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족같이 모십니다
아버지는 나를 낳고 엄마랑 같이 살기 싫어서 혼자 4개월 동안 도망을 갔었다고 한다.
중매로 맺어져 가족의 연을 맺은 사람들의 한계였을까. 그래서 내 생일이 원래 5월 5일인데, 주민등록증상 생일은 4개월 뒤인 9월 5일로 등록했다고 들었다.
그당시엔 법적 보호자가 없으면 출생신고를 못했었다나 어쨌다나.
어린시절 어렴풋이 나는 첫 기억은 술냄새 가득한 한 남자의 행패였다.
맞는 쪽은 항상 우리 엄마였고 아버지는 가재도구고 이불이고 다 집어던지며 엄마를 때리곤 했던게 아직도 머릿속에 훤하다.
위 사진이 아주 애기 때 찍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다.
워낙 형편이 좋지 않았으니 사진기나 카메라가 집에 있을리 만무.
아마 있었어도 아버지가 술먹고 집어 던져서 부숴졌었겠지.
당신이 술을 매우 애정하신 덕분에 영문도 모른채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자마자 전학을 세 번 정도 다녔다.
술과 함께한 인생이라 수입이 일정치 않으니 집에 돈이 없어 가난이 늘 따라다녀 수시로 이사를 해야했음.
첫 입학했던 계산초등학교에 1학년 하고 2학년 초만 다니고 2학년 2학기 때는 동부초등학교로 갔다.
동부에서 3학년까지만 다니다 4학년 두 학기를 만수초로 옮겨서 다녔고, 5학년과 6학년은 인수초등학교에 다니며 졸업했다.
덕분에 나는 유년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전무하고, 그나마 인수초에서 만난 친구 하나만 현재까지 연락이 닿는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두 분은 당시 친척들에게 돈 깨나 빌리고 사셨을 듯.
용접공이라는 단가 높은 일을 정식으로 하셨음에도 나를 낳느라 살이 찐 엄마가 싫다며 술집을 전전하셨었고, 월급날이 되면 주머니에 동전 소리가 들릴 때 까지 술집에서 탕진하고나서야 기어들어왔었다고 외할머니께 들었다.
덕분에 엄마는 살면서 아빠에게 거의 생활비라는 걸 받지 못했었다고 함.
그런 삶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와 심지어 대학까지 진학했었던 나다.
없는 살림에도 한계라는게 있어서 아무리 엄마가 식당일과 모텔 청소, 그리고 공장에 다녔다쳐도 빠듯했을 듯.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툭하면 아버지가 술에 취해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폭행 합의금을 여러번 대주던 어머니셨다.
나팔바지를 즐겨입던 여성의 출판 공장을 다니며 키우던 꿈은 중매 한 번으로 산산조각 나, 20여년 넘게 불행 속에서 살았다.
동네 파출소 경찰이 내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집같지 않은 집에 살면서 어머니에게 한가지 배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해학과 함께 살면 이런 가정에서도 그럭저럭 살아진다.
그녀가 빠져나온 지옥같은 나날들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 승낙만 있으면 이혼도장을 찍겠다던 그 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20여년 동안 왜 이혼하지 않았냐고 나는 반겼지만, 엄마는 ‘애비없는 자식 소리 듣게 하기 싫어서’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꾹꾹참았다고 한다.
그 후로 다른 분을 만나셔서 지금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잘 사신다.
나도 못가본 미국도 가보시고 툭하면 전국일주를 할 정도로 생활력 좋은 아저씨랑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함.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근 8년 동안 아빠와는 연락이 두절됐었다.
오랜만에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와 한동안 같이 살기도 했지만 여전히 술만 들어가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라에서 지원받는 LH 전세보증금을 빼내어 500만원을 일주일에 탕진하질 않나, 툭하면 술집 작부에게 현금영수증도 안해주는 돈을 인출해 가슴팍에 꽂아주질 않나 그야말로 대단했다.
500만원을 일주일 동안 써제끼신 날, 나는 그대로 다시 혼자 살기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그 사이사이 전기세나 수도가 끊기면 내가 내주고, 필요한 가전이 있으면 사다드리곤 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니 생활비를 달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전화를 하길래 엄마와 상의 후 기초생활수급자로 레벨업 시켜드리기도 했음.
우리 엄마만 빼고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불쌍한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술주정뱅이 여자와 혼인신고가 되어있던 걸, 내가 한여름에 땀 질질 흘리며 팔자에도 없는 가정법원을 네 번이나 들락거리며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어드렸다.
요양보호사도 신청해 하루에 2~3시간씩 아주머님이 방문해 밥도 차려드리고 청소도 해주시고 생존신고도 해주셔서 내가 매우 편했다.
나라에서 꽁돈이 나오니 나에게 돈을 달라진 않으셨지만, 그 뒤로 몇 년 뒤 뇌졸중이 와 몸져 누우심.
다행히 바로 병원에 가서 더이상 진전도 발병도 없지만 이제 슬슬 보내드릴 준비를 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월 70만원 정도 나오는 돈은 늘 부족하셔서 가끔 나에게 손을 벌리실 때도 있었는데 응당 현찰로 드리곤 했다.
오늘도 에어컨 수리비가 30만원 나와서 돈 좀 달라시길래 인출 후 만나기로 함.
택시에서 전화로 왜 도착하지 않았냐고 하시길래 아직 가는 중이고 집에서 좀 떨어진 도로가로 나오시라고 말씀드렸다.
연세가 많으셔서 전화를 자주 못 끊으시거나 잘못 눌려 나에게 전화올 때가 자주 있었는데, 오늘도 안 끊긴줄 모르고 ‘쌍노무 새끼 그럼 처음부터...’ 라는 욕설이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만나서 왜 그랬냐고 여쭤보니 그런적 없다고 시전.
(애초에 도로가인 버스 정류장 인근에서 뵙자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다)
방금 전 일 아니냐고 왜 거짓말 하냐고 되물으니 드러워서 안 받는다고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냥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여전히 화를 팔팔하게 잘 내시는 걸 보니 아직 오래 사시겠구나 싶었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전화로 ‘죽는 한이 있어도 니 돈은 안 받는다’, ‘아들 없는셈 치겠다’ 등등 온갖 막말을 하시는 걸 보고 역시 아직 정정하시구나 싶었다.
우리 아버지 덕분에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남의집에 찾아갈 때 음료수 한 개라도 사가는 인간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 덕분에 나는 재산의 귀중함과 긍정의 힘을 배웠다.
아 정말 얼마나 감사한 분들인지.
#부모님 #감사합니다 #유년기의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