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나는 밤새 시뻘게진 눈으로 두꺼운 육아일기 책을 넘기고 있었다.
혜민 199X.12.XX 새벽 5시 54분 3.2kg
부모님 집 옛날 앨범들 사이에서 찾아낸 빛바랜 책 두 권. 아이의 성장 과정에 따라 기록을 할 수 있고 사진을 붙일 수도 있게 된 육아일기장이었다. 나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여기에 나, 첫째 동생, 막내 동생의 발도장이나 첫 옹알이, 첫걸음마를 뗀 순간이 기록되어 있겠지. 엄마 특유의 단정한 글씨체로 기록된 첫 장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던 나는 곧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육아일기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엄마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어제는 없는 채소 긁어다가 반찬 해 놓으니까 국 없다고 시비하더니 젓가락을 탁 놓고 밥을 남겼다. 총이 있으면 쏴 죽이고 싶다. 뱃속에 애나 없으면 가벼울 텐데. 쌓이고 쌓인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힘들고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하루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몇 개월 더 살다가 나는 얼굴이 아마 울상으로 변하고 죽어버리겠다고 뛰어 나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든다.
나의 탄생과 축복이 기록된 그곳에 동시에 엄마의 날 것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음이 요동쳤다. 감정 기복이 없이 항상 온화한 엄마,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이겨내는 밝은 엄마.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들은 사라지고 봐서는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것은 육아일기가 아님을, 육아일기의 탈을 쓴 날것의 고백임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