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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 Mar 17. 2024

여자들은 명함이 없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여자들에겐 명함이 없다.

특히 나 같이 평범한 여성에겐 내세울만한 직분이 없다.
가정주부로서 남편의 지위와 자식의 성장으로 빗기게 되는 여자의 위치. 그것이 전부이다.
지금 접대 술을 마시고 즐겁게 지낼 남편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새벽 2시가 넘도록 놀 수 있고 돈 쓸 수 있도록 허락된 사회 조직, 분위기, 또한 그렇게 해야만 잘 대접했다고 느끼는 상호 간의 만족감.
도대체 무엇에 씌었길래 아직도 밖에서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대전 토박이들과, 그 나머지 날에는 사업상 필요한 것이라며 밤새 늦게 오고, 그럼 가정은 그 술 냄새나는 뒷치닥거리로 채워지는 쓰레기 더미인가?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생활이다.

아기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몇십 년 후 이와 같은 고민을 다시 하게 될 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 본다.
그래서 남자가 태어나기를 선호하는가 보다.

아이에게 이런 너저분한 감정들, 남편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부터 피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꼭 내 딸만이 아니더라도 계속된 세대교체 속에서 뿌리내린 이 악습들을 깨뜨려야 되겠다.

 


이 나이 되고는 집에 있으면서 너네들이 먹을 반찬을 해주는 게 행복이야.


종종 엄마는 딸들과 싸운다. '엄마, 우리도 이제 다 컸으니까 엄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이런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럽고 애타기 그지없다.  '이 나이에 뭘 또 시작하니? 번거롭고 싫어.',  '나는 이제 너네랑 아빠 잘 된 거 보는 걸로 족하다.'


딸은 이런 엄마가 도무지 답답하다. 어떻게 그게 꿈이고 인생의 행복이 될 수 있냐며 이런 대답을 하는 엄마를 붙잡고 설교하며 늘어진다.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을 살아야지. 엄마는 꿈이 없었어?' 그러나 몇 차례의 진전 없는 대화를 거치고 딸은 이내 포기한다. '그래, 지금 엄마가 행복하다면 됐지. 이 삶도 엄마가 선택한 삶이야.'


아마 그 딸들은 30년 전 엄마의 중요한 인생 목표가 <아이들을 똑똑하게 키우는 것>이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엄마의 삶에 존재했던 제약과 한계를 생각하지 못한 채 엄마의 삶은 결국 본인이 선택한 것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엄마의 일생을 티끌만큼도 알지 못한 것이다. 세대교체를 통해 사회적 악습을 깨뜨려야 하지 않겠냐는 일기장 속 엄마의 말투, 내가 평소 엄마에게 잘 쓰던 게 아니었던가. '준비가 안 됐더라도 아이가 생기면 낳아서 잘 길러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의 말에 ‘기성세대는 답답하다’, ‘이래서 불합리한 제도가 답습되는 게 아니냐’며 열 올리던, 엄마의 사상을 뜯어고치려 든 내 모습이 떠올랐다.




힐러리처럼 키우겠다


한창 회사를 다니며 '사회생활'을 하는 나. '주부'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는 엄마. 내가 걸어가는 길은 엄마가 이미 걸어온 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다 결혼을 하며 퇴직한 엄마는 세 아이를 낳아 길렀다. 첫 아이 낳고 3개월이 채 되기도 전 외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엄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를 했다.


매일 교육 방송 듣기, 소설 읽기, 중국어 공부하기 등의 계획을 일기 매 페이지 끝에 적던 엄마의 모습은 '책 읽기', '글쓰기' 같은 할 일들로 빼곡히 하루 일정을 기록하는 나의 모습과 참 닮았다. 돈을 벌고 육아도 혼자 하면서 아빠의 아침밥까지 챙기던 엄마는 과연 얼마나 계획한 것을 지킬 수 있었을까?


반복되는 일상, 포기하게 된 많은 것들에 대한 답답함 속에서 엄마를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책 읽기 같은 단순한 일상의 계획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엄마는 다짐한다. 현재 본인 삶의 낙은 아이들이며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아이들 때문에 발 묶여있는 상황이 답답하고 탈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이 아이들을 제대로 똑똑하게 교육시키려는 의지는 엄마의 강함을 보여준다.


엄마가 딸들을 힐러리처럼 키우겠다는 다짐은 단지 자식이라서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만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여성이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주체적인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튼튼하고 굳세게 기르겠다는 세상을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딸은 나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세상이 험할지라도 굳센 힘을 가졌으면 하는 꿈. 엄마는 둘째를 출산한 뒤 그런 꿈을 육아일기에 기록한다.



오늘은 무엇을 했나. 어떻게 살았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이들 키우는 것이다. 혜민이 혜성이 좋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애들 얼굴 보고 있으면 든다. 이 자식들 특히 여자라서 조심스럽기 한이 없다. 세상은 무섭고 험한데 굳세고 튼튼하고 지혜롭게 키워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닥치면 튼튼한 몸과 정신력으로 이겨낸다.

아름답고 튼튼하고 출세하라고 지어준 이름.
혜성아, 여자로서 누릴 행복 인간으로서 누릴 행복과 자유 성취 모두 누리거라.
꼭 이뤄내라. 무슨 일이든 혜성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거든. 알았지?
엄마는 그런 혜성이를 꿈꾼단다.
내 마음


힐러리처럼 똑똑한 여성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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