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버킷리스트를 지우다

스쿠버다이빙

by 미선씨

15년 전쯤, 동생과 떠났던 태국 여행 중 만난 여행자의 말을 듣고선

우리 둘은 홀린 듯이 다이버 샵 주소 하나 얻어들고 밤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푸껫으로 향했다.

그리고 배낭여행자에겐 꽤나 큰돈인 20만 원 여를 지불하고 스쿠버다이빙 과정에 등록했다.

일주일간 샵 옆 기숙사에서 머물면서, 이론 수업도 듣고, 필기시험도 보고,

물속에서 30분간 맨몸으로 떠있기 같은 실기시험도 보고,

실제 배 타고 나가서 스쿠버 다이빙을 두어 번 하는 과정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서 어느 포인트에 배를 대고, 장비를 갖추고, 물에 뛰어든다.

배에서 바다로 한 발 내밀 때의 두려움, 코 호흡을 중지하고 입으로 호흡하며 물속으로 들어갈 때의 두려움,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고 나면, 물속에서 편안해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너바나의 음반 표지였던가. 아이가 물속에서 유영하는 사진을 떠올렸다.

물 속은 엄마 태중처럼 포근하다. 물이 몸에 착착 감겨오는 느낌이 따습다.

중력을 잊고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바다 아래로 아래로 들어가다 보면, 형형색색 물고기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신기하게도 물고기들은 이방인 다이버들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세계에서 온 친구를 보듯, 무심히 옆을 지나칠 뿐이다. 나도 바닷속 세계의 식구가 된 기분이 든다.

오래전 일인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생생하다.

우린 푸껫 바다에서 운 좋으면 볼 수 있다는 만타(가오리)를 보길 기원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 문득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커다란 만타의 그림자가 보이는 장면을 참 많이도 상상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박혀있다.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현실에서는, 그 이후 만타는커녕 스쿠버 다이빙도 다시 해보질 못했다.

결혼 후 수영을 못하는 남편과 할 수 있는 건 스노클링 정도였고, 임신 후 아이가 생기니 더더욱 스쿠버다이빙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스쿠버 다이빙해서 만타 보기'는 늘 마음속 버킷리스트 1순위였다.

돌아보니 이 버킷은 나에게 자유로움과 같은 의미였다.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간적 자유,
제법 비싼 스쿠버다이빙을 할 수 있는 재정적 자유,
육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일상에서 벗어날 자유,
물속으로 뛰어들 때의 두려움을 넘고 편안해질 자유,
중력에서 벗어나 양껏 유영할 수 있는 자유.





발단은 신랑의 말 한마디였다.


긴 추석 연휴, 부부끼리만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겠다며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나에게 툭 던진 말,

" 여행은 그냥 어디 다녀오는 것밖에 안될 것 같은데. 스쿠버다이빙 같은 젊은 날에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하는 게 어때?"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늘 내가 하고 싶었던 거니까.

종종 스쿠버다이빙을 다녀오는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 음... 누나는 오랜만에 하는 거니까 교육을 다시 받긴 해야겠다. 교육 샵은 어디 어디가 좋을 것 같고..평소에 가기 힘든 곳을 갔으면 하는 거지? 다이빙은 시즌이 중요한데.. 10월이면.. 홍해나 몰디브나 이런 데를 추천해. "

장시간의 조언을 마구 받아 적는다. 용어도 못 알아듣겠지만 일단 마구 적어본다.

좀 알아보니 스쿠버다이빙을 제대로하려면

적어도, 어드밴스 이상의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제일 초급인 오픈워터로, 하도 오래전에 딴 거라 다시 리뷰한 후, 어드밴스 자격증을 따야 한다.

자격증을 따려면, 다이빙을 네다섯 번씩은 해야 하고, 물속에 다녀오면 비행기를 바로 탈 수 없기 때문에,

3박 4일 정도 일정은 잡아야 자격증 하나를 딸 수 있다. 나도 나지만, 신랑이 10월까지 어드밴스를 딸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신랑과 상의한다. 축농증이 있어 물 하고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웬일로 해보겠다고 한다. 단, 본인 휴가를 쓰지는 않는 선에서.

경조휴가를 쓸 수 있는 2월에 한번 다녀오고, 8월 여름휴가 때 한번 더 다녀오고, 10월에 가면 좋겠는데...

교육일정을 줄이려면, 이론을 먼저 공부하고 제주도에 가서 다이빙만 하고 오는 식의 방법을 써야 하는데,

1,2월의 제주도 바다는 연중 가장 추울 때라서, 극기 훈련하다가 돌아올 것 같았다.


다시 동생에게 묻고, 여기저기 검색하고, 물망에 오른 교육 샵에 여기저기 문의하고, 신랑과 일정을 조율한 끝에,

2월 3주, 3박 5일 일정으로 세부의 교육 샵에 가기로 했다.

숙소를 제공하고 삼시 세 끼 밥을 다 주면서 교육만 받으면 되는데, 비용적으로도 괜찮고, 바다도 한국보다는 낫다.

당장 비행기표를 끊는다. 뒤늦게 알아본 탓에 그렇게 프로모션이 많다는 세부를 제 값 주고 가지만,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격증 알아보고 비행기 예매할 때까지 엄청나게 흥분되더니, 예매가 끝나고 나니 이상하게도 한결 차분해진다.

이제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싶어서 그런 건지.

떠나는 날, 큰애들 단속하고 말도 잘 못 알아듣는 막내에게 엄마 네 밤 자고 올 거니까 잘 지내라고 인사하는데, 눈물이 울컥한다.

잘 지낼 수 있지? 엄마 아빠 다녀올게.
울음을 삼키고 집을 나온다.


공항버스 타고, 공항 오는 과정이 너무 낯설다. 대단한 일을 벌였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너무 참 쉽기만 하다.

준비물도 하루 전날 옷가지만 겨우 챙겼는데, 그래서 둘이서 캐리어 달랑 하나 들고 가는데, 너무 간단하고 쉬운 게 이상스럽기만 하다.


애들 없이 부부끼리, 어른끼리의 10년 만의 여행이라서 그런가. 다 수월하다.

라운지 들어가서 편하게 놀기도 하고. 느긋하게 구경도 해보고.

저가항공사 비행기에 오른다. 좁아터진 자리에 앉으니 여행 간다는 실감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륙 후 불 꺼진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무수히 반짝이는 별빛과, 발아래에 깔린 구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찍히지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 사진에 담을 수 없는 모양이다. 내 눈과 마음에 담아둘밖에.

비행기 안에서조차 생경하도록 느긋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세부에 도착했다.


늘 그렇지만 여행의 시작은 공항에서 맡는 공기에서 실감한다. 축축하고 덥고 향신료 섞인 냄새.. 진짜 왔다.

나는 여기서, 14년간 못했던 스쿠버다이빙을 재개한다.

우리가 묵는 숙소는 다이버 샵에서 교육기간 동안 무료로 제공하는 곳으로, 기본적인 숙박만 가능항 정도의 컨디션이다.

14년 전, 동생과 갔던 다이버 숙소도 꼭 이랬는데, 그때 같이 동행했던 (우리 기준으론) 돈 많아 보이던 아저씨는

이런 숙소에서 못 지낸다며 돈 더내고 다른 숙소로 옮겼더랬다.

나도 좀 더 나이가 들면, 숙소 컨디션 가려가면서 차라리 돈을 쓰겠다고 하려나? 궁금해진다.

새벽 서너 시가 돼서야 잠든 것 같은데, 귀를 때리는 꼬꼬닭 소리에 일어나 보니 7시다.

조식 전, 근처를 둘러본다. 나 외엔 모두 현지 주민들이고, 염소와 개가 느긋이 돌아다니고, 눈을 마주치면 수줍게 하이~ 인사하고,

기저귀를 가는 꼬마 엉덩이가 보이는, 소박한 필리핀 시골 마을이다. 참 예쁘다.


9시, 수업 시작이다. 오랜만에 하는 스쿠버다이빙이기 때문에, 리뷰 과정 후에 어드밴스를 듣기로 했는데,

강사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1,2년 만에 다시 하는 사람은 봤어도 14년 만에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놀란다.

그리고 엄청나게 당황스러워한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무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고민되나 보다.

용어고 뭐고 하나도 모르는데, 나는 리뷰가 이론부터 수영장, 바다 나가는 것까지 압축해서 가르쳐주는 건 줄 알았는데,

리뷰는 바로 배 타고 나가서 다이빙을 하는 거란다!!

헉! 다급하게 강사가 나를 붙잡고 속사포처럼 이것저것 쏟아낸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강사를 믿고 강사 말을 빠르게 흡수하는 것밖에 없다.

말 한마디 한마디 몰입해서 듣고 계속해서 복기한다. 그 한 시간여, 내 머릿속 CPU를 최대치로 돌린 느낌이다.


어느새 다이빙 포인트에 도착. 이제 바다로 들어갈 시간이다.

정신없이 장비를 착용하고, 바닷속으로 크게 한 발 내딛는다. 짠물이 감겨온다.

입으로 호흡을 해야 하는데, 낯선 호흡법이다 보니 긴장되고, 잘 안되고, 자꾸 숨이 멈춘다.

그 와중에 중성부력이니, 이퀼라이징이니, 마스크 물 빼기 등의 교육과정도 소화해야 한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시간은 지났고 배 위로 올라오니, 힘들어서 허기지고 서있지도 못하겠고 속이 미슥댄다.

정신없는 내 귀에 먼저 올라온 이들의 환영인사가 들려온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나 정말 수고했다. 평소엔 습관처럼 쓰는 말이지만, 그 뻔한 한 마디가 마음에 푹 들어온다.

손하나 까딱하기 힘들고 말할 기운도 없었지만, 나도 내 다음으로 올라오신 분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누군가 나한테 먹으라며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준다. 그것도 어찌나 감사한지.

초콜릿, 물을 억지로 욱여넣으며 체력을 보충한다.


하. 돌아보니 물속에서 물고기가 좀 보인 것 같긴 한데 본 것 같진 않다. 하하

역시 만타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두 번째 다이빙. 처음보단 조금 더 수월하다.

들어가자마자 정어리떼가 반짝거리며 내 앞에서 쇼하듯 다양한 모양으로 헤엄친다.

내 마음대로, 나를 환영하는 인사라고 생각하며 잠시 넋을 놓고 본다.

강사가 오늘 아주 잘했다 칭찬해준다. 그냥 하는 소리래도, 좋다.


다음날 아침, 그제야 온몸이 쑤신다. 어제 피곤하다며 마사지 건너뛰었는데, 했어야 했나 싶다.

오늘은 본격 어드밴스 과정 들어가는 날. 과정을 브리핑하며 강사가 말한다.

' 어드밴스는 이미 다이버인 사람들이 보다 많은 어드벤처를 즐기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미 다이버'라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어제처럼 하나하나 기초부터 물어보는 과정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새삼 긴장된다.

오늘부터 합류한 어드밴스 수강생 동기와, 새롭게 만난 샘. 오늘은 이 둘을 믿고 가는 거다.


첫 다이빙, 입수하자마자 핀(오리발)이 바다에 빠져버렸다.

그전에 그렇게 준비하고 복기했다고는 하지만, 돌발상황이 터져버리니 긴장해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된다.

어떻게 잠수했는지 모르게 들어가서 다시 한번 중성부력에 대해 연습한다. 좀 헤맸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낫다.

다이빙이 조금씩 편해진다. 그다음, 그다음 다이빙에서는 물속에서 보다 자유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조금씩 바닷속에 눈을 돌린다. 가만히 보면 산호 틈틈이 작은 생명체가 다양하게 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더 보이는 게, 꼭 밤하늘의 별 같다.

이제야 같이하는 다이버들도 보이기 시작했는데, 내 옆에 있던 분은 아주 작은 생명체들을 접사로 촬영해서 보여주셨다.

나 같은 초보들은 있는 줄도 몰랐던 생명체가 사진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보다 한결 여유로운 오늘이다. 저녁엔 마사지도 받고, 다이버들이랑 맥주도 한잔 하고.

돌아갈 일정이 점점 가깝게, 그리고 아쉽게 느껴진다.


다음날은 신랑과 나의 마지막 수업일이었다.

신랑은 축농증으로 많이 고생을 했다. 신랑과 같이 수업한 동기들도 덩달아 고생한 모양이다.

내용을 들어보니, 물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귀의 압력을 맞추지 못해서, 5M까지밖에 내려가지 못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내려가서는 수중 항법, 중성부력, 마스크 벗고 쓰기, 이런 수업만 받았다고 한다.

신랑이 스쿠버 다이빙을 즐겼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끝내고 돌아가면 신랑에게는 힘든 기억만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후에 펀 다이빙 일정을 추가했다.

신랑과 둘이서, 교육은 잊고, 그저 물속을 유영했다.

신랑도 찍어주고, 물고기도 찍어보고, 구경도 하고.

세부 바다 자체가 썩 예쁘지는 않은 곳인 데다 그날 시야가 좋지 않아서, 볼 게 많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즐기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교육을 마무리했다. 이제 나는 만타를 보러 갈 준비가 된 거다.

꼭 만타가 아니더라도, 반기에 한 번씩은,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함께할 수 있는 버디도 생겼으니(내가 리드해야 될 것 같긴 하지만), 든든하다.


PS. 힘든 교육 함께해준 신랑에게 애정을 담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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