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을 땐 두려울게 없었... 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컸다. 머리 말고 키가. 그래서 국민학생 때 반에서 번호를 지정하면 항상 끝번호가 나였다. 언제나 교실 맨 뒷자리가 내 전담 자리였고 1주일에 한 번씩 분단을 이동할 때에도 항상 맨 뒤 책상을 고수했기 때문에 가끔 담임 선생님께서 청소를 확인하실 때면 늘 지저분해 보이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내 뒤의 교실 뒷부분까지 다 내 자리처럼 보였으니까.
국민학교 5학년 때 브라질에서 전학 온 친구를 아직도 기억한다. 나도 전학생 신분이었지만 그 녀석은 2학기가 시작되면서 전학을 와서, 아이들에게 특히 관심을 더 받게 됐다. 한국어가 조금 서툰 친구라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은근히 무시하는 게 있었고 그 친구에게 매일같이 브라질어로 한국어 욕을 주문했다. 나중에 가서는 참다못한 내가 그만 좀 놀리라며 그 친구를 두둔했었는데 지금 그랬다면 아마 나까지 놀림을 당하며 따돌렸겠지.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어릴 때부터 한 덩치 하던 나라서 애들이 그 브라질 친구를 그만 놀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 브라질 혼혈은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진작에 돌아가셨나 해서 그 녀석의 어머니께서 두 아들을 키우는 집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와 브라질은 엄청 친해지게 되었다. 키도 거의 비슷했고 집도 인근이라 자주 서로의 집에 놀러 가서 숙제를 하거나 방과 후 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놀았다.
그리고 6학년 때 역시 같은 반이 되었고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 역시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좋은 분이셔서 브라질은 더 이상의 놀림은 당하지 않게 됐다. 다른 반에서 오게 된 친구들은 브라질 친구가 브라질에서 온 것 자체를 모르게 된 거지. 이윽고 신학기 때맞춰서 서울에 있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온 녀석이 전학을 왔다. 그 서울 친구 역시 키가 커서 우리는 교실 맨 뒤에 나와 서울이 앉게 되었고 브라질은 우리 앞에 앉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 당시 한 반의 남녀 비율은 50:50에서 여자가 늘 조금씩 모자랐었다.
하지만 서울은 브라질과 나와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었다. 시험을 보면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서울대를 간다는 목표까지 국민학교 4학년 때 이미 세워놓았던 녀석이었다. 그래도 우리 셋은 큰 키와 같은 가수(서태지와 아이들)를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셋의 집이 다 인근에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언제나 어울리며 다녔다. 시험 기간엔 서울의 집에 가서 공부를 했고 방과 후나 주말이면 늘 셋이서 농구를 하며 놀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반 내 장기자랑 시간엔 여지없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으로 춤을 췄었고 수학여행이나 봄 소풍으로 간 곳에서는 서로를 놀리며 단체사진을 찍는 게 낙이었다. 졸업 앨범을 뒤져보면 아직도 서울이나 브라질, 그리고 내 머리 위에 셋 중 한 명이 셋 중 한 명에게 브이 자로 올린 손가락 사진이 남아있다.
한 번은 여름 방학 즈음에 종로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가, 그 안에 적혀있는 글귀들을 받아써오는 숙제 같은 게 있었는데 셋이 종로 한복판을 걸어가다 깡패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서울과 나는 눈치를 채고 후다닥 도망쳤지만 브라질은 그대로 깡패에게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나와 서울은 부리나케 근처의 파출소를 찾아, 친구가 깡패에게 끌려갔다며 경찰 아저씨들 둘을 데리고 찢어진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브라질은 깡패와 함께 사라진 뒤였다. 나와 서울은 거의 울다시피 경찰 아저씨들에게 더 찾아봐달라고 애원했지만 자신들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며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도 숙제를 위해서였지만 살면서 처음 가본 서울이라 이대로 돌아가긴 아쉽기도 해서 종로에 있는 무슨 공원 인가로 들어갔는데 브라질이 거기에 있었다. 깡패한테 맞거나 돈을 빼앗기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의외로 브라질 역시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쳤다고 했다. 근데 왜 집으로 돌아가거나 경찰서에 가지 않았냐고 물으니 브라질도 서울에 처음 나온 거라, 아까워서 숙제나 해갈 겸 공원으로 왔다고 한다. 그 당시엔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참 웃기다며 한참을 배꼽을 잡고 웃으며 공원 숙제를 마쳤던 기억이다.
그 뒤로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고 소위 '뺑뺑이'로 돌려진 학교 지정에 나와 서울은 같은 중학교로, 브라질은 아예 멀리 있는 중학교로 배정받아, 브라질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서울과 나는 중학교에 가서도 잘 어울리고 농구를 하며 지냈지만 브라질은 어쩌다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에 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그 시절엔 삐삐가 유행이었어서, 연락은 꾸준히 하고 지냈다. 가끔 브라질이 주선한 3대 3 미팅도 나가곤 했었는데 예전부터 예쁘장하게 생긴 생김새로 여자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었던 게 기억난다. 지금 기억해 보니 서울과 나는 거의 들러리 수준.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세 사람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브라질의 소식은 어딘가로 이사를 갔다는 게 마지막이었고 서울 역시 나와는 다른, 멀리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서울은 원하는 대로 서울대로 진학을 했으며 브라질은 지금까지 다시 본 적이 없다. 예전에 살던 만수동을 지나가다 우연히 서울을 만났던 게 다시 연락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법 공부를 하다 늦게 들어간 군 입대 전, 군 대제 후, 그리고 어쩌다 가끔, 그리고 최근엔 결혼식까지 다녀왔다. 서울의 어머니께서 어릴 때 나랑 놀지 말라고 그렇게 서울을 달달 볶으셨는데 결혼식 때 내 얼굴을 기억하시는 걸 보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아주 우연히 알게 된 거지만 브라질은 배우가 되어있었다. 지금도 인터넷에 브라질의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긴 하는데 거의 단역 수준의 역할만 맡아서(최근작이 인랑과 광대들-풍문 조작단이다) 소속사를 잘못 만난 건지 참 지지리도 안 뜬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친구의 의리로 브라질이 나왔다고 하는 필모그래피의 영화나 드라마는 거의 다 챙겨 봤다.
지금도 머릿속에 뿌옇게 남아있는 서울과 브라질과의 기억들이 새록새록하다. 그때는 무서울 게 없었다기보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먹고 사느라, 결혼해서, 1년에 한두 번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브라질은 아마 우리를 까맣게 잊은 듯). 원체 쓸데없는 걸 잘 기억하는 나의 성향이라 자질구레한 추억들을 잘 기억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서울과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대학생 때에도 찾아가곤 했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들께서도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브라질과 서울은 기억을 하실 정도.
유난히 친구가 적은 편이라서 가끔씩 오래 보는 서울이나 중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그리고 사회에서 회사나 모임으로 알게 된 친구들을 다 모아도 스무 명이 될까 말까 하다. 기본적인 마인드가 나이로 따져대는 수직 구조보다는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선호해서 우연히 알게 된 동생, 형, 누나들도 몇 명 있긴 하지만 가끔 결혼식에 와 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그냥 스몰 웨딩으로 해야 될 것 같다는 결론이 난다.
대한민국은 인맥이 생명이라는데 인맥 관리를 위해 누군가를 억지로 만나고 모임에 참석하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해서, 나이가 드니 외로움은 어느 정도 곁에 품고 가야 하는 게 습관처럼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