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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May 07. 2020

여자 없는 남자들 리뷰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소설집

웰컴 투 더 하루키 월드.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

사랑하는 잠자

여자 없는 남자들





웰컴 투 더 하루키 월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9년만의 신작 단편소설집이다. '도쿄 기담집' 이후로 2013년 말부터 2014년 봄까지 집필했던 단편들을 묶어서 책으로 낸 작품이다. 새로 쓴 소설은 본작의 타이틀이 된 '여자 없는 남자들' 한 편 뿐이고 영미권 단편소설집에 수록했던 '사랑하는 잠자' 까지 총 일곱 편의 소설들이 묶여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을 읽게 된 이유는 친한 블로거였나 안 친한 블로거였나 지나가다 우연히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이 단편집에 수록된 어떤 소설을 읽은 감상이 독특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누구였는지, 해당 소설이 어떤 작품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은 2014년에 (국내에)발표되었고 벌써 6년 전이나 지난 일이라 기억 해내는게 더 신기할 따름. 대충 머릿속에 흐릿하게 어떤 블로그에서 감상평을 읽은 건 기억이 나는 정도. 그 글을 보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고 그 해당 단편 하나만 읽고 내 감상으로 답글도 써준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 것들은 아예 잊혀져 버렸다. 아무튼 기억해보면 나는 하루키의 소설들은 죄다 장편들만 섭렵했지, 단편 소설집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읽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 1987년 작)' 로 하루키에 입문 했기에 그동안 장편 소설 위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했던 듯. 호흡이 짧은 하루키의 소설들은 뭔가 끝맺음이라거나 결말이 두루뭉술하게 끝나는 작품이 많아서 더 그랬던 걸지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도 하루키의 색채라고 할만한 것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소설들 뿐이다. 여자, 섹스, 성, 하루키 특유의 기묘한 이야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년 작)'에 언급됐던 일각수, 음악, 재즈, 맥주, 위스키, 싱글몰트, 와인 등 거의 하루키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소설들 속에 잔뜩 포진되어 있다. 특히나, 표제작으로 쓰인 '여자 없는 남자들' 도 그렇고 여성성에 유난히 집착하는 모습들을 단편 소설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에, '이 양반은 노벨문학상 받기엔 아직 한참 멀었군' 이라는 느낌을 여전히 받았다. 유독 하루키의 소설들에서는 여자와 성에 관한 이야기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하루키 본인의 성향이나 취향이리라. 딱히 변태적인 이야기는 의외로 없어서, 역시 장편 소설에서 더 변태스러운 취향을 반영하는 작가라는 느낌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단편집에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들은 하루키를 잘 모르면서 하루키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종의 입문서 같은 역할을 하는 소설들이 들어가 있다. 멜랑콜리하고 느슨한 하루, 뭔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묘한 일들, 상식적인 선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성욕, 은밀하고 남에게 감추고픈 뜨거운 욕구들을 이 단편집에서 맛보기로 살짝씩 보여준다. 그래서 나같은 오래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읽었을 땐 반비례적으로, 볼 일을 보다 중간에 끊고 나온 것 같은 소설들이 대부분이다. 뭔가 터질만한 징조만 잔뜩 보여준채 '후후... 안녕.' 하는 작품들 뿐이라서 장편으로 더 읽고 싶은 소설들이 태반이다. 이런것 처럼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단편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월이 흐르던 흐르지 않던, 흐르고 나서 읽던 현재에 읽던 언제나 잘 읽히고 간결하면서도 농밀한 글쓰기가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주는 작가라 하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는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SF작가인 '필립 K 딕' 이지만 평소의 삶에서 쓰고있는 소설이라던가 나의 성적 취향, 여성을 향한 욕망 따위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하게 엮여있어, 내가 쓰는 글들과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작가 되시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들을 보면 꼭 현대문명과 동떨어진 주인공들이 대부분인데(요즘은 흔해진 스마트폰 조차 자주 등장하지 않는 배경들이 잔뜩있다), 의외로 단편 소설에선 최근 유행하는 것들도 여럿 집어넣음으로써,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을 조금씩 시도하는 하루키 월드를 만나볼 수 있는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나머지 다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들이 이정도 수준만 유지해 주고 있다면 새로운 신작이 나오기 전까지 하루키의 단편 모음집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













드라이브 마이 카


중년 배우 가후쿠가 음주운전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되고 새로운 기사인 미사키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소설. 역시나(?) 주인공 가후쿠의 부인인 여배우는 가후쿠와 결혼생활중에 네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고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마지막에 아내가 바람을 피웠던 상대인 남자 배우 다카쓰키를 의도적으로 만나 술친구가 된다는 이야기. 상당히 불쾌하고 어딘가 정신병이 있는게 아닐까 싶은 가후쿠의 이야기이지만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눈 앞의 다카쓰키가 그녀와 어떤 자세로 섹스를 했는지, 아내의 어디를 자신과 악수한 그 손으로 만졌는지 등을 상상하며 스스로 괴로움의 늪에 걸어들어가는 묘한 인간이다. 그와 더불어 죽은 아내를 함께 그리워하는 동서지간 끼리의 동병상련도 나누다 이만하면 됐는지 불현듯 다카쓰키와의 연락을 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카쓰키보다 가후쿠가 모자랄 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도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과 바람을 피운 죽은 아내를 원망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미사키가 의외로 정답을 대답해 준다. 꽤나 쿨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하면서도 속내는 지옥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가후쿠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소설.





"하지만 분명히 말해 그리 대.단.한. 놈은 아니었어. 성격은 좋은지 모르지. 핸섬하고, 웃는 얼굴도 근사해. 적어도 약아빠진 인간은 아니었고. 하지만 경의를 품을 만한 인간도 아니야. 솔직하지만 깊이가 부족해. 약점이 있고, 배우로서도 이류였어. 그에 비해 내 아내는 의지가 강하고 속 깊은 여자였지.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조용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 품에 안겼는지, 그 의문이 지금도 가시처럼 마음을 찔러."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후쿠 씨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도 느껴진다, 그런 말인가요?"

가후쿠는 잠시 생각하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부인은 그 사람에게 애당초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미사키는 매우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잤죠."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마사키가 덧붙였다.

여자 없는 남자들: 드라이브 마이 카 59p












예스터데이



비틀즈의 '예스터데이' 를 간사이 사투리로 가사를 붙이고 부르는 기타루와 그의 친구인 주인공, 그리고 기타루와 소꿉친구이자 오랫동안 사귄 에리카의 이야기. 전형적인 '상실의 시대' 풍의 소설로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선 누군가가 죽거나 하지 않는다. 다만 기타루와 초등학생 때 부터 사귀었던 에리카와 성적으로 엮이기 싫어하는 기타루와 그녀를 주인공에게 소개시켜, 두 사람을 엮어주려는 기타루의 마음, 기타루와 진도를 빼지 못해서 다른 선배와 첫 경험을 치룬 에리카,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먼 훗날 주인공과 에리카가 동창회를 하듯 다시 만나고 기타루는 덴버에서 초밥집은 운영하는 결말에 다다른다. 미지의 세계 앞에 놓여져 있는 세 남녀의 이야기라서 무라카미 하루키 초기 장편 소설을 보는 듯한 감상을 주는 작품이다. 아마도 여자 없는 남자들의 단편 소설집을 국내로 들여오면서 일러스트 디자인을 국내의 디자이너가 새로 꾸민 것 같은데, 이 소설에 나오는 에리카 꿈 속의 '얼음 달' 을 표현했다.






우리는 누구나 끝없이 길을 돌아가고 있어.

여자 없는 남자들: 예스터데이 109p














독립기관



여기 한 명의 의사가 있다. 이름은 도카이. 직업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 그는 여자들과의 섹스보다 매력적인 여성과 나누는 이야기를 더 중요시하는 남자이다. 못생겼거나 아름답거나 하는 건 도카이에게 중요치 않다. 그리고 그녀들이 남편이 있든 주로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든 역시 중요하지 않다. 도카이는 서로 책임지지 않는 남녀 관계를 지향하고 또 '세컨드 연인' 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날 도카이는 열여섯 연하에 해외 출장이 잦은 남편이 있고 다섯 살 먹은 딸도 있는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물론 '사랑' 은 도카이 혼자 느끼는 감정이고 열여섯에 남편과 딸이 있는 상대방은 도카이가 흔하게 만나왔던 여성들과 하등 다르지 않게 도카이를 대한다. 하지만 도카이는 그 무렵부터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내과의사 이야기가 담긴,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나는 대체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 진지하게 몰두하게 된다. 그러면서 만나는 여성들의 스케쥴을 비서를 고용해, 따로 관리할 만큼 바쁘고 정력적으로 생활하던 도카이가 하루하루 시름시름 앓다 결국엔 몸이 말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 모든 걸 제 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주인공, 다니무라(도카이와 스포츠 센터에서 만났다)는 도카이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 입장이다. 열여섯 유부녀 덕분에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며 죽어가던 도카이는 다니무라에게 스쿼시 라켓을 하나 선물하곤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꽤나 쿨하고 '불륜'을 몸소 저지르는 인물이 혼자 사랑에 빠져 사랑의 열병을 앓다 죽는다는 이 소설은 굴곡진 주위 세계에 올곧은 자신을 끼워맞추며 살아가던 그가, 매력적인 (유부녀, 혹은 임자가 있는)여성과의 대화나 섹스로 행복감을 충족하던 그가 고작 사랑 하나 때문에 죽는다. 타인을 가질 수 없는 상실감 자체를 즐기던 도카이라는 이름의 성형외과 의사가 그 상실감에 휘말려 서서히 말라간다는 이야기. 내가 봤을 땐 쌤통 ^^*







도카이에게는 여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와인 잔을 기울이고 대화를 즐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순수한 기쁨이었다. 섹스는 어디까지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또하나의 즐거움' 일 뿐,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매력적인 여자들과의 친밀하고 지적인 교류였다. 나머지는 전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지라 여자들은 자연히 도카이에게 마음이 끌렸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부담 없이 즐겼고, 그 결과 자진해서 그를 받아들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견해지만, 세상의 많은 여자들은(특히 매력적인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섹스에 목매는 남자들에게 어지간히 식상해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독립기관 123p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독립기관 167p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는 잘못된 보트에 이어졌던 거라고 우리는 뒤늦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단언할 수 있을까? 생각건대 그 여자가 (아마도)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의미는 얼마간 다르겠지만, 도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독립기관 168~169p












셰에라자드



무슨 연유로 주인공 하바라는 '하우스' 라는 곳에 갇혀 생활한다. 생필품은 모두 외부에서 제공받고 있고 간간이 '셰에라자드'라는 여성이 들러 먹을 거나 입을 것 등을 챙겨주곤 한다. 그런 그녀와 자연스럽게 몸을 섞게된 하바라와 섹스가 끝나고 침대 위에서 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그녀를 '셰에라자드('천일야화' 에 등장하는 왕비의 이름)'라고 스스로 지칭하여 소설의 제목이 저렇게 되었다. 셰에라자드가 어느날은 자신의 고교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짝사랑하던 멋진 같은 반 남자 아이의 집에 몰래 침입해, 이런저런 체취를 맡다가 흥분을 한다거나 도가 지나쳐, 마지막 침입 땐 그 남학생의 땀냄새가 밴 티셔츠 하나를 훔쳐오게 된다. 그녀는 전생에 턱이 없는 칠성장어였다는 둥 짝사랑 하던 남학생을 떠올리자 흥분되어 주인공과 연이어서 또 한 번 섹스를 하는 둥 마치 '상실의 시대' 에 등장하는 미도리 같은 느낌의 캐릭터이다. 다만 미도리처럼 녹색에다 생기발랄하진 않은 캐릭터 설정 덕분에(전업 주부에 하바라보다 네 살 연상, 몸에 군살이 붙기 시작한 전형적인 유부녀) 마치 미도리의 먼 친척 이모 쯤 되는 인물이다. 짝사랑 했던 남학생의 체취를 떠올리며 완벽한 오르가즘에 이르는 셰에라자드를 보며 남자는 몰라도 여자는 역시 기묘하고 독특한 인물로 주로 묘사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변태같은 표현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바라 씨, 다시 한 번 나하고 자줄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할 수 있을거야." 하바라는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서로를 안았다. 셰에라자드의 몸은 조금 전과 크게 달랐다. 부드럽게 안쪽 깊숙이까지 젖어 있었다. 피부도 매끈하고 탄력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 동급생의 빈집에 몰래 들어갔던 때의 체험을 선명하고도 리얼하게 회상하고 있는 거라고 하바라는 짐작했다. 아니, 이 여자는 실.제.로. 시간을 거슬러올라 열일곱 살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전생으로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셰에라자드는 그.럴.수. 있다. 그 뛰어난 화술의 힘으로 스스로를 홀릴 줄 아는 것이다. 뛰어난 최면술사가 거울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금껏 없었을 만큼 격렬하게 몸을 섞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열정적으로.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에 확실한 오르가슴을 맞았다. 몸이 몇 번이고 거칠게 경련했다. 그때의 셰에라자드는 얼굴까지 확 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셰에라자드가 열일곱 살에 어떤 소녀였는지, 좁은 틈새 너머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엿보듯이 하바라는 그 모습을 대략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안고 있는 것은 어쩌다 서른다섯 살 평범한 주부의 몸에 갇힌, 고민거리를 지닌 열일곱 살 소녀였다. 그녀는 그 안에서 눈을 감고 몸을 가늘게 떨며 땀이 밴 남자 셔츠 냄새를 정신없이 맡고 있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셰에라자드 205p~206p














기노



기노의 기묘한 이야기. 주인공 '기노' 는 스포츠용품 판매회사에서 십칠 년을 근무한 남자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바를 운영하게 된 이유는 아내와 직장동료의 불륜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 날(기노와 아내의 집에 있는 부부 침대에서 아내가 기노의 직장동료와 격렬하게 섹스를 하다 아내가 직장동료 위에 올라 타, 오르가즘을 느끼던 바로 그 때) 집을 나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모가 몸이 좋지 않아 비워둔 찻집을 인수해 바로 바꿔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날 '가미타' 라는 이름의 민머리 사내가 바에 찾아와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회색 고양이 역시 가게를 드나들며 자거나 먹는다. 그러던 어느날 회색 고양이는 보이지 않게되고 가미타라는 사내는 '이곳을 떠나서 어딘가로 계속 이동하라' 며 기노를 채근한다. 아내의 외도, 회사동료의 배신 등 아무것에도 상처입지 않은 듯 살아오던 기노가 결국엔 모든 것들에게서 부터 입은 상처를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는 이야기.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 소설들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 새(1994년 작)', '양을 쫓는 모험(1982년 작)' 등과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고 속시원한 결말 대신 두루뭉술하게 끝맺음을 보여줘서 영 찜찜한 단편소설이다. 극의 흐름이나 배경 등 거의 모든게 느릿하게 흘러가는 터라 좀 더 호흡이 긴 장편 소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감상을 보여주는 작품.






가미타는 말했다. "기노 씨는 제 스스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잘 알아요.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지.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도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런 공백을 샛길처럼 이용하는 자도 있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기노는 이해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가미타 씨 말은, 내가 뭔가 옳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가요? 이 가게에, 혹은 나 자신에."

여자 없는 남자들: 기노 255p~256p










사랑하는 잠자



이 소설은 위대한 작가, '프란츠 카프카' 의 '변신'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어느날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는 잠자의 몸으로 깨어난다. 아마도 카프카의 소설, '변신' 에서 잠자와 몸이 뒤바뀐 '벌레'가 잠자의 몸에 들어간 상황을 그린 소설같다. 잠자가 벌레로 바뀌었으니 벌레가 잠자로 바뀐 고딴 설정. 비참하게 죽어간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대신 잠자의 몸에 들어온 벌레는 자신이 무엇이지 모르고 함께 생활하던 가족들이 어디에 갔는지 모른다(원작 '변신' 에선 벌레가 된 잠자가 죽자, 가족들 모두 안심하며 교외로 소풍을 나갔다). 대신 밖에선 전쟁이 시작되었고 잠자의 방에 걸어둘 자물쇠를 고치러 젊은 곱추 여인이 오빠와 아빠대신 잠자를 찾아온다. 그녀의 몸을 보고 발기하는 잠자는 여자 자물쇠 수리공과 썸을 타기도 하면서 인간의 몸에 대해 여러 학습을 한다는 이야기. 참으로 카프카를 흠모하는 하루키스러운 문체들과 상황들의 나열같지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곱추 여성에게 단단하게 발기하는 잠자를 표현하면서, '벌레가 어느날 갑자기 인간의 몸에 들어와, 인간의 의식을 갖게되면 저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하루키가 변태스럽다는 명제는 늘 맞는 말이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잠자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가씨는 천천히 고개를 꺾어 잠자의 얼굴을 미심쩍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당신,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네,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렇게 고추를 불뚝 세우고?"

잠자는 그 불룩한 것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이건 내 마음과 관계없는 일 같아요. 이건 아마도 심장의 문제일 거예요."

"와우!" 아가씨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심.장.의. 문.제. 라. 그거 꽤 재미있는 의견이네요. 그런 소린 처음 들어봤어."

여자 없는 남자들: 사랑하는 잠자 305p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의 타이틀이 된 작품이다. '엠'이라는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 주인공이 그녀의 남편에게 엠이 자살했다는 통보를 한 밤중 한시가 넘어 전화로 듣는 것 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엠을 그리워하며 세상에 남겨진 그녀의 남편과 자신을 빗대어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다. 하루키가 소설 속에 심어놓은 BGM들을 찾아 듣는 재미도 있는 소설이고 여자가 없으면 살아가는데에 이유 따윈 없다고 늘 이야기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성론과 여성예찬, 그리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 역시 상당부분 인정하는 부분이다. 친구 한 녀석은 '여자 없으면 못 살것 같이 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분명 결혼이나 동거를 했던 적은 없었기에 여자가 없어도 그녀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 나 혼자만의 시간은 그럭저럭 살아갈만 하다. 하지만 여자가 없는 삶을 현재 7개월 째 살고 있으니 확실히 예전처럼 여자를 만날 기회나 건수(?) 같은게 나이를 먹고 확 줄어든 느낌이다. 나도 하루키가 이 단편집 속에서 누누이 얘기한 것 처럼 섹스 보다는 매력적인 여자와 나누는 대화나 교감 따위로 생을 이어온 느낌이라서 현재의 나는 나의 자아로만 꽉꽉 채워져 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없으니 삶의 의욕까지 없지는 않지만 확실히 뭔가 재미가 있지는 않다. 여자 없는 남자들 소설은 주인공 혼자 독백하는 느낌의 짧고 굵은 소설이지만 열네 살의, 따뜻한 서풍이 불때마다 발기하던 그 열정을 나 역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전 세계의 약아빠진 뱃사람들이 내 기척을 눈치채고 나만의 여인을 어디론가 잽싸게 빼돌려, 나 역시 이 지리멸렬한 싱글라이프를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 빼앗겨버리는 것. 저멀리 선원들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노랫소리를 듣는 것. 암모나이트와 실러캔스와 함께 캄캄한 바다 밑에 가라앉는 것. 한밤중 한시가 넘어 누군가의 집에 전화를 거는 것. 한밤중 한시가 넘어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 지와 무지 사이의 임의의 중간지점에서 낯선 상대와 만날 약속을 하는 것. 타이어의 공기압을 측정하며 메마른 길바닥에 눈물을 떨구는 것.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 329p~330p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잘 알다시피) 그녀를 데려가는 것은 간교함에 도가 튼 선원들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여자들을 꼬여내, 마르세유인지 상아해안인지 하는 곳으로 잽싸게 데려간다. 그런때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혹 그녀들은 선원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그런 때도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선원들조차 손쓸 도리가 없다.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 330p~331p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우리는 또한 퍼시 페이스와 프랑시스 레와 101스트링스를 잃는다. 암모나이트와 실러캔스를 잃는다. 물론 그녀의 차밍한 등도 잃고 말았다. 나는 헨리 맨시니가 지휘하는 <Moon River>를 들으며, 그 소프트한 삼박자에 맞춰 엠의 등을 손바닥으로 마냥 쓰다듬곤 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 335p~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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