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친정엄마의 첫마디는 "회사 그만둘 거지?"였다. 아이가 둘이었을 때도 워킹맘 노릇은 힘겹기만 했으니까, 아마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리라 생각하셨나 보다. 사실 당시 나는 임신이라는 사건 때문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회사는?!'
답을 내는 건 쉬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고, 아이 둘 키우면서 회사 다녔던 것처럼, 애가 셋이어도 회사는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다른 이유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셋이어서 회사를 그만두는 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아이 셋과 함께하는 워킹맘 생활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막내가 세돌이 지났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할 때, 아이가 셋이라고 하면 일단 놀라고, 회사 다니고 있다고 하면 또 한 번 놀란다. 이어서 대단하다고, 힘들겠다고 얘기해주는 분들이 많다.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힘든 일이라는 말에는 격하게 공감한다. 가끔 궁금해진다. 나는 아이라면 예뻐서 껌뻑 죽는 스타일의 엄마도 아니고, 일하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면서 열정적으로 임하는 회사원도 아닌데, 어쩌다 아이는 셋이나 키우면서 워킹맘 노릇은 10년째 계속하고 있는 걸까. 한동안은, 그저 내가 스스로 워킹맘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나의 선택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단지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첫째, 1세대 워킹맘에게 배운 것, 슈퍼우먼 포기하기.
56년생 친정엄마가 나를 낳던 그 시절, 출산휴가는 한 달 뿐이었고, 대부분의 기혼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그만뒀었다고 한다. 엄마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회사를 계속 다니겠다고 했었는데, 그 결정은 다른 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빠는 아빠의 벌이가 오죽 모자라면 맞벌이를 하는 거냐면서 자존심 상해했고(물론 그 시절 다른 아빠처럼 육아, 가사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딸인 나도, 엄마가 회사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 다녀온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밀려있는 설거지를 하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곤 했으니까. 어디서도 지지받지 못하는 워킹맘이었던 친정엄마는, 최대한 욕을 덜 먹기 위해서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도 열심히, 집안일도 부지런히, 아이들 챙기는 것도 꼼꼼히 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웠다. 엄마는 옷도 사주고 학원도 보내주고 용돈도 챙겨줬지만, 정작 내 마음을 보듬어 주진 못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워킹맘 생활을 해보니 알겠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다만 1인 3역을 해야 하다 보니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여유가 없었다는 걸. 엄마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뒀고, 헛헛함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엄마를 보면서 다짐했다. 슈퍼우먼이 되지 않겠다고. 다 잘하려고 애쓰다 지쳐서 스러진 1세대 워킹맘 친정엄마를 보았기에, 너무 애쓰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땐 아이들 마음관리를 최우선으로 두되, 그 밖의 일은 단순하게 줄이거나 생략하고, 가능한 한 아웃 소싱한다. 그 결과 현재의 나는 좀 모자란 회사원이고, 세심하지 못한 엄마고, 가사에 서투른 주부다. 100점 엄마, 100점 회사원, 100점 주부이기를 포기한 덕분에, 엄마와 회사원과 주부를 겸하는 10년 차 워킹맘일 수 있었다.
둘째, 맞벌이 비용보다 많은 월급
내 월급은, 시터에게 주는 월 급여보다 많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한 주거비용과 남보다 잦은 외식비용까지 감안해도 조금은 더 남는다. 아이들 챙기는 부분까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니 정확한 비교를 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내 월급은 가계경제에 이익을 가져다준다.
막내가 갓 태어나고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근무시간을 줄였을 때는, 맞벌이로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많았다. 한시적이었으니까 버티고 넘어갔지만, 지속적으로 마이너스 상태였다면 도대체 회사를 왜 다니냐는 말을 들었을 것이 뻔하다. 돈 얼마나 번다고 바득바득 일을 하느냐, 애도 셋이나 되는데 애나 챙길 것이지,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애들 잘 챙기지 못하는 게 마뜩잖은 남편과 시가식구들에게 이런 공격을 받았을 거고, 아마 나는 워킹맘이어야 하는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회사 사람들에 비하면, 내 월급은 적은 편이다(딱히 유능한 회사원은 아니기에). 그래도 맞벌이로 인한 추가 비용을 지출한 후 남는 돈으로, 죄책감 없이 일주일에 한 끼 정도는 부담 없이 외식도 하고, 나 자신을 위한 작은 이벤트도 할 수 있다(월급날에 나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한다던지, 부담 없이 읽고 싶은 책을 결제한다던지, 피아노 학원에 등록을 한다던지). 적당한(?) 수준의 내 월급은 이렇게 나에게 작은 행복이 되어주고, 지속적으로 워킹맘일 수 있는 명분이 되어준다.
셋째,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
만일 아이 셋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많이 아팠다면, 유난하게 민감한 성격의 아이였다면, 정서적 문제가 있거나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면, 내가 워킹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명쾌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난 그저 회사를 다니는 거지 무슨 대단한 일을 해내서 승진하고 인정받고 후세에 이름을 알리겠다는 건 아니니까,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회사는 제쳐놓고 아이를 선택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고맙게도, 세 아이들은 별문제 없이 자라주고 있다. 어린이집에 등원할 때마다 가기 싫다며 실랑이를 하고,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간혹 울먹이고, 작은 사건사고로 친구를 다치게도 하고 다쳐오기도 하지만, 그냥 아이들에게 있을법한 수준의 일들일뿐 그렇게 유난하게 특별난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침에 알아서 일어나고 옷 챙겨 입고 머리도 스스로 빗고 준비물과 숙제 스스로 챙기고 등교하고, 학원도 시간 맞춰 챙겨가는, 엄마 손길 없이도 알아서 잘 하는 아이들이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길러진 건지, 타고난 성향이 자립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엄마가 죄책감 없이 워킹맘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늘 자신 있게 말해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날, 내가 일하기 싫어진 날, 퇴사할 거라고.
워킹맘 10년 차가 돼서야 주변이 보인다.
지금 내 삶은 친정엄마, 회사, 아이들이 함께 만들어 준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새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