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해야 할 한 마디

by 미선씨

인생에서 '순삭'된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아이 낳고 키운 최근 10년이라고 대답했다. 치열하게 하루하루 산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누군가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힘들다고 토로하면 그제야 '아... 나도 그때 그랬었던 것 같은데' 정도 생각할 뿐이다. 가능한 글로나마 남겨보려 브런치에 글도 써보지만, 예전 글을 다시 읽으면 '아 내가 이랬었나?' 싶어 새삼스러울 때가 많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나는 육아와 살림과 회사일 모두를 관장하는 사람이 되었다. 신랑도 나름의 몫을 했지만, 그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회사일에 한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일은 다 내가 담당했던 것 같다. 신랑은 아주 약간 보조하는 정도의 느낌이었고, 작게는 애 밥을 해서 먹이는 것부터, 집안 쓰레기를 치우는 것, 크게는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견적 뽑고 준비하는 것, 아이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바꾸고 적응시키는 것까지 아무튼 다양한 일들을 해오느라 시간이 삭제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한동안은 왜 내가 이 모든 일들을 쥐고 다 해야 하나 싶어 억울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한테 당당하게 분담을 요구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체념하게 됐고, 그렇게 그저 내가 다 감당하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며 적응해갔던 것 같다. 체념하고 적응했다 뿐이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게 쉬운 것은 아니라서, 한동안은 우울해하며 정신을 놓기도 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집안일에 대해서는 있는 듯 없는 듯했던 남편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주중에야 집에 있는 절대 시간 자체가 별로 없으니 논외로 치고) 주말에는 삼시 세 끼를 남편이 다 차리기도 하고, 아이들 데리고 놀러 가는 등의 여러 가지 활동도 스스로 알아봐서 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와이프 혼자 시간 보내고 오라고 영화표를 끊어주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는 약간 얼떨떨해했고, 남편이 집안일을 할 때 왠지 내가 할 몫을 못해서 그런가 싶어 미안해하기도 했다가, 요즘은 고마운 마음으로 편하게 누리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는데, '수고했어''고생했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점이다. 사실 남편은, 내가 퇴근해서 아이들 챙기고 재울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오는데, 그때는 이미 해야 할 일이 거의 끝났을 때라 남편이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근데 언젠가부터, 남편은 녹초가 되어 뚱해 있는 와이프에게 '오늘도 고생 많았어'라고 한마디 해주곤 한다. 이 한 마디가 뭐 별거라고, 한 마디 듣고 나면 기분이 스멀스멀 좋아진다. (가끔은, 내가 쉬운 여자인가라는 생각도 좀 든다. 겨우 이런 말 한마디에 마음이 녹는 걸 보면) 아무튼 작은 말 한마디로나마 내 수고로움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힘들게 보낸 하루를 위로해 준다.


그리고 그가 먼저 건넨 한 마디는 지쳐있던 내 입에서도 부드러운 한마디가 나오게 한다.

'신랑도 고생했어~' 우리는 그렇게 서로 도닥이는 부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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