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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뚜 May 11. 2022

도시락

치매 엄마와 사는 이야기

S의 학교 내 식당이 공사에 들어갔다. 식당 대신 밥차를 불렀는데 부실한 게 문제가 되어 새로운 업체 선정하기까지 빵을 점심으로 주고 있다 했다. 학교에 다녀온 S가 빵이 맛이 없단다. 밥에 진심인 녀석인데 덜 녹아 서걱거리는 빵이 싫다고 했다.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사두고 몇 번 안 썼던 보온도시락통이 이럴 때 요긴하게 쓰이는구나.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15분 일찍 일어나는 게 꽤 힘들다. 밤이 되면 무섭다고 건너와 잠을 자는 S 때문에 딸들의 발밑에 이불 깔고 잔 지 벌써 한 달이 다 돼간다. 이제 적응이 됐는데 도시락 싸느라 잘 시간이 조금 줄어버려서 아쉽다.

현관문 앞에 새벽 배송 온 박스를 들여다 놓고 신문도 들고 왔다. 오늘은 뭘 싸야 하나. 어제 먹었던 불고기를 또 싸주려고 주문했는데 해동이 안돼서 바로 요리하기도 어려웠다. 며칠 전 주문해놓은 미역국이 생각났다. 침대에 누워 뭉그적뭉그적 잠을 추억하고 있는 S에게 물었다.


"닭개장 싸줄까?"

"... 싫어. 맛없어..."

"짜장 싸줄까?"

"....... 또?"

"그럼 카레 싸줄까?"

"하..... 싫어.."

"미역국 싸갈래?"

"....... 그거밖에 없어?"


마뜩지 않아하는 눈치인데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역국을 싸가기로 했다. 어제저녁에 씻어둔 보온 반찬통 하나에 국을 펐다. 그다음은 밥을 푸고 얼마 전에 담은 오이소박이를 쌌다. 같은 반 누구는 유부초밥을 싸왔는데 걔네 엄마가 하트를 그려 넣고 이쁘게 장식해서 싸왔다는 말을 이미 들은 터라 도시락을 챙기면서도 부담이 일었다. 우리 때와는 달리 필요한 물품을 웬만하면 거의 학교에서 제공받는 요즘 아이들의 부모에게 있어 도시락은 엄마의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모든 엄마가 다 그렇게 해줄 순 없는 거라고 얘기했지만 휴직까지 하고 있으면서 도시락 하나를 정성스럽게 못싸주는 가 싶어 이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나한텐 이게 최선이다. 아침에 야채 볶아서 유부주머니 하나하나에 밥을 밀어 넣으며 싸는 게 얼마나 고생인가 말이다. 손이 더딘 나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 완성하고 나면 진이 빠져서 충전하느라 좀 쉬어주어야 한다.


마지막 남은 반찬통 하나에 방울토마토를 씻어서 채워 넣고는 도시락 싸기가 끝났다. 아이들 밥 챙기랴, 도시락 싸랴, 물 끓이랴 정신이 없는 아침이었다. 이걸 학교 다니는 내내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번거로울까. 나 학교 다닐 때는 항상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른 아침마다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올리고 도시락을 쌌을 영희 씨 생각에 이르렀다.


소풍 가는 날이면 김밥을 싸는 게 국 룰이었다. 시금치, 소시지, 오이, 당근, 계란으로 보기 좋게 만 김밥을 가져오는 친구들의 도시락이 부러웠었다. 의기양양하게 김밥 도시락 2개를 가져와서 담임선생님에게 한 개를 드리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명색이 부반장인데 선생님에게 김밥 도시락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게 어린 가슴에 남았었다. 우리 집 김밥은 다른 집 거랑 달랐으니까. 맨밥에 간장 넣고 깨소금 뿌려 싼 김밥. 나도 먹기 싫은 걸 선생님에게 줄 수는 없어서 한 개 더 싸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더 어릴 적엔 제대로 된 김밥을 먹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언제 적 인가부터 그랬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도시락통을 열었는데 지난번 소풍처럼 똑같은 김밥을 싸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창피함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뚜껑으로 가리고 누가 볼까 입속으로 어넣으면서 분했었더랬다. 내가 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결국 난 도시락의 반만 겨우 먹고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산골에서 김밥 재료를 재빠르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쌀을 팔러 5일장에 나가지 못하면 반찬이 없어서 있는 거로 김밥을 말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알록달록 색깔의 김밥을 꽤 좋아한다. 눈으로 한번 음미하고 입으로 왕~ 들어가서 입안 가득 퍼지는 재료의 꽉 찬 맛을 좋아한다. 그땐 간장과 깨소금으로 만든 김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김밥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에 안도를 느끼고 새삼 감사를 느낀다.


"딸, 내일은 뭐 싸줄까?"

피부과에 다녀오는 길에 S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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