 어딜 써… 내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

아빠가 ‘그만!’이라고 고함치자 순식간에 집안은 얼어붙었다.

형 방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하진은 숨을 죽이고 자기 방으로 피신했다.

정적으로 뒤덮인 집안은 무덤 같았다.

등굣길도 추웠다.

헐벗은 나무들도 슬프게 서 있었다.

교과서의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선생님의 설명도 바람처럼 지나갔다.

쉬는 시간에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상에 엎드려 잠든 척했다.

괜히 누가 와서 말 걸면, 사소한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할까 두려워서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르르 급식실로 몰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딴 세상 소리처럼 들렸다.


점심도 거르고, 자꾸 시계를 확인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하진은 곧장 가방을 챙겼다.

상담실에 들어 온 하진은 이제야 깊은숨을 내쉬었다.

영애의 따뜻한 미소가 하진의 뭉친 어깨 근육을 풀어주었다.

하진은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형 점수가 좋았으면…. 엄마 아빠가 기분 좋았을까요?”

영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시니?”

“네. 많이요. 그렇기도 하지만…. 제가 더 힘들어서요. 형이 대박 났으면 달랐을까요?”


하진은 숨을 몰아쉬며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했다.

“엄마가 기분 좋은 것도 하루 이틀뿐이었겠죠. 결국 또 싸우고. 도대체… 엄마는 언제 행복할 수 있는 걸까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영애가 거들었다.

“맞아. 원하는 걸 얻는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 원하는 걸 얻는 순간, 그 즉시 다른 원하는 게 저울 위에 올라와 또 기울어지거든.”

영애는 상담실 벽에 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하진도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걸 못 얻었다고 해서 또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야. 저울이 기운다는 건 단지 ‘행동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는 것뿐이니까.”


하진은 영애의 말이 낯설지 않았다.

지난번에 저울은 늘 기울어 있고, 저울이 기울면 행동하려는 충동이 생긴다고 했다.

단지 충동만.

하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영애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원하는 걸 얻는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고?

맞아.

형이 반에서 일 등을 했을 때, 엄마는 전교 일 등을 요구했다.

나더러 학교만 나가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성적까지 챙기라 한다.

영애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를 해냈다 싶은 하진은 또 다른 말을 붙잡아 곱씹었다.

‘원하는 걸 못 얻어서 불행한 건 아니다?

알 것 같다.

할머니가 준 당근을 내가 먹지 않고 뱉었을 때, 할머니는 화내지 않으셨다.

“당근이 먹기 힘들어? 괜찮아, 조금 더 크면 잘 먹게 되니까.”

할머니는 늘 그렇게 웃으셨다.

할머니의 웃음은, 원하는 대로 안 되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면….”

하진은 영애를 바라봤다.

“행동하고 싶은 충동? 그런 게 행복이랑 무슨 상관이…?”

영애는 미소 지으며 시선을 그림에 고정한 채 말했다.

“같은 상황인데도, 사람마다 기분이 다르지 않던? 너도 같은 일에, 언제는 기분 좋고 언제는 나빴던 적 없어?”

하진은 그림을 뚫어지게 보다가 영애를 보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행복은 상황이 아니니까, 원하는 걸 얻고 못 얻고가 아니네요. 그렇죠?”

영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기분을 결정하는 건 뭘까?”

하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선택한 행동이죠? 그 전행동 속의 ‘느끼기’가 지금 제 기분이 되는 거죠?”

영애는 눈꼬리를 젊은 하회탈처럼 내리며 웃었다.

“그러니 엄마의 기분은 누가 선택할 수 있을까? 누가 엄마를 기분 좋게 할 수 있을까?”

영애는 진지해졌다.

영애의 눈빛에 하진은 생각이 깊어졌다.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행동은 엄마만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영애가 이어 물었다.

“그런데, 엄마가 불행하기로 작정하면?”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 아무도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 순 없겠죠.”

하진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의 입술 끝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어떤 상황도, 어떤 정보도, 엄마는 그 의도대로 해석하겠지.

마찬가지로.

행복하기로 작정한다면, 엄마를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을 텐데….

갑자기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이 왜 이렇게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지 알 것 같다.

엄마를 웃게 하고 싶어서, 단지 그것뿐이다.

그런데… 만약에, 엄마가 불행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때 형은 어떤 선택을 할까?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그들의 행복과 불행은 그들의 선택이라고 자신에게 단단히 되뇌어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내가 형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긴, 내 행복이나마 내가 책임질 수 있기나 할까?

하진은 영애를 쳐다봤다.

“저 자신은 제가 기분 좋게 해야 하는 거죠?”

영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럴 수 있다면 좋지. 그렇다면 정서적으로 자립한 사람이 될 테니까.”

하진은 경제적 자립이라는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정서적 자립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정서적 자립요?”

“응”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훌륭한 사람의 모습 아닐까? 친절할 수 있고. 당당할 수 있고. 비로소 자기의 주인이 되는 거지. 글라써 박사도 이런 말을 했거든. 기분이 좋다는 건 자기 삶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요히 서 있는 나무들.

조용히 내리쬐는 밝은 햇살.

정서적 자립이란, 내가 원하는 기분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행복의 자가 생산.’

하진은 우연히 떠오른 이 말이 멋있어 보였다.

하진은 영애를 보며 물었다.

“언뜻 기분이 나쁠 땐 어떻게 해요?”

영애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수 있지. 넌 자동차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켜지면 어떻게 해?”

하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뭐지?’ 이렇게요.”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내가 선택한 앞바퀴의 방향이 잘못되었나?’ 이렇게.”

하진은 입술에 결심을 담았다.

“알겠어요. 느낌이 안 좋을 땐, 생각하기나 활동하기를 점검하라는 말이죠?”

영애도 실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렇지. 내 차에 경고등이 켜졌는데, 다른 차들 보고 점검하라고 하면 좀 우습지 않니? 넌 어떻게 할래? 네가 기분 나쁠 땐?”


하진은 대답했다.
“맞아요. 내가 기분 나쁜데, 남보고 바꾸라고 하는 외부 통제는 아니죠. 내 기분이 나쁘면, 당연히. 내 활동과 생각을 바꿔야죠.”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하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완전히 반대로 살아왔던 것 같다.

엄마의 끝없는 불만과 요구 속에서 숨 쉬며, 자신도 모르게 남을 탓하며 살아왔다.

하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 기분이 나쁠 때는, 남이 아니라 나에게 요구하겠다고.

상담실 밖은 추웠다.

웅크리고 걷는 사람들.

하진은 누군가에게 친절해지고 싶었다.

자신에게도 더 당당해지고 싶었다.

가지만 앙상한 가로수도 겨울을 견디며 당당히 서 있거늘.

나도 그럴 수 있기를.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은 기분이 나쁠 때, 혹시 다른 사람이나 외부상황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나요?

당신은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했나요?

똑같은 상황에서도 기분 좋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결국 당신의 기분은 당신의 생각인 상황에 대한 해석이 결정합니다.

당신은 기분 좋은 것과 나쁜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나요?

기분이 나쁘면 누군가에게 무엇엔가 의존하게 될 거예요.

기분이 좋아야 타인에게 친절하고 자신이 당당해질 거예요.

※정서적 자립

정서적 자립이란, 외부 사건과 상관없이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기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생각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자기 허락 없이는 아무도 자신을 불행하게도 행복하게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자유를 얻는다.

외부 통제 심리학에 매여 살면 늘 타인과 상황에 흔들리게 되고, 자기 행복을 남에게 의존하게 된다.

정서적 자립은 내 기분을 내가 선택한다는 내적 통제력을 의미한다.

이는 곧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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