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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Nov 08. 2019

음악은 나의 힘

신보의 비닐을 뜯는 설렘.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유전적인 힘이 크다. 생김새부터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닮아서, 외가 쪽의 유전자가 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듯하다. 특히 어머니의 형제분들 6남매 중 가장 막내 위치에 계신 외삼촌의 취향을 조카들 중에 내가 가장 많이 닮았다. 참고로 외삼촌께서는 현재도 취미로 계속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신다.


아주아주 어릴 때, 어머니께서 사주셨던 최양락 아저씨의 동요 모음집이 생각난다. 심형래 아저씨가 불렀던 캐럴송은 무려 LP로 소장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슈퍼 홍길동 극장판 2편(임하룡 아저씨가 꽁초 도사로 나왔던)의 사운드 트랙 역시 가지고 있던 게 기억이 난다(물론 최양락 아저씨와 슈퍼 홍길동 모두 테이프였다).


그 뒤로 국민학교 4학년 때 특종 TV 연예에서 데뷔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을 사달라고 아버지께 졸랐고, 레코드점과 길거리 불법 복제 음반의 차이가 별로 없던 그 시절, 아버지께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앨범의 2,000원짜리 복사 테이프를 사다 주셨다. 가사지도 없던 그 가짜 음반을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들었다. 어쩐 일인지 우리 집엔 테이프가 두 개 들어가는 2 데크의 최신형 오디오(최상단에 턴테이블까지 있던)가 있었고, 그 오디오는 알게 모르게 부모님들께서도 평소 음악을 좋아하셨던 반증이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앨범 속지도 제대로 들어있지 않은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앨범을, 가사를 받아써가면서 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대한민국 가요계는 극한의 황금기에 접어들었고 여러 가수들이 앞다투어 데뷔를 했던 시절이었다. 잼, 노이즈, 듀스, 룰라, 패닉 등 이전에 활동하던 신승훈, 김건모와 더불어 다 함께 전설을 써 내려가던 1990년대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음악들을 테이프 하나에 다 몰아넣고 듣고 싶어서, 소위 믹스테이프(주로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가 다른 뮤지션이 만든 비트 위에 자신의 이전 곡이나 새 랩을 얹어서 거의 무료로 배포하는 행위)처럼, 아니면 가요 톱 10처럼 만들어서 듣고 다녔다. 학교를 마치면 그 테이프를 만드는 게 주 업무였고 본격적으로 CD를 사기 전인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그런 모음집 테이프를 만들어서 들었다. 이게 다 집에 테이프가 두 개를 동시에 돌릴 수 있는 오디오 덕분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나의 그런 열정을 이해하셨는지 1995년 겨울, 아람단에서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가기 전날 중국 제의 이름도 없는 휴대용 카세트를 선물로 사주셨다. 그 카세트를 말 그대로 고장 날 때까지 들었다. 너무 자주, 많이 사용해서 금세 고장이 났던 그 중국제 휴대용 카세트 이후에 어머니께서는 큰 맘먹고 삼성이나 엘지의 휴대용 카세트를 사주시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학교를 가는 길이 너무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나의 책가방 속엔 덜그럭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프를 잔뜩 넣고 다녔는데 A 면이 끝나면 자동으로 B 면으로 넘어가는 오토리버스 지원이 되던 삼성과 엘지의 카세트는 나에게 그야말로 신기원이었다. 평생 테이프만 듣고 다닐 것 같았던 나도,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레 CD로 눈을 돌리게 된다. 언타이틀 4집 앨범을 CD로 사면서 그 뒤로 지금까지 CD에만 집중하게 됐다. 기존의 테이프식 음반에 비하면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났어서, 테이프만큼은 많이 구입하지 못했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 급식이 도입되면서 밥 대신 CD를 사서 듣고 다닌 덕분에 배는 조금 고팠어도 음악적 포만감은 언제나 충만했다(음반을 사고 남은 급식비로 빵이나 컵라면을 사 먹곤 했다). 학교를 마치면 항상 레코드점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새 앨범이 나왔는지 체크하는 게 일과였던 시절이었다(하교-서점-레코드점이 내 하교 루트였다).


그렇게 초-중-고 시절을 음악과 함께 보냈다(가끔 만화도 봤지). 밖에서는 늘 귀에서 떨어지지 않던 이어폰과, 집에서는 품위 있게(?) 헤드폰으로 양질의 음악을 들었던 그때는 매일이 즐거웠고 항상 신이 나 있었다. 지금도 느린 발라드는 잘 안 듣는 편인데 기본적으로 빠르고 신나는 비트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군대를 제대하면서 남들과 조금은 다른 가정사를 겪으며 무난한 날들보다는 힘든 날이 태반이었다. 그 시절들을 버티게 해 준 게 바로 음악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민거리들과 상황이 내 앞에 있어도 음악만 들으면 거의 마취제를 맞듯,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곤 했다. 사춘기 시절은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슬픈 아픔'과 자우림 2.5집의 '알아'로 버텨냈고 심지어 부모님들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출을 결심했을 중학교 시절에도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COME BACK HOME'을 들으며 단념했다. 그만큼 음악은 나에게 일상의 한 부분이었고 삶의 이유였으며 힘든 인생을 버티게 해주는 희망이었다. 가끔 내 인생이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면 눈물을 쏟으며 위로가 되고 에너지가 필요할 때 힘이 넘치는 음악을 들으면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도 여건이 되는 한, 음반은 계속해서 구입하고 듣고 있다. 그 당시에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들은 다들 음악 활동을 하지 않고 있거나 해체-은퇴를 한 뒤라 거의 예전 음악들만 듣는 실정이지만 그래도 가끔 가뭄에 콩이 나듯 생존신고처럼 음반을 내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외국 뮤지션들은 국내 가수들보다 앨범을 내는 텀이 훨씬 더 길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나도 저런 가수가 되어야지'라고 꿈을 꾸었었는데 현재는 취미로만 작곡을 가끔 하고 있다. 어쩌다 한 번쯤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면 '아 정말 노래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항상 들어서.



아마도 영원히 새 음반의 비닐을 뜯는 즐거움을 놓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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