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외할머니는 손주들 중에 유난히 나와 밀접한 관계에 계셨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거의 사시다시피 하시던 외할머니라서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도 내가 외가 쪽 손주들 중에 월등히 많은 편이다. 인천 계산동 인근의 청천동에 살던 무렵엔 우리 집이 없어, 반지하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 댁과 함께 살았다. 거의 외가 쪽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 살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마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한참 전이었는데 늘 집 뒷산에 올라가, 외할아버지께서 잡아주시는 잠자리 꼬리에 실을 묶어,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곤충을 잡으러 다니셨던 이유는 그 당시 외할머니 댁에서 키우던 부엉이 때문이었다. 사마귀든 메뚜기든 잠자리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던 그 부엉이를 위해 거의 매일 외할아버지와 나는 뒷산에 올라가 함께 곤충을 잡곤 했는데 하루는 외할아버지께서 실로 묶어주신 잠자리가 내 귓가에 내려와 파닥거리는 바람에 그 뒤로 지금까지 곤충을 제일 싫어하는 생물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냥 생긴 것부터 외계에 사는 녀석들처럼 생겼고 어린 시절의 그 트라우마가 평생 가더라. 곤충은 정말 징그럽고 싫고 무섭다.
그 뒤로 어쩐 일인지 우리 가족은 보일러 대신 연탄불을 때는 5층짜리 정광아파트에 살게 되었고 어머니께서 매너티의 식당에서 일을 하셨던 때라, 자연스레 외할머니의 우리 집 방문도 잦게 되셨다. 내가 미술 학원이나 선교원을 다니던 시기여서 어머니의 퇴근 시간과 나의 하교 시간 사이의 붕 뜨는 몇 시간을 위해 할머니께서는 거의 매일 청천동에서 우리 집까지 걸어오셨다. 할머니께서 많이 정정하실 때셔서 조금만 잘못을 하면 외할머니께 장난감 칼로 회초리를 맞곤 했다. 한 번은 같은 아파트의 친구들끼리 놀던 와중에 한 녀석이 앉아서 핸들을 왼쪽 오른쪽으로 돌리면 앞으로 나아가는 탈 것(이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타고 자랑을 하길래 한 번만 태워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 빼고 다른 친구들 모두를 한 번씩 타게 한 뒤 얌체처럼 나는 안 태워주고 다시 자기가 타길래 그 탈것을 집어 들고 그 친구 머리를 가격했다가 머리에서 피가 철철 쏟아져서 집으로 줄행랑을 친 적이 있었다. 5층이나 되는 아파트 꼭대기에 살았었지만 나에게 맞은 친구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밑에서 아우성을 쳤고 집에 나와 단둘뿐이던 외할머니께서 자초지종을 물으시더니 나를 쥐 잡듯이 패시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다며 정말 종아리가 부르트도록 맞았었다.
그렇게 외할머니와 장시간 함께 지내며 시계를 보는 법도 배우고 색종이로 개구리를 접는 방법, 동서남북을 접는 방법 등을 익혔다. 그 무렵엔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느껴지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우리 집이 슈퍼마켓을 접은 다음엔 어쩐 일인지 외할머니는 외삼촌과 함께 몇 년을 생활하시다 결국 외삼촌이 얻어주신 전셋집에 혼자 살게 되셨다. 그래서 뭔가 안쓰러운 마음에 더 찾아뵙곤 했다.
어느 날은 우리 어머니께서 외할머니께 사다 주신 59 쌀피자가 맛있다고 그렇게 칭찬을 하시길래 당시엔 나도 제대하고 일을 하던 때여서 외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도미노 피자에 들러 가장 비싼 피자를 포장 주문하여 외할머니 댁에 가서 함께 먹은 적이 있었는데 '너희 엄마가 사다 준 건 피자도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무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래서 그 뒤로 정말 시간이 날 때마다 외할머니 댁에 가서 도미노 피자를 둘이서 나눠먹곤 했다. 왠지 모르게 그때 느꼈다. '어른들이 맛있는 게 싫어서 안 먹던 게 아니구나'라고. 사람 입맛은 다 비슷하기에 내 입에 맛있으면 어머니의 입에도, 외할머니의 입에도 맛있던 거였다.
교회를 가시려고 외할머니 혼자 새벽에 눈길을 걸으시다 미끄러지셔서 허리 쪽 뼈를 다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의사가 했던 '골다공증이 심각하신 수준'이라는 말에 바로 어머니와 아저씨는 당신네 집에 외할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딘가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뼈가 다 으스러질 수 있다고 하셔서 어머니와 아저씨는 지극정성으로 외할머니를 모셨다. 외할머니의 삼시 세끼를 항상 다 차려드리고 행여 어머니나 아저씨가 부재 중일 땐 내가 가서 외할머니의 식사를 챙겨드린 적도 많았다.
그렇게 한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휠체어 없이는 더 이상 외출도 불가능하신 외할머니는 많이 쇠약해지셨지만 매년 내 생일 때만 되면 꼭 챙겨주시던 만 원을 그 당시에도 챙겨주셨다. 국민학교 때 외할머니께 듣던,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거야'라는 말을 서른이 넘어서까지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어차피 다 어머니나 아저씨 돈이고 외삼촌이 드린 돈일 텐데 꼬깃꼬깃 접어 지퍼가 달린 작은 지갑에서 내어주시던 내 생일날의 그 만 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건 3년 전 여름이었다. 처음 새벽에 미끄러지셨을 때는 그래도 괜찮으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치매도 조금 오시고 결정적으로 어머니와 아저씨께서 장기간 여행을 가셨던 때에 큰 삼촌댁에 외할머니를 잠시 모셔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께서 응급실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간호사와 의사 모두 외할머니께서 영양실조가 심하시고 등 쪽에 누군가에게 맞은 멍이 많이 보이셨다고 한다. 그 일주일이 조금 넘는 사이에 외할머니께서는 극심한 영양실조와 구타 때문에 결국 뇌사 수준까지 오게 되셔서 요양 보호소에서 며칠 계시다 소천하셨다. 어차피 실제로 구타나 영양실조를 시인하는 사람도 없고 외할머니조차 의식도 없던 일이라서 우리 어머니만 큰 외숙모와 큰 외삼촌께 난리를 치셨고 나머지 외가 쪽 친척들은 유야무야 그렇게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게 됐다.
아직도 여름만 되면 말씀도 제대로 못 하시던, 눈에 초점도 별로 없으시던 외할머니의 그 얼굴이 기억이 난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제발 좀 다시 일어나시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었다. 멍- 한 외할머니가 내 얼굴을 보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너무 가슴이 아팠다. 예전에 내가 외할머니 댁에 가면 꼭 해주시던 밥이 있었는데 바로 계란 프라이 두 개와 흰쌀밥을 식용유에 볶은밥이다. 간도 잘 안 하시고 대충 볶아서 해주셨던 그 계란 프라이 볶음밥이 너무 고소하고 너무 맛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딱히 내줄만한 반찬이 없어서 그 볶음밥을 해주신 것 같다. 우리 어머니의 손맛은 다 외할머니께 전수받은 거라고 하셔서 어머니께도 몇 번 계란 볶음밥을 부탁해 봤지만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 시절에도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외할머니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좀 더 많이 찍어둘 수 있었을 텐데... 남은 거라곤 사진 몇 장들과 마지막 응급실에 가시고 의식이 돌아오셨던 영상 하나뿐이다.
3년 전 한 여름에 외할머니의 장사를 지낼 때, 친척들이 입을 모아 '우리가 생전에 어머니께 못해서, 꼭 화 내시는 것 같다'라고 한 적이 있다. 땡볕 아래에서 일가친척이 땀을 줄줄 흘려가며 할머니를 선산에 모시고 왔었는데 덕분에 지금도 봄이 지나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무렵엔 우리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이 없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생전에 반드시 손자며느리는 보고 가시겠다며 외할머니를 뵐 때마다 색시 언제 데려올 거냐고 나에게 물으셨었는데, 결혼할 상대는커녕 여자 친구 같은 것도 결국 한 번도 보여드린 적이 없어서 그게 한처럼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