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쯤, 친구의 자취방에서 CD로 잠깐 본 헤드윅
파격적인 이야기와 오래도록 귓가에 남는 음악 때문에 언젠간 꼭 봐야지 싶었다.
그저 CD하나 사서 보면 될 것인데 그게 또 의외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 그간 보질 못했다.
그 이후 헤드윅 뮤지컬이 히트치면서 당시 남자친구를 데리고 보러 갔다.
현재의 신랑인 그는... 락앤롤이 꽝꽝 울려퍼지는 그 공연장에서 코를 골며 잤다.
나라도 열심히 즐기려고는 했지만, 주무시는 신랑 옆에서 온전히 즐기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얼마전, 헤드윅이 재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 이번이야말로 영화를 제대로 볼 기회다 싶어 상영관을 찾아보니,
일단 상영관이 많지도 않은데다
주말에는 상영을 하지도 않고, 주중에도 조조 아니면 심야에만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별 수 있나. 아쉬운 사람이 맞춰야지
그래서 나는 오늘 휴가를 냈다. 제일 큰 목적은 헤드윅을 보는 것.
문제는 집근처 헤드윅 상영시간이 한참 아침밥 먹이고 아이들 챙길 시간인,
아침 8시 10분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보려면 친정엄마한테 부탁을 하거나(엄마가 몸이 안좋으시니 패스)
기적적으로 부지런을 떨어서 아이들을 일찍 깨워서 가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아침 시간은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마음의 준비만 잔뜩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5시다. 이런. 하하.
다른 준비를 해놓고 7시에 아이들을 슬금슬금 깨워본다.
큰애, 둘째가 일어났다. 툭하면 울어대는 막내가 문제인데... 일단 두고 나갈 준비를 마친다.
막내는 갓 일어나 정신없는 틈에 유모차에 실어서 데리고 나가기로 한다.
" 얘들아 오늘은 좀 많이 일찍 나가야해~ 어서 준비하자"
" 음.... 왜? 이유 알려주면 준비할게 "
" 엄마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일찍 가야 볼 수 있거든."
그 이후로 아이들은 등원길에 만나는 동네 엄마, 친구, 선생님이
" 어머 오늘 일찍왔네~" 라고 인사할 때마다
" 아~ 우리 엄마가 조조영화 보러 가야 되서요~" 를 외쳐댔다. 하하.
서둘러 등원을 시키고 나니 8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땀이 꼰꼰하게 배도록 달린다. 조조라 6천원밖에 안한다. 이와중에 그건 또 왠지 뿌듯하다.
영화관에 들어가니, 한줄에 한 명이나 있을까. 총 6명이다.
의외로 할머니뻘 되시는 연세 지긋한 분도 계셨고, 남자도 있다.
이 아침에, 헤드윅을 보러 나온 동지들이 있구나.
왠지 모르게 반가워서 오지랖 부려서 정모라도 하고싶을 지경이다.
영화는, 기괴하고 불편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고독함,
배신으로 상처받아 생긴 깊은 슬픔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헤드윅.
그조차도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는 어렵기만 하다.
참으로 외롭겠다.
어쩜 저런 가사를 생각하지. 어쩜 저렇게 표현하지.
어쩜 저렇게 연기를 약빨은 것처럼 잘하지.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헤드윅 음악 CD를 사야겠다.
이렇게 해묵은 숙제같던 버킷리스트를 하나 지운다.
별 거 아니지만, 이런 걸 해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오늘 영화를 보기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부지런떨며 실행한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덕분에 기분이 많이 좋아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