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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루트 바디

박민규 외

by 노군

박민규 - 굿모닝, 존 웨인
서진 -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
임태운 - 앱솔루트 바디
송경아 - 우리 사랑 이야기
류형석 -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은림 - 환상진화가
배명훈 - 조개를 읽어요
박애진 - 집사
이준성 - 고래의 꿈
유서하 - 플라스틱 프린세스
박성환 - 꿈의 입자
정희자 - 지구의 아이들에게




천 년 전에는, 아니 그 후에도 인류를 공격한 바이러스들은 자신만의 이름이 있었다. 에볼라, 에이즈, 사스...... 인류에게 조금만 더 관대했다면 BL7도 저명한 이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을 얻지 않았다. 인류에게 자신의 이름을 지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 년 전, 노아스의 <부활>이 있은 바로 그해의 일이다. 발원지도, 캐리어(매개체)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성층권의 어떤 방역위성도 그들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했고, 지구의 운영자 바벨론조차도 그들의 급습을 예견하지 못했다. 대륙 곳곳에서 재앙은 시작되었고 인류에겐 그것을 조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흘 만에 아메리카 대륙의 생명체 절반이 줄어들었다.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감염이 되었고, 잠복기는 고작 두 시간에 불과했다. BL(bio safety level)7은 역사상 최강의 바이러스였다. 감염자들의 뇌는 녹아내렸고, 순식간에 그들의 영혼은 육신을 빠져나갔다. 지옥의 불이 번지는 듯한 확산이었다. 지상의 인류는 전멸했다.


                 -박민규 '굿모닝, 존 웨인'



온몸이 결박된 채 교도소로 후송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를 전자베리어에 집어넣은 한 군인이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군요. 저는 그저 제 굽은 등을 보고 그러는구나 싶어, "꼽추 처음 봅니까?" 하고 비아냥 거리려 그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사람들에게서 익숙히 보아온 '혐오'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그래요, '공포'가 담긴 눈이었죠. 그때서야 저는 연합정부군이 출동한 진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겁니다.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신체 등급제의 울타리를 마음껏 뛰어넘을 수 있는 저의 존재가. 그래서 저를 제거하려 든 것이겠죠?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났을 때 인간이 늘 취했던 파괴본능을 말하는 겁니다. 설마,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임태운 '앱솔루트 바디'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솔직히 인간 유전자 조작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생물에게 정해진 특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유전자의 염기서열이라면, 어떤 특성이 강해지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면 나중에는 특성에 맞춰 유전자가 똑같아지지 않을까? 예쁘고, 잘생기고, 건강하고, 머리 좋고, 2세는 못 낳고, 이런 인간들이 떼거리로 있다면 그 인간들은 같은 종족이라고 봐도 되는 거잖아."

(중략)

"인간과 쥐의 유전자가 다른 부분은 기껏해야 2퍼센트라더라. 그러면 인간끼리 유전자가 다른 부분은 어느 정도겠어? 아주 적겠지. 그 적은 부분 중에서 비슷비슷한 특성을 나타내는 유전자끼리 한데 모여 있다면, 그 유전자들끼리는 가족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손을 댔건 안댔건 무슨 상관이야? 옛날식으로 이야기하면 성형미인이건 아니건 미인은 미인인 거지. 꿩 잡는 게 매고, 쥐 잡는 게 고양이고."


                 -송경아 '우리 사랑 이야기'



"짐을 풀어야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을 한다. 자꾸 말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말하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탓에 걸린 병이다.

(중략)

"연아 그 지지배.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미워죽겠어." 혼자서 중얼거려봤자 화만 더 날 뿐이었다. 두고 봐, 언젠가는 꼭 복수해 줄 테니까. 당했던 대로 그대로 갚아줘야지.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연아는 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크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뽀얀 얼굴과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몸뿐만이 아니라 머리도 몇 배는 좋았다. 돈 많고 잘난 부모님 덕분에 최신 표준형으로 조작을 받고 태어난 연아와, 유전 기사의 실수로 기형으로 태어난 어머니와, 유전형의 오류로 역시 기형이 된 아버지가 멋대로 작당을 해서 최소 옵션으로 태어난 나는 출신성분부터가 달랐다. 출발선부터가 달랐는데 달리기 속도도 차이가 나니 연아보다 두 배, 세 배 노력을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억울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류형석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누군가 '사람은 태어난 때와는 관계없이 제각각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고 했다. 몸은 두고 머릿속만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30세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관념이나 행동 패턴 등은 20세기나 르네상스 시대 사람과 같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중략)

기이하게도 재생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후부터 세상은 어쩐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세상도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이건 과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직발전(있던 것을 계속 더 탐구해 가는 것) 외에 수평발전(아무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것을 연구, 발견하는 것)은 거의 퇴화하다시피 했다. 100년만 더 살았으면 더 굉장한 발전과 번영을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되었던 위대한 사람들도 어쩐지 오리지널이 이룩한 것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선보였지만 오리지널의 변형이나 패러디에 불과할 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고인 물이 되었다.



                 -은림 '환상진화가'



소년이 아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년이 안다고 생각했던 거랑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언제나 달랐다. 소년이 봤다고 생각한 거랑 다른 사람들이 본 것은 언제나 달랐다.

(중략)

언제나 그랬다. 소년은 멍하고, 흐릿하고, 요령부득이었다. 그런 소년을 사람들은 비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년은 결코 세상의 질서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소년에겐 이상했고 소년에게 자연한 게 사람들에겐 이상했다. 그러니 눈 뜨고 있는 것보다는 감는 것이 편했다. 감고 있으면 간혹 이상한 풍경이 펼쳐지고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소년은 차츰 그런 것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선생님과 엄마 아빠, 급우들까지 모두들, 소년을 수상하게, 이상하게, 괴상하게 보고 있었다.

(중략)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소년은 질문했다. 소년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럼 누구 잘못이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한다. 첫 단추부터 세상과 들어맞는 접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세상은 세상대로, 그리고 그들은 그들대로 각각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때문에 해결책은 없다.

(중략)

박사는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은 텅 빈 공허로 번득였다
ㅡ 너는 누구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우리가 던져진 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우리의 삶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던져진 이 세상이 결코 잔혹한 우연에 의해서 진행되는 바보들의 텅 빈 행렬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질서는 이성에 의해서 확보되고 이성은 수식에 의해서 담보된다. 수식에 포착되지 않는 사상(事象)은 무질서하고 따라서 무의미해. 내가 원했던 건 단지 인간도 우주의 거대한 수식에 포함되는 것뿐이었어. 그런데 도대체 넌 누구지?

꿈이에요 말했잖아요 세상은 거대한 꿈이에요 세상은, 우주는, 고정된 것이 아니에요 꿈꾸는 사람들의 모든 꿈이 모인 것이에요 나는 수많은 세계들을 보았어요 사람들이 자신들을 옭아매는 꿈밖에 꾸지 못한 세계들도...... 그리고 어느 날인가 이런 꿈을 꾸었어요 사람들에게 다른 꿈을 보여주자 다른 꿈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자 세상은, 삶은, 다만 꿈이고 우리가 우리의 꿈을 꾸기에 달렸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러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럼으로써 우주가 행복해지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소녀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식당 벽 한켠에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는 초록빛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회색 하늘 아래 맑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ㅡ 안녕.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문으로 걸어가며 인사했다.

ㅡ 안녕. 잊지 마세요. 다른 꿈을 꾸면 다른 세상이, 다른 삶이 열려요.

그리고 소년과 함께 문 너머로 사라졌다 소년과 소녀가 들어가자 문은 조용히 닫혔다. 박사 혼자 남았다. 박사는 조용히 일어섰다.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감찰들이 도착할 때까지 박사는 묵묵히 연구소 식당 벽 한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박성환 '꿈의 입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시커먼 원통이었다. 그와 비슷한 키의 원통. 바퀴는 아주 작고 소리가 나지 않았기에 움직이는 자체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외계인의 모습이 고작 움직이는 검은 원기둥 형태라는 건 어린아이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열 개의 촉수도 금가루도 열두 개의 눈도 없는 금속 덩어리는 주위의 풍광을 몸에 수놓으며 풀밭을 마치 얼음판 위를 미끄러져 이동하듯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열린 문에서 하나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케촉은 얼른 스케치북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투박하게 그린 원통 따위는 벌써 잊어 버렸다. 벌써 비행접시 안에서의 모습만으로 그가 머리와 팔다리를 지닌 직립형 생물이란 걸 확실 히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진짜 외계인이 등장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놀라움과 호기심을 억누르고 오직 외계인의 모습만을 정확히 담으려고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준다. 그렇지만 그 인물이 푸른 하늘 아래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었을 때, 어른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나 허둥대었다. 그리고 아이는 멍하니 있었다. 사실 그의 모습을 열심히 그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하얗고 몸에 착 붙는 옷을 입고 있었을 뿐, 두 쌍의 눈과 팔다리, 전신을 감싼 은빛이 감도는 푸른 털, 튀어나온 입과 몇 가닥의 수염, 부드러운 꼬리........... 어디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았다. 그는 지구인들과 완전히 똑같은 외모였다.

(중략)

그 속에서 충격적인 진실이 스스로를 지구인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지구의 원주민은 1000년 전에 이미 멸종했고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동족, 지구인들에게 남겨준 메르윈 종족의 후손이라는 것.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이들에게 아 · 플라는 하나의 영상을 보여준다. 이 영상을 되도록 많은 지구 거주민(그는 '지구인'이라 부르지 않았다)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이며. 그 영상은 1000년 전의 것이었다. 황폐한 지구의 풍경. 지금과 같은 녹림은 보이지도 앖는다. 회색빛 하늘. 메마르고 거친 땅 위에 불쑥불쑥 솟은 콘크리트의 협곡. 시커멓고 길쭉한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는 둥글고, 팔다리가 길고 가늘며, 전신에 털도 꼬리도 없는 존재들. 아 · 플라의 선언은 그들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이들이 진짜 지구인입니다. 이들은 지구에서 자연 진화로 태어나 약 300만 년 동안 지구의 유일무이한 지적 생명체로 군림했습니다. 최대 개체수는 110억에 이르렀으나, 핵전쟁과 이상기후, 그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유발된 전염병으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99.9954퍼센트의 개체가 사망한 상태였고 생존자들도 100퍼센트 불임상태였습니다. 조사단은 생존자를 모아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지만 불임을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구 원주민의 생명을 앗아간 그 병은 조사단에게는 아무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그래서 조사단은 지구의 재건을 위해 자신들의 아이를 맡기기로 결심했다.

"지구인의 슬픔과 고통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후손이 남지 않는다는 점. 이 지구가 죽음의 별이 된 채로 텅 빌 거란 사실을 알았을때 더욱 컸다고 조사단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조금도 닮지 않은 아이를 받아 안았노라고 아 · 플라는 말했지요."


                 - 정희자 '지구의 아이들에게'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위한 비전' <크로스로드> 라는 곳에서 꾸준히 한국작가들의 sf소설들을 공모한 결과
2007년. 첫번째 결과물인 '얼터너티브 드림'이 발간되었고 뒤이어 2008년엔 이 앱솔루트 바디가 발간되었단다.

조금 더 다양한 곳에서,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쓰여진, 되도록이면 한국정서에 걸맞는, 한국 작가가 쓴 sf소설이라는,
어찌보면 광범위하지만 또 다르게보면 당연한 방법의 소설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나왔다.
물론 나도 sf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전신인 '얼터너티브 드림'보다 나중에 나온 이 책을 고른건 순전히 '박민규' 때문이었다(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라오고 있으니까).

총 12편.
각각의 이야기들은 결코 서로 맞물리지 않으면서 어찌보면 한 배를 타고있는 것과 같았다.
솔직히 약간 좀 유치한 소설도 몇개 있었고 경악하리만큼 놀랬던 작품도 몇개 있었고
코믹스런 요소가 눈에 띄는 글도 여럿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일 재미있었던 소설은 역시나 박민규의 '굿모닝, 존 웨인'.
그 뒤로는 류형석의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과 은림의 '환상진화가',
유서하의 '플라스틱 프린세스'가 좋았다.

눈에 보이는 뻔한 전개에 대체 왜 실렸나 이유를 모르겠는 소설도 몇개 있어서 실망도 조금 했었지만
그래도, 종류도 많고 맛도 좋은 뷔페집에 다녀온 기분이다.
특히나 '꿈의 입자' 말미엔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고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계속 배우 공효진과 매치가 됐다. 아주 잘 어울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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