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군 Nov 08. 2019

만화

손에 만화책을 들고 있는 재미.

만화 단행본이 한 권에 1,800원이었던 시절을 기억한다(주간지는 1,500원). 국민학교 때까지는 만화에 관심도 없었고 막상 보더라도 그렇게 빠지지 않았었는데 국민학교 5학년에서 6학년 사이에 급속도로 빠져들었었다.


우리 집이 인천 만수동의 대토 단지라는 곳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때였다. 동네 친한 형이 한 명 있었는데 그 형네 부모님도 형이 만화책을 사는 걸 그렇게 싫어하셨다고 한다(우리 부모님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형이 한 번 사서 읽은 책을 자신의 방 창문 밖으로 버리곤 했었는데 그걸 우리가 주워서 읽었던 기억이다. 그 형은 단행본 파는 아니어서 거의 만화 주간지 위주로만 구입-폐기했었는데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를 그때 엄청나게 읽었다. 땅이 처박혀 흙이 묻은 만화 주간지를 친구들과 돌아가며 읽었고 비가 오는 날이나 그다음 날이면 당연하게도 만화 주간지를 읽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문자 그대로 '거지' 같은 만화 비렁뱅이 녀석들이었지만 그게 나와 만화의 첫 만남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용돈이 차츰 생겨나면서부터 용돈만 생기면 만화책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한 달에 5천 원인가 만 원도 안 되는 돈을 아끼고 아껴서 신간 단행본이나 만화 주간지를 사서 읽었다. 1990년대 소년 주간 만화의 양대 산맥이었던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의 주간지 발행일은 매주 화요일이었고 단행본은 만화 주간지가 광고하는 발간 일에 거의 비슷하게 발행되었다. 국사 시간에 한창 일본의 침략에 대해 배우던 때라, 남들이 다 읽던 슬램덩크, 드래곤볼 따위는 절대로 사서 읽지 않았다. 오직 한국 만화가들의 만화들만 골라서 읽었었는데 마이 러브, 8 용신 전설, 미스터 부,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뱀프 1/2, 다이어트 고고, 크래쉬, 굿모닝 티쳐, 소마 신화전기 등 현재는 전설을 넘어 레전드로 남아있는 국내 작가들의 주옥같은 만화들을 읽으며 대한민국 만화의 황금기를 같이 보냈던 기억이다. 지금이야 집에 있는 책장에 한국 만화보다는 일본 만화가 더 많은 지경이 됐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만화가들은 독자들과의 어떤 끈끈한 그런 게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좋아하는 만화가에게 팬레터를 쓴다든지 아이큐 점프나 소년 챔프에서 실시하는 독자 응모 이벤트에 투고하여 상품을 받는다든지 하던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혜성처럼 등장한 소년 챔프의 약진으로, 그 당시 '한국 청소년 만화'의 버팀목이었던 서울 문화사의 아이큐 점프가, 인기도 시들어가고 재미있는 작품도 챔프에 비해서 별로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독자 엽서 앞-뒤에 '챔프한테 지지 말고 점프도 열심히 신진 작가들을 발굴해 내라'라는 식의 글들을 빼곡히 적어서 보낸 적도 있다. 틈만 나면 유명한 만화 캐릭터들을 비슷하고 웃기게 그려서 주인공 얼굴 대신 같은 반 친구의 얼굴을 그려 넣고 놀려대기 일쑤였고 각종 패러디 그림들을 그리며 지냈다. 하굣길엔 당연히 신간 단행본이 나온 게 없나 궁금해서 집 근처 서점을 찍고 집에 돌아오는 코스를 매일같이 돌았다.


국민학생 때엔 완강하게 만화책 읽는 걸 반대하시던 어머니께서도 뭔가에 심취하는 내 모습이 신기하셨는지 중학생 때부터는 그냥 내버려 두셨다. 가끔 집 청소를 할 때 '이것들 다 읽었으면 내버린다'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군 입대할 때까지 수백 권 되는 만화책들을 모두 지켜냈던 기억이다(제대하면서 몽땅 사라져 버렸지만).


요즘엔 중고 만화 시장이 꽤나 좋아져서 예전에 잃어버렸던 그 옛날 만화들을 기회가 되면 다시 수집하곤 한다. 알라딘이나 예스 24, 혹은 중고나라에 올라와 있는 옛날 한국 만화들을 보면 잃어버렸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느낌까지 들어,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구하기 힘든 판본이나 상태가 좋은 중고 만화들은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내가 청소년기에 즐겨 읽던 만화책들은 거의 비인기 만화들이 많았어서, 그나마 좀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라기보다는 요즘에도 매물이 거의 없는 만화들이 대부분이지만).



중학생 시절에 만화를 보면서 따라 그리던 실력을 꾸준히 키웠으면 현재 만화로 밥을 먹고살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학생 때 취미로 싸구려 와콤 태블릿을 사용해 그린 만화들을 볼 때면 '만화가 안 하길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요즘의 한국 만화가들은 거의 웹툰으로 돌아선 시대라, 대부분 컴퓨터 작업으로 입이 떡 벌어지는 효과를 보여주며 오색 찬란한 색감으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만화가들이 넘쳐나서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일본 만화나 한국 웹툰이나 불법 스캔 사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추세라, 만화를 돈 주고 소비하는 사람들, 특히 만화책을 집에 쟁여두고 읽는 사람들은 주위에서도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 만화란, 자고로 책을 손에 쥐고 한 페이지씩 넘겨가며 읽는 그 맛이 최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