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7년 째, 직간접적으로 번역을 경험하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번역투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케케 묵은 직역과 의역 사이의 논쟁에서도 이 전제는 마치 진리처럼 숭배된다. 교수의 "번역투 X"라는 피드백은 과제 코멘트란의 단골손님이며, 외주로 일할 때도 가이드라인에 "번역투는 삼가"해달라는 문구가 반드시 있다.
과연 번역투는 죄악일까? 어느정도는. 세종대왕님께서 노하시는 건 둘째치고, 읽는 사람 입장에서 과한 번역투는 불-편하다. 과거 모 매거진에서 번역한 외국 기사를 카드뉴스로 제작하는 외주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곳곳에 산재한 번역투에 정신이 아득해진 적도 있었다. (지금은 조치가 취해졌는지 깔끔하게 잘 읽고 있다.)
하지만 음악에서 번역투는 조금 다르게 읽히기도, 아니 들리기도 한다. 물론 음악에서의 번역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과거엔 '번안'이라는 것이 있었다. 외국어로 쓰인 외국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재녹음한 것을 번안곡이라고 불렀다. 주목할만한 점은 번안곡의 가사는 원곡의 음절과 거의 맞추어져 있으며 그 내용이 극도로 자국화(Domesticating)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헤이 주드(Hey Jude)의 주드를 영희 정도로 바꾸는 것이다. (너무 갔나?) 80년대까지 한국 대중가요엔 번안곡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저작권 의식이 느슨했던 시기라 가능했다.
요즘엔 그 추세가 조금 다르다. 인터넷이 음악의 최대 창구가 되면서, 외국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리스너들은 외국곡의 가사가 궁금해졌고, 그중 영어를 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몸소 가사를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렸다. 유튜브 시대로 접어들자, 음악 재생에 맞춰 번역된 한국어 가사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제작된 영상도 유행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번역은 소위 말하는 '의역'으로, 극도의 자국화는 견제하되 어느 정도 유려하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녹여내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번역'에 속한다.
여기까지의 번역은 우리에게 익숙한 "번역투는 죄악"이라는 진리가 적힌 번역의 영역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을 추구하는 곳이다.
언제부턴가 한국계 외국 뮤지션들이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하면서, 한국어 가사가 외국곡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굳이 해외 리스너가 이해하지도 못할 한국어를 쓰는 이유는 마치 한국곡에 뜬금 없이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같은 제3언어가 등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 의도와 관계 없이, 이렇게 등장하는 번역된 한국어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리스너 입장에서 아주 새롭게 다가온다. 왜 그런지는 한국어보단 영어가 익숙한 한국계 외국 뮤지션이 한국어 가사를 쓰는 과정에 대해 유추해보면 그 답이 나온다. 우리도 대체로 영작을 할 때, 한국어로 일단 글을 써놓거나 최소한 머릿 속으로 생각해놓고 그 텍스트를 영어로 옮긴다. 그 과정에서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본다. 하지만 수많은 동의어 중 맥락에 정확히 맞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원어민의 입장에선, 뉘앙스가 아예 다른 표현이 듣기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 한국계 외국 뮤지션들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한국어 가사를 쓸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다국적 밴드 슈퍼올가니즘(Superorganism)엔 한국계 멤버 솔(Soul)이 있다. 그들의 대표곡인 <Something For Your M.I.N.D.>엔 "무엇인가 정신에 집어넣으세요, 마음에 어떤 것 필요합니까?"라는 한국어 가사가 등장한다. 통통 튀는 멜로디와 사운드에 이렇게 건조한 표현의 한국어가 들리니, 처음엔 재밌다가 순간 섬뜩해지기도 한다. 마치 흑마법을 거는 것 같달까. 번역투에서 느껴지는 묘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그대로 꽂힌다.
예지(Yaeji)는 뛰어난 프로듀싱과 함께 독특한 한국어 가사로도 주목을 받게 된 아티스트다. 그녀의 한국어 가사는 특히나 비일상적이다. 단순히 번역투에서 오는 감성이라기 보단, 가사의 내용 자체가 그렇다. <Last Breath>에선 마지막 숨의 순간을 빗댄 가사를 뷰티 유튜버의 대사처럼 읊는데, 이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낯설다. 외국 리스너 입장에선 이러나 저러나 똑같이 못 알아듣는 한국어겠지만, 모든 뉘앙스를 알아차릴 수 있는 한국인이라면 예지의 가사가 참으로 기묘하다고 느낄 것이다. <Raingurl>이나 <Drink I'm Sippin On>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 Japanese Breakfast가 기존에 발매했던 곡 <Be Sweet>를 새소년의 황소윤과 함께 한국어로 부른 버전이다. 위 두 곡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곡은 영어로 쓰인 오리지널 가사가 이미 있고 이를 번역하여 재녹음한 트랙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번안'과는 다른데, 이 곡은 자국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번역투가 가득하도록 직역되었기 때문이다. 재밌게도 번역은 예지가 맡았다. 따라서 예지의 한국어 가사가 주는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다. "Tell the men I'm coming, tell them count the days"를 "그들에게 말해, 내가 오고 있다"로 번역한 부분이나 "Be sweet to me, baby"를 "내게 반성해봐"로 번역한 부분에선, (당연히) 예지가 단순히 번역기를 돌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사는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번역투는 죄악"이라는 진리가 통용되지 않는 음악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요상한 한국어의 인상은 한국인 리스너만 경험할 수 있다.
아예 다른 얘기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언어라는 건 익숙함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비난받던 "짜장면"이 표준어가 된 것처럼. 그러고 보면 '어색한 번역투'라는 말 자체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단, 그냥 익숙함과 낯섦의 영역 아닐까. 이 글에서 '~ 것이다'나 '그녀', '~ 경우에' 같은 표현은 전부 번역투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이런 표현에 이제 익숙해지지 않았나. '~ 것이다' 같은 경우엔 심지어 번역 외주 작업할 때도 크게 트집 잡히지 않는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선 "마침내", "단일한" 같은 낯선 표현이 나온다.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영화 상에선 해당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 우리에겐 어딘가 어색한 한국계 외국 뮤지션들의 표현도 어떤 면에선 오히려 적확한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