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라는 외투를 벗어 놓고

4부<문을 열며> 제25장. 과거 대하기

by 박광석

학교를 마치고 상담실로 향하는 길, 하진은 목도리를 고쳐 두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희뿌연 입김이 흩어졌다.

그 입김 사이로 학교의 공기가 아직도 떠다니는 듯했다.

교실의 공기는 낯설었다.

장난과 웃음이 오가지만,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그들은 마치 수능을 앞둔 수험생 같았다.

그 비장한 표정들이 유난히 눈에 꽂히는 까닭은 왜일까?

벌써 상담실 문 앞이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길은 순식간에 잘려 나간 듯했다.

문을 여는 순간,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얼어붙은 손끝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영애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 하진아. 춥지?”

영애의 목소리를 듣자 비장했던 마음이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입술을 씰룩거리는 하진을 보며 영애는 말했다.

“에구,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

하진은 얼었던 마음이 풀리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터져 나왔다.

“집은 요즘… 수능 점수 발표를 앞두고…. 가채점 결과 형이 아무래도 폭망한 것 같아요. 형은 방에 틀어박혀 있고, 엄마는 자꾸 한숨만 쉬고요. 아빠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TV 소리를 높이고요.”

하진은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천천히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꾸 그 분위기에 끌려 들어가서.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서겠지’ 하는 생각이 나서요.”

하진은 영애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저… 좀 후회가 돼요.”

하진은 한숨을 반쯤 내쉬다 멈췄다.

“중학교 전까진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공부 잘했어요. 그런데 더는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일부러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러다 버릇이 돼서, 이제는 하려 해도 잘 안 돼요. 그때 놀던 애들이 지금 공부 잘하거든요. 그때 엄마 말을 거부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아요.”

하진이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영애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은…. 공부하는 습관을 갖고 싶다는 거니?”

하진은 무거운 돌이 빠져나간 듯 가볍게 말했다.

“네. 맞아요.”

하진은 영애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선생님, 후회되는 게 또 있어요.”

“그래? 말해봐.”

“상담을 더 일찍 받지 않은 거요.”

영애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랬다면 지금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지금요? 제가 저를 더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

영애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너를 더 사랑한다면 지금 너는 무슨 행동을 하고 있을까?”

“지금요? 저에게 도움 되는 행동을 하겠죠.”

영애는 다시 물었다.

“너에게 도움 되는 행동이라면, 예를 들어?”

하진도 영애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가령, 공부하든지. 그런데요…. 선생님. 왜 자꾸 지금, 지금 그래요?”

영애는 크게 웃고 나서 웃음 끝을 정리하며 물었다.

“생각해봐. 하진아. 너는 과거에 행복했기를 바래? 아니면 지금 행복하기를 바래?”

하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야, 지금이지요.”

하진의 눈빛을 붙잡으며 영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지금 행복 하려면 욕구는 언제 충족되어야 할까? 과거? 아니면 지금?”

“그야 지금이겠지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그렇겠지? 그래서 지금으로 너를 데려오려고…. 하진아, 넌 언제 과거가 네 발목을 잡는다고 느껴? 항상 그래?”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게임 할 땐 괜찮아요. 그런데 지금처럼 불안할 땐 자꾸 과거가 떠올라요.”

“맞아. 현재가 힘들면 과거를 탓하게 되지. 그런데 왜 원인을 굳이 현재가 아닌 과거에서 찾을까?”

영애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하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지금 행동에서 원인을 찾으면 제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바꿔야 하고요.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그냥 탓만 하면 돼요. 책임질 일도 없고요.”

영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과거에 발목을 잡혀 사는 건 결국…?”

영애의 질문에 하진은 숨을 들이켰다.

대답이 입 안에서 맴돌다 천천히 흘러나왔다.

“…책임을 피하는 거네요. 무책임한 거예요.”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자꾸 과거만 붙잡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하진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이내 반짝였다.

가슴속엔 묘한 해방감이 스며들었다.

영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하진의 머릿속에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늘 옛날얘기로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억지로 과외 시킨 얘기, 외삼촌보다 공부 못 한다고 구박했다는 얘기.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담임이 준 선배 문제지를 지워 가며 공부한 얘기,

학교 갈 돈이 없어 고학으로 고생한 얘기.

엄마 아빠도 지금의 불행을 과거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닐까.

사이가 좋았을 땐 과거의 상처가 큰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과거를 탓하는 대신 두 분이 더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진은 입맛을 다셨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현재만 살겠다고.

그리고 현재를 더 잘 살려고 노력하겠다고.

그래도 그렇지.

내 맘과 상관없이 자꾸 과거가 떠오르면 어떻게 하지?

하진은 눈을 들어 영애를 찾았다.

영애는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하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 자꾸 ‘과거에 다르게 했더라면….’하고 생각나서. 과거가 제 발목을 잡으면 어떻게 해요?”

영애는 빙그레 웃었다.

“그게 어떤 문제가 되는데?”

하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무력감만 커지고, 희망도 없고요.”

영애는 희망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러면 어떨까? 과거라는 외투를 벗어 옆에 가지런히 개어 놓는 거야. 있었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단지 잠시 내려놓는 거지. 그리고….”

하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거라는 외투를 벗어 놓고?


“그리고요? 선생님.”

하진의 독촉에 영애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지금 원하는 것을 찾는 거지.”

하진은 그 말을 곱씹었다.

원하는 걸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얻을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싶었다.

“선생님, 그래도 자꾸 과거가 떠오르면요?”


영애는 까르르 웃었다.

“한순간엔 한 행동만 가능하잖아? 이걸 하면 저걸 못하고, 저걸 하고 이걸 못하고. 그러니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할 수 없을걸? 원하는 미래와 아픈 과거를 동시에 말이야.”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쐐기를 박듯 다시 물었다.

“그래도 과거가 생각나면요?”

영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금 어려운 얘기인데, 말해도 될까?”

어렵다는 말에 눈을 더 반짝이는 하진을 보며, 영애는 말했다.

“네가 말한 그 과거는 객관적 현실이 아니거든. ‘지각된 세계’ 생각나? ”

하진은 그림이 떠올랐다.

파랑은 현실 세계, 빨강과 노랑, 그리고 초록은 지각된 세계.

좋거나 나쁜 지각된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낸 자기만의 세계라고.

“아, 그러니까, 과거를 실패라고 해석한다는 거죠? 그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것도 목적에 따라서 말이지. 예쁘게 볼 필요가 있을 때 예쁘게 보고.”

영애는 반 박자 쉬었다.

하진은 영애의 말을 마무리했다.

“나쁘게 볼 필요가 있을 때만 나쁘게 본다는 거네요. 그런데요. 선생님.”

하진은 또 쐐기를 친 곳에 말뚝을 박듯 다시 물었다.

“그래도 과거가 저를 놓아주지 않는다면요? 제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요?”

영애가 대답하려는 순간 하진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막았다.

“과거라는 외투를 벗어 놓는 거죠?”

창밖엔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눈송이가 하늘에서 춤을 추듯 흩날렸다.

눈의 왈츠.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지금 당신이 후회되거나 원망스러운 과거가 있나요?

그 과거가 현재 당신의 삶을 결정했다고 믿나요?

만약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은가요?

당신이 원하는 그 삶을 위해 당신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과거

과거 경험이 우리의 신념과 행동 방식을 설명하는 자료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선택이론과 현실치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거나 결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과거를 현재 문제의 원인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책임 회피로 여긴다.

욕구 충족은 오직 지금과 미래에만 가능하다고 글라써는 말한다.

따라서, 치료자는 내담자가 현재 자기 행동을 효율적으로 선택하도록 돕는다.

현실치료의 초점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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