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 되지 말아라

by 미선씨

"아이고 착하지, 예쁘네~"

여자들의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가장 큰 문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고, 선생님의 하란대로 공부를 했고, 부모가 지시하는 대로 예쁜 말을 쓰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렇게 내 욕구를 억누르고 상대방의 요구에 나를 맞췄다.


결국 '착하다'는 것은 주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내 의견은 말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내가 희생하더라도) 것을 의미한다. 착하게 굴기를 훈련받으며 자란 어른 여자인 나는, 누군가와 충돌이 생기는 상황에서 큰 소리를 내고 싸우기보다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내 의견을 굽히고, 내가 좀 더 손해보고 마는 것을 택하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여자들이 '착함'을 요구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남자들이 '멋있고 씩씩함'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내 감정보다 상대방의 기대에 맞추는 것을 우선하는 우리 시대 대부분의 '착한 여자'들은, 사회가 엄마에게, 며느리에게, 워킹맘에게, 딸에게 요구하는 것들에서 자유롭지 못해 힘들어한다. 예를 들어 요즘 회자되는 '며느라기'라는 말은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기보다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가 사람들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표현했고, 슈퍼우먼 콤플렉스는 회사원/엄마/주부 1인 3역을 수행하는 워킹맘들이 요구받는 다양한 역할을 욕먹지 않게 다 잘 수행하려 애쓰는 모습을 표현한 게 아닐까. 그 밖에도 맏딸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 등 '착해야 하는' 여자들을 나타내는 말은 많다.


며느라기

사춘기,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겪게 되는 시기. 시댁 식구한테 예쁨 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그런 시기. 보통 1,2년이면 끝나는데 사람에 따라 10년 넘게 걸리기도, 안 끝나기도 한다고.


맏딸 콤플렉스

맏이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장남과는 기대치가 달라 지원은 적으면서 가족을 위한 희생을 알게 모르게 강요당해 복합적인 심리를 지니게 되며, 자아실현이나 자기성취에 한계를 느껴 부모나 동생들에게 맏자식으로서, 누나로서, 언니로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의무감에 사로잡히는 것


슈퍼우먼 콤플렉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관계없이 직장인, 주부, 어머니, 아내, 며느리라는 서로 상충되는 여러 역할을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으로, 일을 핑계로 가정 일을 소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가정을 핑계로 직장 일에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24시간 내내 종종걸음을 침


착한 여자 콤플렉스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 이면에는 희생, 순종, 수동성, 인내로 남성에게 온전히 주기만을 바라는 남성주도의 일방적인 뜻이 숨겨져 있는데, 이런 사회적 통념에 갇혀 무의식 중에 사회가 바라는 여자다운 여자,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나는 맏딸로, 며느리로, 워킹맘으로, 위 콤플렉스들을 어느 정도 다 겪었다. 머릿속으로는 굳이 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가에 가서 부엌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회사 가느라 아이 학교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집안 살림이 엉망인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찔린다. 집안일과 육아가 벅차도 남편을 설득하고 싸워가며 바꾸기보단 그냥 내가 더 하고 말지 하며 혼자 끙끙 앓았고, 명절 때마다 부당함을 느끼지만 분란을 일으키느니 나 혼자 감당하고 만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어릴 때부터 보아온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에서, TV 속 모습과 주변인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배워온 '여자'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미투 운동이나 데이트 폭력 등 주로 여자에게 가해지는 각종 폭력이 이슈가 되고 있다. 내 딸들에게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 '명확히 거절하기'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 중에 '착해야 한다'라고 생각해서 슬금슬금 접근하는 것을 잘라내지 못한다던가, 이건 아니다 싶은데 분위기 깨질까 봐 바로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이다. 착하게 굴려고 본인을 억누르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의 감정을 우선해서 표현하도록 하려 한다. (기본적으론 범죄를 저지르는 상대방이 나쁜 거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조차 너무 수동적인 거라 속상하다.)


더불어 아이들에게 '착하다'는 칭찬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색칠을 꼼꼼하게 했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숙제를 스스로 했네~ 이런 식으로 행동을 칭찬하는 중이다. 그리고 아이가 내 지시에 반문하거나 대들 때도, 윽박지르지 않고 아이의 의견을 듣고, 내가 잘못한 경우에는 엄마가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권위 있는 어른이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며, 어른들 말을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다. 나는 이미 늦은것 같지만 적어도 내 딸들은 '여자니까, 착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가 소중한 걸 알고, 본인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고,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내 딸들은, 착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내 딸들아, 멋있고 씩씩한 사람이 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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