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군 Sep 28. 2016

신 [제 1부 : 우리는 신]

베르나르 베르베르

만약 우주에 우리밖에 없다면?
어느 날 문득 이런 기이한 가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만약 우주에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우리밖에 없다면?> 우리중에서 가장 의심이 많은 사람들조차 막연하게나마 외계의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그래서 지구의 지적 생명체인 우리 인류가 실패를 한다 해도 다른 지적 생명체들이 성공할 것이므로 우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만약 우리밖에 없다면? 정말 우리밖에 없다면? 만약 무한한 우주 공간에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오로지 우리뿐이라면? 만약 우주의 모든 행성이 우리가 태양계에서 관찰 할 수 있는 행성들처럼 유독 가스를 내뿜는 마그마나 암석 덩어리로 되어 있고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서 생물이 살 수 없다면? 만약 지구의 경험은 우연의 일치가 겹치고 또 겹쳐서 일어난 너무나 특이한 현상이었을 뿐 다른 곳에서는 도저희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라면? 만약 지구에 인류와 같은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면? 이런 가정들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 행성을 파괴한다면(이제 핵무기나 오염 등으로 해서 그럴 위험성이 생겼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게임 오버>가 되고 말리라는 얘기다.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가능성을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오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것보다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를 얼마나 아찔하게 만드는 생각인가! 또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가정인가! <우주에는 아마도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실패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보다 오래되고 이보다 우리를 불안케 하는 메시지가 또 있을까?

(중략)

하지만 수호천사로서 인간을 돕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지도 천사였던 에드몽 웰즈는 이따금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행복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불행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

(중략)

거울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상(像)을 찾는다. 처음에는 부모의 시선에서, 그다음에는 친구들의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그러다가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을 비춰 줄 하나뿐인 거울을 찾아 나선다. 다시말하면, 사랑을 찾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좋은 거울>의 발견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자신의 만족스러운 상을 비춰 주는 거울을 찾아냈을 때 흔히 첫눈에 반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의 시선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평행한 두 거울이 서로에게 기분 좋은 상을 비춰 주는 마법의 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거울 두 개를 마주 보게 놓으면 거울 속에 거울이 비치면서 같은 이미지가 무수히 생겨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듯이 <좋은 거울>을 찾아내면 우리는 다수의 존재로 바뀌고 우리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린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강하고 영원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두 거울은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다. 두 연인은 자라고 성숙하고 진보한다. 그들은 처음에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동안 서로 나란한 길을 따라 나아간다 해도, 두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속도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두 사람이 상대의 시선에서 언제나 똑같은 자신의 상을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면 결별이 찾아온다. 나를 비춰 주던 거울이 내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건 사랑 이야기의 종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의 시선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중략)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설령 전자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들, 자기가 원자라고 하는 훨씬 방대한 집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까? 원자는 자기가 분자라고 하는 더 커다란 집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분자는 자기가 예컨대 치아라는 훨씬 거대한 집합에 같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또 치아는 자기가 인간의 입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한낱 전자 주제에 자기가 인체의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을까? 누가 나에게 자기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같다.「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데, 나는 분자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다.」 또 누가 나에게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면, 그건 마치 이렇게 단언하는 것과 같다. 「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높은 차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만약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 전체가 그들의 상상력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만약 전자가 원자, 분자, 치아, 인간의 차원에 같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도 행성, 태양계, 우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나아가서 우주 역시 현재로서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훨씬 더 큰 어떤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전자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들어 있고, 작은 것 속에 더 작은 것이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우리는 우리를 초월하는 한 세트의 러시아 인형 속에 들어 있다. 이제 감히 말하거니와, 인간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세계보다 높은 차원에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의 무한한 복잡성을 감지하고 아찔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현기증에 맞서 안도감을 얻기 위한 한낱 외관이 아닐까?

(중략)

무슈론은 아연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느냐고 묻는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아마도 각 세대가 앞 세대를 계승하면서 부모에게 당한 것을 아이들에게 앙갚음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에게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지. 영국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이 기억나. 여덟 살짜리 아이들 두 명이 세 살배기 아이를 붙잡아서 심하게 괴롭히다가 죽였어.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말이야.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그런 폭력성이 있어. 그래서 모든 천적을 이긴 것이고, 이제 천적이 없으니까 인간을 상대로 그 전통을 이어 나가는 거야.」

(중략)

인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세 가지 사건
인류는 세차례에 걸쳐 자존심을 상하는 일을 겪었다. 첫 번째 사건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한 일이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기는커녕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으며, 태양 자체는 더 거대한 어떤 체계의 주변에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사건은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들고 나온 일이다. 그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넘어서는 존재이기는커녕 그저 동물들에게서 나온 하나의 동물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 사건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선언이다. 인간은 예술을 창조하고 영토를 정복하고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하고, 철학의 체계를 세우거나 정치 제도를 만들면서, 그 모든 행위가 자아를 초월하는 고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성적인 파트너를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고 있을 뿐이다.

(중략)

침팬지들을 상대로 한 실험
비어 있는 방에 침팬지 다섯 마리를 들여보낸다. 방 한복판에는 사다리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에는 바나나가 놓여 있다. 한 원숭이가 바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먹기 위해 사다리로 기어오른다. 하지만 원숭이가 바나나에 다가가자마자 천장에서 찬물이 분출하여 원숭이를 떨어뜨린다. 다른 원숭이들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바나나를 잡아 보려고 한다. 모두가 찬물을 뒤집어쓰고 결국 바나나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그다음에는 천장에서 찬물이 분출하지 않게 해놓고 물에 젖은 원숭이 한마리를 다른 원숭이로 대체한다. 새 원숭이가 들어오자마자 원래부터 있던 원숭이들은 사다리로 올라가는 것을 말린다. 저희 나름대로 새 원숭이가 찬물을 뒤집어쓰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새 원숭이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다른 원숭이들이 자기가 바나나를 먹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완력을 쓰기로 하고 자기를 제지하려는 원숭이들과 싸운다. 하지만 한 마리 대(對) 네 마리의 싸움이라서 새 원숭이는 뭇매를 맞고 만다. 다시 물에 젖은 원숭이 한 마리를 새 원숭이로 대체한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앞서 교체되어 들어온 원숭이가 덤벼들어 그를 때린다. 그게 새로 들어온 자를 맞이하는 방식이라고 저 나름으로 이해한 것이다. 새 원숭이는 사다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겨를도 없었다. 말하자면 구타 행위는 이미 바나나와 무관해진 셈이다. 물을 뒤집어쓴 나머지 세 원숭이도 차례로 나가고 대신 물에 젖지 않은 원숭이들이 들어온다. 그때마다 새로 들어온 원숭이는 들어오자마자 매질을 당한다. 신고식은 갈수록 난폭해진다. 급기야는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새로 들어온 원숭이에게 뭇매를 놓는다. 여전히 바나나는 사다리 꼭대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다섯 마리 원숭이는 바나나를 잡으려다 물을 뒤집어 쓴 적도 없으면서 그것에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뭇매를 맞을 새 원숭이가 어서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문을 살피는 것이다.
이 실험은 한 기업에서 나타나는 집단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9년에 걸친 역작이라고 소개 되어 있는 책 날개의 글을 보고, 
나름 그도 치밀하게 이 책을 위해 준비단계를 거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그릇된 작가라고 여기는, 
아니면 그를 아예 작가의 범주에 놓지 않고 보는 국내 독자들의 시선도 어느정도 이해는 한다만 
한국이나 프랑스(베르나르의 자국)나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걸 보면 참담한 평가들은 흥행력과 반비례하는 듯.

어쨌든 이 책에선 그의 전작들에 나왔던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작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스쳐가는 인물들도 많고 설명도 다시 해주니 친절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총 3부작으로 된 '신'을 1부도 두권으로 쪼개서 발매하는걸 보면 그닥 친절하지만은 않는 듯.

각설하고,
책의 주요 내용은 신이 되기위해 신의 수업(!)을 받는 일종의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신의 후보생들에 관한 이야기. 
그 기본 플롯에 살인사건과 주인공 본인의 사이드 스토리, 그리고 여지없이 들어가 있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또, 각종 신화들을 베르나르 마음대로 섞어놓은 '신화'들이 한대 엉켜, 
약간은 산만하지만 그래도 집중도가 꽤 높은게 매력인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집필했던, 그의 모든 소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해 준다. 
내가 워낙 신화 이야기를 몰라서 그런지 종종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나 스토리가 나오면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하지만 맘잡고 신화집등을 읽어야 한다면 어느것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덮어 둘 듯. 
이렇게 대놓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야기가 첨가 되어 있는 신화들을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이미 완간이 되어있는 책을 3부작으로 발매하는것 자체가 좀 마음에 안든다(게다가 위에서 얘기했지만 1부가 두권 -.-). 
차라리 프랑스와 텀을 더 두고 한번에 발매 하던지...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조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