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절벽 파트 2

이혼은 해답이 아니다.

by 노군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걸 본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꽤 늦은 밤 시간이었고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내 전화를 받은 어머니께서는 한달음에 우리 집 앞으로 달려오셔서 같이 우리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앞뒤 상황을 따져보니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새로운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주고 들어와 살도 있던 거였고 우리 집은 진작에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간 뒤였다.


정말이지 앞이 캄캄해지는 밤이었다. 어머니께 집이 넘어가는 걸 몰랐었냐고 여쭤보자 으레 모르고 계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군 입대 전까지의 나의 모든 물건들이나 사진, 옷, 추억들은 모두 어딘가로 넘어간 상태였다. 어머니께서 내가 제대하기 전에 아저씨 댁으로 옮겨놓은 내 물건들은 컴퓨터 한 대, 옷 몇 벌,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군에 입대하자마자 집에 혼자 있기 뭐 하셔서, 아저씨 댁으로 들어가 살고 계셨고 그동안 집이 어떻게 처분되는지도 모르셨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2년 동안 집이 넘어가는 걸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어쨌든 다음 날 인터넷에 접속해 경매 처리되는 집들의 가재도구들이 어떻게 처분되는지 검색해 보았고 어머니와 아저씨께 내 추억들이니 되찾아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분께선 울며불며 말하는 나를 보고 그나마 '하는 시늉'이라도 하셨다. 어딘가 다녀오시는 척을 하시더니 이삿짐센터 같은 데서 짐을 보관하고 있는데 찾으려면 5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그 정도 큰돈은 없으니 그냥 포기하자고 나를 달래셨다. 세월이 지나 그때 정말 어딘가 다녀오신 게 맞냐고 여쭤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에 있던 모든 물건들은 온데간데없이,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마치 지금까지 쌓아온 나의 모든 기억들과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부모님과 찍은 세 가족의 사진뿐 아니라 나의 어린 시절 사진도 없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주변 친척분들 집에 가서 어머니께서 찾아오신 나와 친척 분들의 여러 사진들이 무슨 가보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은 나의 아이덴티티, 뿌리들을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하며 며칠 밤을 지새웠다. 지금도 여전히 습관처럼 수집하고 있던 레어 한 음반들, 만화책들, 조그마한 피겨, 몇 권 안되던 책들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어딘가로 팔려가고 처분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한켠이 찡-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뒤로 아저씨 댁에 얹혀살면서 대충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벌이를 했다. 레코드점, 술집 주방 등 별다른 능력치를 필요치 않는 일들을 전전했었는데 어느 날 아저씨께서 이제 그만 아저씨 댁에서 나가 달라는 통보를 하셨다. 땡전 한 푼 없는 스무 살 중반의 갓 제대한 녀석에게 이건 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저씨 댁 아들도 그런 식으로 독립을 시켰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옆에서 울고 계셨고 내 앞에 있는 저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였다면 과연 집을 나가라고 했을까라는 생각조차 들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정말 더럽고 치사한 느낌이 들어서 결국 혼자 나가 살 궁리를 했다. 하지만 보증금 100만 원도 없던 시절이라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전무했다. 한 번은 아저씨가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김포 인근에 있는 주유소에 데려가, 거기서 먹고 자면서 생활하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실제로 차를 타고 주유소에 가서 면접까지 보고 왔다. 내 동의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일처리를 한 아저씨의 본심을 알고 면접을 보다 말고 뛰쳐나왔지만). 결국 외할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어머니께서 외삼촌께 사정을 하여 들어가서 살게 되었지만 그조차도 '외할머니께 집을 얻어 드린 외삼촌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조카 새끼를 살게 했다'라며 외삼촌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외삼촌께 말씀드린 게 없냐고 외삼촌께 여쭤보니 그런 말 한 적이 없더란다. 옆에서는 외할머니가 속상해하고 계시고 결국 나는 '네가 외할머니 댁에 있으려면 월세 낸다고 생각하고 매 달 30만 원 정도를 외할머니께 드려라'라는 외삼촌의 말에 없는 돈을 긁어모아 인천 연수동에 있는 반지하 무보증 원룸을 구해 독립 같지 않은, 반강제적인 독립을 시작했다.


짐은 거의 없었다. 커피포트 하나, 밥솥 하나, 그리고 이불과 베개, 마지막으로 예전부터 쓰던 컴퓨터 한 대와 작은 밥상 하나가 전부였다.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던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그냥 따스하게 한 번 안아주고 싶다. 그 반지하에 살면서 진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했던 기억이다. 신문 배달, 우유 배달, 막일 용역, PC방 알바, 보안요원 알바, 전단지 아르바이트...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일이 없거나 쉬게 되는 날도 많아서 그야말로 친구가 보내준 빵과 사과 하나로 일주일을 버티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절벽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내 삶만 힘든지'라는 생각은 진작에 버렸다. 아마 우리 집이 사라진 그다음 날 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뭐든 손에 넣은 물건이면 잘 버리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 나중에 안 쓰게 되는 물건들이라도 가지고만 있으면 언제고 쓸 날이 오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예전에 우리 집이 사라져 버린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행히 무보증 반지하에 살았던 시절에는 친구들과의 사이는 더 좋아졌던 느낌이라 나름 집들이도 하고 친구 몇 명은 툭하면 우리 집에서 며칠이고 자고 가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빈곤하던 시절이었는데 친구들로 포만감을 채웠던 느낌이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가끔 말씀을 하신다. 어렸을 때 나를 악착같이 키우질 못했다고. 아니 여기서 더 어떻게 악착같아져야 만족을 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지금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저씨와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가족은 죽었다 깨도 가족이라고, 친구들은 그런 부모님들 뭐가 아쉬워서 아직도 연락을 지내냐고들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스무 살 무렵에 아버지는 나를 한 번 버렸고 제대를 했던 이십 대 중반에 어머니도 나를 한 번 버렸다. 그래도 가끔 만나서 맛있는 걸 먹거나 용돈을 드리거나 하면 좋아하시는 부모님 얼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가 스무 살에 이혼을 하시고 집을 나가셨던 아버지는 친할머니의 부고 덕분에 연락이 다시 됐다. 아직 노 씨 집안의 2세 형제자매분들과는 연락을 하거나 가끔 만나곤 하는데 유난히 나를 귀여워해 주던 네 살 차이의 친척 누나가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해줬고 그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거의 7~8년 만에 다시 만났다. 알고 보니 인천을 벗어난 적은 없으셨고 여전히 약주를 좋아하시고 용역 일로 하루하루 벌어 드시고 사신다는 말에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니까 현재까지도 연락은 가끔 하고 산다. 여전히 술은 좋아하시고.


그래서 만약 우리 부모님들께서 그때 이혼을 하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한다. 여전히 지지고 볶으며 세 식구가 살고 있겠지만 그때의 그 선택 덕분에 외가 쪽이나 친가 쪽에서 우리 집은 유독 튀는 가정이 되었고 여전히 나는 혼자 살고 있다. 당연하게도 주변의 이혼을 생각하는 동기들이나 동생, 형들을 보면 제발 절대 이혼만은 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자녀가 없는 집이라면 뭐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아이가 성인이 됐든 되지 않았든 부모의 이혼은 자녀의 앞길에 압정을 뿌려놓는 것과 같다고 말해준다. 그래도 다들 성인이고 본인 인생이니까 내가 더 깊게 관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양친 모두 사이좋게 사는 게 제일이다. 사람은 고쳐서 쓸 수 없다는 걸 우리 아버지를 보며 깨달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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