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시 26.

by 쏠이

가끔은 내가 이곳에 있었던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다

꾸역꾸역 기억해내보아도

엄청나게 행복했던 기억은 없다

오히려 힘들어 울었던 기억이 많다


그래 이 집에 살았던 나는 힘든 일들이 많았지

그래서 이 집을 생각하면 그리 정겹고 사랑스럽지 않아

그래도

이 집에 살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할아버지와 친구들

이 집에 살지 않았더라면

고난과 행복의 자전거 길

이 집에 살지 않았더라면

마음껏 누워 책과 티브이로 하루를 지새우지 못했겠지


내가 이 집을 떠나고 이 집에는 더 좋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 결과 이렇게 방명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명록을 남기게 될까


오래 전 워홀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절대로 이 추억을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기억과 감정은 희미해져 갔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에도 덤덤할 만큼.

그래서 삶에는 현재만 있다고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방명록을 남기는 이유는

나중에 누군가 내 낡은 방명록을 읽어주길 바라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방명록을 남기는 이유는

나중에 기억조차 하지 못할지라도

방명록을 남기는 순간

이 순간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방명록을 썼던 과거는 존재하지 않게 되더라도

영원할 거라 약속하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방명록에

또박또박


집을 지구로 바꾸어 한번 더 읽어보세요. 방명록은 삶에대한 나의 반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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