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의 정수를 만난다!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수호자
두 번째 변종
콜로니
페이첵
변수 인간
통근자
요정의 왕
단기 체류자의 행성
자가 광고
황금 사나이
제임스 P. 크로우
사칭자
음울한 대지에 고하노니
조정 팀
아버지 괴물
포스터, 넌 죽었어!
독점 시장
얀시의 허울
마이너리티 리포트
작가 노트
옮긴이의 말
SF소설의 정수를 만난다! 필립 K. 딕을 필립 K. 딕 스럽게 만드는 단편소설들을 한데 묶어놓은 단편집.
필립 K 딕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SF소설 작가다. 무인도에 책 한 권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단연 필립 K 딕의 단편 소설집을 고를 것이다. 살아 생전엔 SF소설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인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인생이었는데 후대에선 헐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작가가 되었다.
필립 K 딕은 거의 평생 불운했다. 총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애완동물 사료용 말고기를 밥 대신 먹고 도서관 연체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궁핍한 생활을 해왔다. 돈을 벌려고 단어 하나 당 1센트라는 가격에 그야말로 단편 소설을 도매가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무도 읽지 않는 그 시절 '펄프 잡지(값이 싸고 거친 나무 펄프 종이로 만든 저렴한 매거진 따위를 일컫는 말)' 매거진들에게. 수많은 자살시도와 우울증, 약물복용에 따른 환영을 보는 등 절대 정상적인 삶이라곤 볼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오직 앉아서 글만 썼다. 돈도 되지 않던 당시의 필립 K 딕의 단편소설들은 후대에 이르러, 수많은 SF소설 작가 지망생들과 헐리우드의 영화판에 가히 폭발적인 상상력을 심어넣는데 성공한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필립 K 딕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소설 속에 담긴 수많은 모티프들이 알게 모르게 SF영화에 전방위적으로 쓰이며 현재까지도 가장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소설을 써낸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언제나 '인간 존재의 본질과 현실의 비현실성, 비현실의 현실성' 을 다루고 있기에 SF장르에 흔히 등장하는 타임머신이나 가공할 위력의 안드로이드에 대한 내러티브는 전무하다 시피하다. 그래서 당대의 다른 SF소설 작가들에 비해 작품의 인기나 소재가 늘 등한시 되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필립 K 딕 특유의 번득이는 착상 하나는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며 무수한 SF영화로 양산해내기 쉽기 때문에 현재까지 무려 10여편에 이르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원작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를 시작으로 로토스코핑 기법을 활용해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허물었던 '스캐너 다클리(2006 / 동명의 원작)', '토탈 리콜(1990 /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스크리머스(1995 / 두 번째 변종)', '임포스터(2002 / 사칭자 혹은 사기꾼 로봇)',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 동명의 원작)', '페이첵(2003 / 동명의 원작)', '넥스트(2007 / 황금 사나이)', '컨트롤러(2011 / 조정 팀)', 마지막으로 '토탈 리콜 리메이크(2012)' 까지. 까놓고 얘기해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마이너리티 리포트' 를 제외하면 흥행면에서 모두 참패를 겪었던 영화들이다. 그도 그럴것이 필립 K 딕이 주조한 소설 원작에서 단 하나의 발상만을 차용한 채, 스토리와 결말, 등장인물 따위는 모조리 제작자의 입맛대로 바꾼 영화들이 대부분. 원작 소설이 발표된 영화를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한 건 아니지만 작가 본인이 대중들에게 말하고 싶은 바와 작품의 주제의식을 통째로 바꾸며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도 한 스푼 넣고, 인류와 세계에 대한 희망도 우겨넣는 작품들이 비일비재해서 이도저도 아닌 영화들이 만들어졌었다.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연출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역시 필립 K 딕 원작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할 정도로 '원작과는 다르다' 라는 말로 못을 박았으니 그저 시나리오와 배우, 그리고 연출의 힘으로 영화 흥행이 성공했던 케이스였다. 필립 K 딕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주요 소재는 그 스티븐 스필버그마저 움직이게 할 정도로 유혹적이고 눈이 부시게 독특한 것들이 많다. 그동안 완성됐던 영화의 스토리를 보면 필립 K 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헤괴한 스토리가 많지만 그래도 살아생전에 그의 소설과 원작의 판권이 이정도로만 팔려나갔더라면 평생 먹고 살 정도의 돈을 만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팬의 입장에선 남게되는게 사실이다.
이 책은 2015년에 현대문학에 속해있는 '폴라북스'에서 필립 K 딕의 단편소설들 중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들과 예전에 몇 번 소개되었던 단편들을 묶어서 발표한 책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필립 K 딕 걸작선' 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필립 K 딕의 장편소설을 차례대로 발간해 오던 폴라북스가 한 템포 쉬어가는 느낌으로 열 두 권의 장편을 낸 뒤에 이 단편집을 두 번째로 엮었다(2012년엔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라는 타이틀로 첫 번째 단편소설집을 발간했었음). 거의 필립 K 딕의 작품들을 총망라하던 프로젝트라서 나처럼 SF장르를 사랑하고 필립 K 딕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던 사람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어떤 거장 SF작가를 모셔와도 필립 K 딕의 글솜씨과 소재에는 게임이 안 된다. 나 역시 한 작가의 책만 읽으면 초점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게 될까봐 기라성 같은 유명 SF작가들의 소설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역시 나에겐 필립 K 딕이 SF장르 소설 쪽에서는 최고이자 대체불가한 작가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더욱 일조하게 된 행위가 됐다. 이미 예전에 국내의 영세한 출판사에서 발표된 적이 있는 소설들과 난생 처음 만나는 단편이 한데 어우러져, 무려 791 페이지라는 방대하고도 무거운 책으로 완성됐지만 출퇴근을 하면서 전철에서 아침 저녁으로 20분씩 읽어내려가며 한 편 한 편 읽는게 너무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고 특출난 작품들이 포진한 필립 K 딕의 단편 소설집이다. 여기에 실려있는 단편들에서도 필립 K 딕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라는 주제의식을 꾸준히 관통해 가며 냉전시대의 배경이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도 선보이는 등 그 시대(1950년대)에 쓰여진 SF소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주조해냈다.
추후에 영화화 되기로 약속된 작품들도 아직 대기중이고 제작과정에서 엎어진 영화들도 많지만 언제나 유일무이한 소재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필립 K 딕은 여전히 장편소설 보다는 단편소설에서 문자 그대로 날개를 단 듯한 글솜씨로,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릿속에 또렷이 잔상을 남기는 실력을 보여준다(지금은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오던 2020년인데도 말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필립 K 딕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SF소설 작가로 남게 될 것이다.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 1952년 7월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2017)'를 보는 듯한 소설. 화성에 식민지를 세운 지구인들은 화성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워브' 라는 생명체를 50센트에 사들이며 지구로 귀환할 동안 식량으로 써먹을 궁리를 한다. 워브는 지구에 있는 '돼지' 를 뜻하는데 '텔레파시'를 통해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등장한다. 재미있는 건 그 워브가 철학과 예술에 대해 능통하다는 것. 모두가 만류하는 가운데 함장은 워브를 식용으로 해치워버리고 워브를 가장 먼저 먹어치운 함장은 이내 워브 그 자체가 되어 비행선에 타고있는 부하들에게 여전히 철학과 예술에 대해 설파한다는 이야기.
별것 아닌 '기묘한 이야기'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소재의 단편소설이지만 인간에게 사육당하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이 나름대로의 사고를 한다면 어떨까라는 재미있는 설정을 지닌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돼지'를 먹는 걸 반대했지만 그 돼지를 먹음으로써 돼지가 인간의 몸을 차지한다는 내용은 약간 섬뜩하기도 하다.
"내 몸뚱이를 식용으로 쓰겠다는 말씀을 하셨지 않소. 제가 들은 바로는 맛이 꽤 좋은 편이라 합디다. 기름이 조금 많지만 육질이 부드럽다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야만적인 방식을 동원한다면, 그대의 종족과 내 종족 사이에 어떻게 항구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겠소? 나를 섭식한다니? 그보다 나와 문답을 하는 쪽은 어떻겠소이까. 철학이나 예술이나-"
워브는 그 너머에 머문다 15p
수호자 - 1952년 1월
제 3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지하에서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추락하게 된다. 미국과 러시아가 벌였던 핵전쟁과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 '리디(leadie - 쇳덩이)' 라고 하는,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들에게 지상을 내어주고 전쟁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다. 인간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지상의 환경이므로 로봇들에게 전쟁을 대신 수행하라 프로그래밍을 한 채 인간들은 지하에서 물자와 자원, 그리고 무기를 지상으로 올려보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알고보니 지상은 이미 리디들에 의해 꽤 많이 복원된 상태였고, 지하에서 상대국들의 전쟁실력에 벌벌 떨며 지내왔던 인간들은 지구를 청소하는 리디들에게 속아,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중.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비롯한 몇 명의 미국 군인들이 리디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똑같은 일을 겪은 러시아 군인들을 만나며 전쟁과 기아, 빈곤을 함께 없애자는 약속을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를 표방한 이 작품은 발표됐던 당시 꽤 많은 인기를 얻어, 필립 K 딕 조차 자신이 '수호자'의 작가라고 직접 말하고 다닐 정도로 유명세를 살짝 떨친 작품이 되었다. 필립 K 딕의 작품들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소설이지만 결말부분은 꽤나 희망에 찬 느낌이라서 필립 K 딕의 팬이라면 상당히 오글거리게 되는 단편소설이다. 인간들이 저지른 실수를 기계들이 대신 수습하면서 인간들은 일절 지상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리디는 땅 위를 기어 다니고, 바다를 건너고, 검게 그을린 날씬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리디는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일으키기는 했으나 계속해나갈 수는 없었던 전쟁을 대신 수행하는 금속과 플라스틱의 존재였다. 전쟁을 발명하고 무기를 발명해 제작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인간은 마침내 전장이라는 무대의 배우, 즉 전쟁을 수행할 병사들까지 발명해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직접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곳에서-러시아,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살아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첫 번째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마자 지표 아래 깊숙한 곳에, 세심하게 설계하고 계획한 대피소에 들어앉아버렸다.
수호자 31p
두 번째 변종 - 1952년 10월 3일
이 작품 역시 '수호자'와 마찬가지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냉전,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로봇, 인류의 멸망 등을 담은 음울한 단편소설이다. 필립 K 딕의 아이덴티티라고도 할 수 있는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으로 보이는(인간인 척하는) 것 뿐인가?' 라는 소재로 아주 재미있게 주조해 냈다. 장르의 특성상 스릴러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 러시아와 미국의 전쟁 덕분에 살아남은 미국인들은 달로 이주를 했다. 지구에 남아있는 미국 군인들은 '발톱' 이라는 작고 동그란 구체같은 기계로 러시아인들을 소탕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변이' 를 일으켜 총 '네 개의 변종' 으로 진화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제목 역시 '~변종' 으로 불리운다. 동그란 구체였던 '발톱' 기계는 스스로 학습하면서 변이를 일으켜, 한 쪽 다리를 잃은 '부상병' 의 모습으로 처음 진화하였고(1-5 - 모델명) 곰인형을 들고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3-5)' 라는 이름의 세 번째 변종으로 진화하였다. 소설 내에서는 어느 누가 두 번째 변종인지 미국 군인과 러시아 군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류가 도망친 달에까지 날아가 인간들을 말살시키려는, '발톱'의 의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든 기계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해, 기계를 만들어낸 아군마저 죽이려 함으로써 살아남은 모두가 패닉에 빠지는, 전형적인 필립 K 딕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그려냈다. 모두가 모두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결국 비극으로 끝이나지만 엄청나게 매력적인 소재를 지닌 소설이라서 진작에 '스크리머스'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었다. 지금 최첨단 cg를 동원하여 리메이크해도 꽤나 인기가 있을 것 같은 소설.
"내 걸음이 너무 빠른 건 아니냐?" 헨드릭스가 물었다.
"아뇨."
"어떻게 나를 본 거냐?"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려?" 헨드릭스는 혼란에 빠졌다. "뭘 기다리고 있던 거지?"
"잡으려고요."
"뭘 잡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요."
두 번째 변종 75p
콜로니 - 1953년 6월
우주를 탐사하던 인간들은 새로운 생명체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있지만 늘 허탕만 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행성에 착륙해 조사를 벌이던 중, 모든 것들을 복제하는 능력을 지닌 헤괴한 생명체를 찾게된다는 이야기. 필립 K 딕이 평소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았는지 잘 알게해주는 글이 있다.
"정원을 파보아도 잡초에서는 그다지 신비롭거나 초차원적인 요소를 찾을 수가 없다. 물론 당신이 SF작가가 아닐 때의 이야기다. SF작가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심이 담긴 눈초리로 잡초를 바라보게 된다. 이 놈의 진짜 목적은 뭐지? 그리고 애초에 누가 이놈을 이곳으로 보낸거지? 내가 항상 던지는 질문은, '그것의 정체가 뭐지?' 이다. 이놈의 정체가 뭐지? 잡초로 보이는 것은 겉모습 뿐이다. 그놈들은 내가 이걸 잡초라고 믿게 하고 싶은 거다. 언젠가 잡초의 변장이 떨어져 나가면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겠지. 그러나 그때는 펜타곤도 이미 잡초로 가득 차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너무 늦은 후일 것이다. 잡초, 또는 우리가 잡초라고 생각했던 그 존재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요딴 필립 K 딕의 피해망상에서 온 SF적 상상력을 극대화한 소설이다. "궁극의 피해망상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당신을 적대하는 것이다. '직장 상사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어' 가 아닌, '직장 상사의 전화기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어' 인 것이다." 이 작가의 말 그대로 외계행성에서 물체를 복제하며 살아남은 생명체는 탐사를 나온 인류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현미경, 그 다음엔 수건, 금속 벨트, 양탄자, 장갑, 방역용 매트, 심지어는 인간들이 타고 온 우주선마저 복제된다. 사물이 적개심을 품고 인간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독특한 상상력의 단편소설이다. 배경이 머나먼 우주라서 이 글을 쓰면서 하마터면 방금 '단편소설' 이 아니라 '영화' 라고 쓸뻔했다.
현미경의 경통 두 개가 갑자기 휘어지며 그의 기도를 감고 목을 조르려 했다. 떼어내려 했으나 현미경은 계속해서 그의 목을 조이며 파고들었다.
콜로니 135p
페이첵 - 1952년 7월 31일
시간 고리와 시간 거울을 프로그래밍하는 엔지니어로 일했던 제닝스가 2년 동안 일했던 레드릭 건설 회사에게 받은 보수라곤 50만 크레딧이 아니라 한 움큼의 잡동사니였다. 코드 키 하나, 반으로 찢은 표 한 장, 보관 영수증 하나, 가는 철사 약간, 반으로 쪼개진 포커 칩 한 개, 초록색 천 조각, 버스 토큰 하나. 레드릭 건설 회사의 방침대로 뇌 속의 기억저장소를 말소시키면서 2년 동안의 기억이 없어진 제닝스는 과거의 자신이 본 미래인, 현재의 자신을 조금씩 믿어가게 된다. 이야기가 흐름에 따라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3인칭화 시켜가며 잡동사니를 건넨 '과거의 나' 에게 모종의 신뢰를 느끼며 마치 보드게임에서 정해진 길로 자연스레 이동하는 것 같은 재미를 주는 단편소설이다. 버스 로커 열쇠의 가치를 따져가며 전화를 걸 10센트 동전 하나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페이첵은 우마서먼과 벤 애플렉이 주연을 맡고 오우삼 감독이 연출을 했지만 개봉했던 당시엔 당연하게도(?) 쫄딱 망한 영화가 되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를 과거에 미래를 본 자신이 건넨 자질구레한 아이템들로 돌파한다는 소재는 지금도 먹힐것이다. 제작사의 입김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닝스는 가득 쌓여 있는 꾸러미와 상자를 밀치며 방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반대쪽에 비상 출입구가 있었다. 그는 즉시 문을 열었다. 코드키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알고 있을 터였다.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한 것이다. 마치 신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미 경험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그'가 틀릴 리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미래가 유동적이라면 어떻게 될까. 예전에는 이게 맞는 열쇠였지만, 이제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페이첵 197p
변수 인간 - 1952년 11월 19일
권위와 군사주의 독재를 반대하는 필립 K 딕의 정치적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는 소설. 미국에서 절정에 달했던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 센타우리인들에게 식민지 행성으로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지구인들은 언제나 센타우리인들을 멸절시킬 생각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SRB 기계에게 싸움의 성패를 수시로 물어보는 보안국장 라인하트와 그를 적대시하는 과학자인 셰리코프의 자존심 대결이 꽤나 재미있으며 실수로 '시간 거품' 기계에 의해 현재의 시간대로 흘러들어온 과거의 인물인 토머스 콜의 존재 덕분에 전쟁에 '변수' 가 생기게 되어 그의 목숨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라인하트와 셰리코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서부시대에서 미래로 왔지만 과거이건 미래이건 무언가를 고치는데엔 일가견이 있는 토머스의 기묘한 여행.
"그로부터 어떤 추론도 불가능한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과거에서 온 인간이요. 기계가 그 내용을 처리할 수 없는 겁니다. 변수 인간인 거죠!"
변수인간 237p
통근자 - 1953년 8월~9월
이제는 익숙해진 '멀티 유니버스', '평행우주' 따위를 1953년에 고안해낸 소설이다. 확실히 말하자면 '멀티버스' 가 아니라 '거의 존재할 뻔 했던' 세계가 별도의 현실을 가지면서 그 경계면에 서 있는 존재들 모두 나름의 피해자가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평소에 봐왔던 익숙한 풍경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면 자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유지할 거냐고 묻는 작품.
페인은 자리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크리켓은 벽의 지도를 보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처음 사라졌을 때는 제이컵슨이 건네준 안내판을 보던 중이었다. 메이컨하이츠라는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안 순간이었다는 말이다. 혹시 여기에 실마리가 있지는 않을까? 이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고 꿈만 같았다.
통근자 334p
요정의 왕 - 1953년 9월
필립 K 딕이 집필한 단편들 중, 몇 안되는 순수 판타지 소설이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샤드락 존스가 우연찮게 요정과 요정들이 섬기는 왕을 목격하게 되어 자신의 집에서 쉬게 도와주는데 그 사이 요정의 왕이 죽어, 샤드락이 차기 요정의 왕이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요정들은 오랜 세월 트롤들과 전쟁을 치루던 중이었는데 샤드락의 오래된 친구였던 이가 트롤 대왕이었다는 그야말로 판타지 스러운 결말을 지닌 단편소설이다. 디즈니에게 판권이 넘어가, 2016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지만 이 마저도 엎어진 듯.
"자네들의 왕이 나를 차기 왕으로 선택한 이유가 뭔가?"
"그분께서는 폐하를 신뢰하신 겁니다." 요정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분을 빗속에서 구제해 폐하의 저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폐하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선행을 베풀고 그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분은 매우 드문 법이죠."
요정의 왕 363p
단기 체류자의 행성 - 1953년 3월 23일
원제는 '떠돌이들(the itinerants)' 이다. 필립 K 딕이 규정짓던 '인간의 정의' 를 평소와는 다르게 내면이 아닌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찾는다는게 이 단편 소설의 특징이다. 지구에서 살고있던 사람들이 자연파괴와 핵전쟁으로 인해 돌연변이를 일으켜 아예 새로운 종족으로 변모한 뒤, 남아있는 인간형체의 사람들은 더이상 '지구인들'이 아님을 깨닫고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물질만능주의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 모습의 미래를 담은 것 같아, 한 편으로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지표는 방사능에 남김없이 오염되었다. 행성 전체에 강렬한 방사능 폭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베타선과 감마선의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생명이 사멸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강렬한 방사선은 돌연변이를 촉진했다. 곤충과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준위에서 정상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과정이 가속되어, 수백만 년 단위의 진화가 몇 초 안에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단기 체류자의 행성 387p
자가 광고 - 1953년 11월 19일
소비 중심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소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광고가 아닌 것들이 없다. 당장 집 밖의 빌딩에 걸려있는 간판과 네온사인 부터 시작해서 스마트폰을 열고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곧바로 눈에 띄는 자극적인 광고들. 이 작품에서 필립 K 딕은 전능한 로봇이 자신을 사달라며 사생활의 궁극적인 부분까지 침투하는 장면들로 물질만능주의의 병폐를 를 곱씹고 있다. 결국 우주로까지 도망치는 주인공을 끝까지 쫓아오는 파스라드라는 이름의 가정용 로봇은 결말에 이르러서도 모리스를 놓아주지 않으며 끝을 맺는다. 필립 K 딕은 이 작품을 발표하고나서 많은 대중들에게 너무 우울하다며 볼멘소리를 듣게됐는데 결국 인간과 로봇이 화해를 하며 힘을 합치는 결말로 썼어야 했다고, 대중들이 옳았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응당 원래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든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엔딩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계선을 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광고였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가니메데에서 지구에 이르는 그 긴 여정을 뒤덮고 있는 광고들이 문제였다. 테라는 끝없이 몰려드는 방문 판매 로봇들로 복작댔다. 너무 끔찍했다. 게다가 광고는 모든 곳에 있었다.
자가 광고 407p
황금 사나이 - 1953년 6월 24일
마치 마블과 DC 코믹스에 등장하는 돌연변이를 그려낸 단편소설이다. 다만 소설의 주인공인 '크리스'를 우리가 응당 알고있는 히어로나 초인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종의 생존을 위해 인간과 경쟁을 하는 짐승으로만 그려내서 뮤턴트와 초능력자들에 중독되어가던 일반 대중들의 반감을 꽤 샀던 소설이다. 작품의 제목이 된 주인공 크리스는 온 몸이 눈부신 황금으로 뒤덮힌 돌연변이에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 엑스맨에 등장하는 퀵실버나 DC 코믹스에 등장하는 플래시등의 빠른 이동 속도를 지니고 있다. 언어능력을 모두 잃어버렸는지 작품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여러갈래의 평행 우주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의 수만을 따라 본능적으로만 움직이는 단순한 생명체로 표현됐다. 하지만 문제는 크리스에게 넋을 잃고 마치 '신' 으로 떠받들며 그와의 잠자리를 고대하는 여성들이 소설이 진행될 수록 점차 많아진다는 것. 그렇게 황금 사나이는 자신의 씨를 곳곳에 뿌리며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도망다니는 존재가 된다. 헐리우드는 2007년에 니콜라스 케이지와 줄리안 무어를 주인공으로 하고 리 타마호리 감독에게 메가폰을 넘겨, 영화화 했다. 온 몸이 번쩍번쩍 빛이 나고 매혹적으로 아름다운 돌연변이 크리스의 설정을 모조리 지우고, 그저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남자' 라는 설정 하나만 차용한채. 결과는 역시 폭망했다.
"만약 돌연변이를 도입해서 우리 종족을 존속시켜 나가려 한다면, 결국 지구를 물려받는 건 우리가 아니라 돌연변이들이 될 거야."
황금 사나이 454p
제임스 P. 크로우 - 1953년 3월 17일
이번에도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한층 더 암울한 내용이다. 로봇이 진작에 인간들을 지배했고 인간은 예술과 온갖 잡일을 로봇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대신 해준다는 설정을 지녔다. 인간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거의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슬럼가이고 로봇이 생활하는 곳은 초고층 빌딩들이 운집해 있는 근 미래적 도시이다. 비참함에 고된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 노동자들 사이에 '제임스 P. 크로우' 라는 인물이 나타나 로봇이 세운 테스트를 통과해 의원이 되고 나아가 인간들의 해방을 이뤄낸다는 내용의 단편소설이다. 고안해낸 로봇도 풀기 힘든 테스트는 크로우가 미래를 내다보는 스캐너로 꼼수를 써서 1등급 명단 시험을 통과했지만 애초에 로봇을 고안해낸 인간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것 뿐이라, 로봇들은 의외로 순순히 지구를 떠나게 된다.
인간은 매일 밤마다 영상 화면에서 유희를 제공했다. 인간들은 오락을 제공하는 측면에서는 훌륭했다. 인간이 로봇보다 더 뛰어난 유일한 분야였다. 인간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했다. 로봇들의 오락을 위하여.
제임스 P. 크로우 481p
사칭자 - 1953년 2월 24일
필립 K 딕이 '내가 인간인가?' 라는 주제를 다룬 첫 소설이다. 아마 SF계에 전무후무한 명제를 스스로 디민 꼴이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수많은 SF영화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 아니려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라는 주제의식을 꾸준히 심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자칭 SF매니아라고 여기는 사람들마저도 그 시작이 필립 K 딕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테지만. 아마도 내가 필립 K 딕을 타인에게 소개할 때 자주 얘기하는 소설이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을 본딴 로봇이 인간을 죽이고 그 인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자신이 인간인 줄 알았던 인간은 알고보니 로봇이었다' 이 단 두 줄만으로 필립 K 딕이라는 작가가 지닌 아이덴티티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소설이다. '임포스터' 라는 제목('사칭자'의 영어제목)으로 게리 시나이즈를 주연으로 세우고 게리 플레더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발표되었다. 국내엔 뜬금없이 집사재가 2004년에 '사기꾼 로봇' 이라는 타이틀로 펴낸 책에 아마도 처음으로 소개됐을 것이다. 나는 이 단편소설을 두 번 세 번째 읽은 셈인데 여전히 결말 부분의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무려 16년만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그 로봇 안에는 U-폭탄이 있다네. 우리 요원은 그 폭탄을 터뜨리는 방법을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특정한 문장을 구두로 말해야 할 거라 추측했지. 그 로봇은 자신이 살해한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평소의 행동, 직업, 사회 활동을 그대로 이어나갈 예정이었네. 애초에 그 사람과 닮은 모습으로 구축되었지. 누구도 그 차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사칭자 513p
음울한 대지에 고하노니 - 1953년 12월 30일
이 소설 역시 앞서 등장했던 '요정의 왕' 처럼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호러 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즐비하는 본 작품은, 내가 봤던 필립 K 딕 소설들 중에 가장 이질적이자 독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저승으로 넘어가버린 실비아가 현세로 다시 건너오려던 노력 덕분에 현실에 있는 사물과 생물들이 붕괴하는 장면들은 영화로 만들면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 참혹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 예수의 존재도 은근슬쩍 이야기 속에 넣음으로써, 독특함을 더했다.
반짝이는 아침의 길거리를 따라 실비아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일찍 일어나서 직장으로 향하는 그녀들. 버스 정류장에서 무리를 지어 한데 모여 선 그녀들. 집 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침을 먹는, 목욕을 하는, 옷을 입는 더 많은 실비아들이 있었다. 수백 명의 그녀들.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녀들. 실비아들의 도시가 그날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음울한 대지에 고하노니 556p
조정 팀 - 1953년 2월 11일
마치 영화 '다크 시티(1998)'을 보는 듯한 느낌의 소설이다. 어느날 사무실에 출근하려는 에드는 갑자기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재로 변하는 기현상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사물을 '조정(adjustment)' 하는 인물들이 존재하고 지구의 안위를 위해 인간들을 '수정'하는 그들은 사무국 요원의 단순한 실수로 수정 타이밍을 놓쳐, 에드에게 들키게 된다. 결국 조정 팀의 최고 위원에게 불려간 에드 플레처는 자신이 본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꽤나 맛있어보이는 소재이지만 이 소설은 에밀리 블런트와 멧 데이먼을 주연으로 하고 조지 놀피 감독이 연출을 맡은 '컨트롤러(2011)' 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역시 흥행에 참패했다.
건물의 한 부분이 부서졌다. 사방으로 파편을 쏟아내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모래처럼. 에드는 멍하니 서서 입을 달싹였다. 그의 발치에 회색 잔해가 널려 있었다. 그가 건물을 만진 곳에는 들쭉날쭉한 공간이 남아있었다. 콘크리트 가운데 뚫린 보기 흉한 구멍이었다.
조정 팀 572p
아버지 괴물 - 1953년 7월 21일
어릴 때, 영화 '복제인간의 제국(원제: 우주의 침입자 -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이라는 영화를 MBC 주말의 명화에서 본적이 있다. 도날드 서덜랜드의 피가 거꾸로 솟는 엔딩이 아직도 끔찍할 정도로 기억에 생생하다. 아무튼 그 뒤로 외계 생명체들이 지구에 스며들어 인간들의 몸을 강탈한다는 내용의 에이리언 마스터(1994) 나 '인베이젼(2007)' 도 감상하고 그 모든 것들의 원작자인 잭 피니가 지은 원작 소설도 읽고 그랬다. 필립 K 딕도 그와 비슷한 맥락의 단편을 써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됐다. 그것도 잭 피니의 원작보다 2년 더 먼저! 인간의 존엄과 외계 생명체에 대한 위협을 그려낸 여러 작품들과는 살짝 다른 필립 K 딕의 '아버지 괴물'은 그저 작가 본인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느꼈던, 착한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 두 버젼의 아버지가 있는 것 같다는 것에서 시작된 단편소설이다. 원래의 결말은 아이들이 찰스를 버리고 도망치는 거라고 하던데 그 버젼도 보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같은 분위기의 소설이다. 미국은 이제 이런류의 톤을 잡아내는데 도가 튼 느낌이다(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그것' 시리즈도 그렇고 비슷하면서 살짝씩 다른 무드를 연출해낸다).
아이는 의자를 뒤로 빼 제 아버지에게서 최대한 떨어져서는 한쪽에 웅크리고 굳어 있었다.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그러니?" 준이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다른 쪽이에요." 찰스가 숨을 죽이고 중얼거렸다. "다른 쪽이 들어왔어요."
아버지 괴물 605p
포스터, 넌 죽었어! - 1953년 12월 31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 지켜내자는 정부의 슬로건 아래, 값비싼 방공호를 사들이며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내려 한다는 미국 시민들의 이야기. 실제 냉전시대에 돌입한 미국이 정부가 방공호를 제공하는 대신 국민이 각자 방공호를 사도록 하는 쪽이 안보에 도움이 될 거라는 대통령의 제안에 격분하던 필립 K 딕이 정부를 꼬집고자 집필한 작품이다. 실권자들이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기 위해 이 소설을 썼지만 의외로 미국 보다는 소련 팬들이 많아지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인생은 이토록 참 아이러니 하다.
"아버지 말로는, 사람들이 이제 자동차나 세탁기나 텔레비전 따위는 죄다 충분히 쓸 만큼 사버렸다고 했어요. NATS나 방공호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결고 필요한 만큼을 가질 수는 없을 거라고요, 아버지는 공장에서 계속 총이나 방독면 따위를 찍어내도,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는 한은 계속 그것들을 살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사람이 매년 차를 사는 일에는 질려서 멈출지 모르지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호를 사는 일은 멈출 수 없을 거라고 했어요."
포스터, 넌 죽었어! 630p
독점 시장 - 1954년 10월 18일
참으로 재미있는 설정의 소설이다. 나이든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미래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와 그녀의 트럭, 그리고 트럭에 실은 물품들을 가지고 미래로 갈 수 있다. 어느 미래든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진 무수한 경우의 수 중에 그녀 마음대로 어디든 택해, 달려갈 수 있다. 에드나 버델슨 부인은 미래의 인간들에게 식료품이나 자잘한 도구들을 건네며 돈을 받아 과거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황폐해진 미래의 지구는 더이상 인간이 거주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버델슨 부인에게 물품을 구입했던 미래의 인간들은 그녀와 마지막 거래를 한다. 순간 독점 시장을 잃어버린 버델슨 부인은 과거(그녀의 현재)로 다시 돌아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미래 중에 미래의 인간들이 지구를 탈출하지 못하는 미래를 골라, 다시 거래를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한 개인에게 무궁무진한 힘이 부여되지만 그걸 오직 자신의 이득에만 사용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립 K 딕 역시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미래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인은 그들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의 관계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저 두 세계가 모두 존재하며, 자신이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 이 일행의 구성원들이 그녀와 함께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부인이 전이해가는 동안 그들은 뒤에 남겨졌다. 오직 그녀만의 능력, 그녀만의 자산이었다. 공공재가 아니었다. 부인은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귀중한 자산이었다.
독점 시장 671p
얀시의 허울 - 1954년 10월 18일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염두해 두고 만든 단편소설.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불신과 고발을 위해 이 소설을 집필했다. 본작에 등장하는 권위가 허상이며 그 권위를 만들어낸 것이 결국 광고 카피라이터와 영화 제작자 등의 대중매체 관계자들이라는 게 주제인 소설이다. 한국에서도 한 때 이명박이나 박근혜같은 병신들이 방송가를 장악해가며 언론통제를 하던 때를 떠올리면 읽는 내내 여러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다만 필립 K 딕은 정치적 목적보다는 선전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서, 꽤나 소프트하게 읽힌다. 예나 지금이나 미디어에서 추앙하는 존재나 상품들은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 예를 들면 드라마에 PPL로 쓰인 상품이 배우가 매력적이라서,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그냥 TV에 나온 제품이니 실제로는 전혀 필요 없지만 나도 한 번 쓰고 싶어서 구입을 하는 행위는 그저 돈을 들여가며 협찬을 한 상품 제조사의 꾐에 낚이는 것 뿐이라는 얘기다. 돈 많은 애들을 더 배불리는 행위, 이제 지겹지 않은가?
사소하고 특정한 주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의견이 존재했다. 개가 고양이보다 낫다든가, 자몽은 설탕을 살짝 뿌리지 않으면 너무 시다든가,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는 게 좋다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좋지 않다든가. 하지만 규모가 큰 주제로 들어가면... 텅 빈 공허만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문장으로 구성된 공허한 구호만이 존재했다. 전쟁과 세금과 행성에 대한 얀시의 의견에 동조하는 대중은 실제로는 그 어떤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얀시의 허울 699p
마이너리티 리포트 - 1954년 12월 22일
이 단편집의 타이틀이 된 단편소설이다. 작품의 주제는 자유의지 존재 여부다. 늙은 '프리 크라임' 경찰국의 국장인 앤더튼은 미래를 예지하는 정신지체아 세 명을 데리고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미리 예방하는 일을 총괄지휘하고 있다. 어느날 그가 과거 군인이었던 캐플런을 죽인다는 리포트를 보게되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도망치지만 이내 프리 크라임의 존속을 위해 사건에 순응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 명의 예지자 중 첫 번째 도나의 보고서는 캐플런이 자신이 프리 크라임을 무너뜨릴 거라는 계획을 앤더튼에게 알리자 앤더튼이 그를 살해하는 내용을, 두 번째 예지자인 제리는 도나의 보고서를 '읽고' 자신의 지위와 목숨을 지키려는 앤더튼의 행동을 예지한 보고서를 내놓는다. 마지막 예지자, 마이크의 보고서는 두 번째 상황이 담긴 보고서를 본 앤더튼이 캐플런을 죽이지 않는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다. 세 예지자의 모든 보고서가 달랐지만 그 중에 두 명의 보고서의 의견이 같았으니 앤더튼이 캐플런을 죽일거라는 보고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다수의 보고서' 라는 환상이 만들어졌고 마지막에 보고서를 만든 마이크의 소수 보고서(마이너리티 리포트)만이 옳은 결말을 보여주는 꼴이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동명의 영화는 꽤나 히트를 했고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들 중에 가장 많은 흥행을 기록한 작품으로 남게되었다. 감독과 제작진이 얼마나 좋아야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 탄생하게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실제로 어기게 되지는 않지. 폭력 행위를 저지르기 전에 우리가 그들을 먼저 잡아들이니까. 따라서 범죄 그 자체는 완벽하게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되는 걸세. 우리는 그들에게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지. 반면 그들은 영원히 무죄를 주장할 걸세.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은 실제로 무고한 셈이지."
마이너리티 리포트 722p
필립 K 딕의 단편집인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2주동안 읽으면서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내려갔다. 어찌나 이렇게 만족스러운 SF소설을 주조해 내는지... 폴라북스가 또 다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집을 내줬으면 좋겠다. 페이지가 얼마나 많든, 책이 얼마나 두껍든 간에 필립 K 딕의 단편집을 그저 공식적으로 번역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