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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8. 2016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필립 k. 딕

게다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혹은 누가 이겼는지(이긴 편이 있다면 말이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표면을 거의 뒤덮은 낙진은 어느 특정 국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낙진은, 전쟁 당시 적국을 포함해서 누구의 계획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처음엔 이상하게도 올빼미가 죽었다. 당시 올빼미의 죽음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뚱뚱하고 털이 북슬북슬한 새가 허연 배를 내놓고 마당이며 거리에 여기저기 죽어 누워 있는 광경이란. 살아 있을 때 해가 지기 전에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새였기 때문에, 올빼미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고 죽어 갔다. 중세에 흑사병이 번졌던 방식과 비슷했다. 중세에는 하늘의 새가 아니라 땅의 쥐들이 사람보다 먼저 죽었다. 하지만 이제 흑사병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중략)

'넥서스-6 안드로이드는 지능만 놓고 보면 '특수자(닭대가리)'로 분류된 인간보다 뛰어나.' 릭은 생각했다. 달리 말해, 넥서스-6 두뇌 부품이 장착된 안드로이드는 현실적으로 인류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열등한 인간들보다 뛰어났다. 하인이 주인보다 유능한 경우가 있을 수 있었고, 그건 좋은 일일 수도, 나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새로 도입된 능력 측정 테스트, 즉 '보이그트-캄프 감정 이입 테스트'가 새로운 판단 기준으로 부상했다. 감정 이입은 릭은 물론이고 정상인보다 한참 지능이 떨어지는 닭대가리들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무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릭은 자문했다. '왜 안드로이드는 감정 이입 테스트를 하려고만 하면 그토록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누구나 한두번씩 궁금해 했던 점이었다. 감정 이입이란 분명히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능력이었다. 그런가 하면 지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거미류까지 포함해 모든 동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집단 본능이 온전할 것을 요구한다.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유기체, 가령 거미같은 유기체에게는 감정 이입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아니, 만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오히려 거미는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감정 이입 능력이 생기는 순간, 거미는 제 먹이에게도 살려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모든 포식 동물들, 심지어 고등 포유류인 고양이 같은 동물도 먹이를 먹지 못해 굶어 죽을 것이다.

(중략)

릭은 꽤 오랫동안 서서 횃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올빼미를 바라보았다. 수없이 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쟁에 대한 기억, 올빼미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날들에 대한 기억. 유년기 동안 생물 종이 하나씩 멸종해 가던 사실이 알려지던 일, 그리고 언론에서 날마다 어떻게 그 사실을 보도했던가에 대해 릭은 기억했다. 어느 날 아침엔 여우가 멸종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그 다음 날엔 오소리가 멸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다 사람들은 날마다 듣게 되는 동물의 최종 부고 소식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중략)

여자가 이지도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상체는 날씬하고 유연했다. 불필요한 지방은 조금도 없는 몸이었다.

"퇴근은 언제 하지요? 퇴근 후에 도와주면 될 것 같은데."

"혹시 당신이 요리를 하고 둘이 같이 저녁을 먹어도 될까요? 재료를 내가 가지고 온다면?"

"아뇨, 할 일이 많아서요."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이지도어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이지도어는 알아보았다. 여자가 처음 느꼈던 두려움이 사라지자, 다른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두려움보다 더 이상한 무엇이었다. '뭔가 잔혹한 거야.' 그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이지도어는 알아보았다. 냉랭하고 무정한 마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진공, 그 진공에서 터져 나온 냉기 같은 것. 아니, 실상 근원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불시에 터져 나온 냉기 같은 것이라고 이지도어는 생각했다. 여자가 한 행동이나 말에서 느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하지 않은 행동이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중략)

그리고 밀트는 이지도어를 향해 물었다.

"배터리를 재충전 하려고 했나? 단전된 부품을 찾으려고 했어?"

"그, 그랬어요."

이지도어는 순순히 대답했다.

"이지도어가 그냥 왔어도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늦었을 겁니다. 닭대가리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자고요. 이지도어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요샌 가짜 동물들이 진짜랑 구분이 안 될 정도잖아요. 요즘 새로 출시되는 동물들은 질병 회로가 설치되어 있어서 병이 난 것도 진짜랑 똑같으니까요. 그리고 진짜 동물도 결국 언젠가는 죽는답니다. 진짜 동물을 소유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이 바로 그거죠. 우리가 늘 보는 게 가짜 동물이다 보니 진짜 동물도 결국은 죽는다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중략)

릭 데커드는 폴로코프를 찾아 우선 베이 지역 스캐빈저 청소 회사로 갔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을 한 명 찾고 있습니다."

릭은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있는 냉랭한 표정의 백발 여성에게 물었다. 스캐빈저 청소 회사 건물은 웅장했다. 크고 현대적인 건물 안에, 고급 정장을 입은 사무직원들이 많이 있었다. 두툼하고 푹신한 카펫과 진짜 목재로 만든 값비싼 책상을 보며 릭은 쓰레기 수거 및 처리 사업이 전쟁 이후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지구라는 행성 전체가 마모되고 붕괴되면서 쓰레기 더미가 되어 가고 있었고, 남은 인류가 지구에서 살 수 있게 하려면 이따금 쓰레기 더미를 치워 주어야 했다. 아니면 버스터 프렌들리가 즐겨 말하던 대로, 방사능 낙진도 낙진이지만 쌓여가는 쓰레기에 눌려 지구는 멸망할 것이었다.

(중략)

갈란드는 생각에 깊이 잠겨 말했다.

"이건 추상적이고 지적인 견지에서 보면 흥미로운 문제야. 레시는 나를 죽이고 저도 자살할지 몰라. 어쩌면 자네도 죽일지 모르지.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죽일 수 있는 대상은 다 죽일지도 몰라.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들었거든. 인조 기억 시스템을 이식한 안드로이드라면 말이지.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안드로이드들은 그런 짓을 한다고 말이야."

"그렇게 아무나 죽인다면 운명을 우연에 맡기자는 건가?"

"운명을 우연에 맡기는 걸로 치면, 화성에서 도망쳐 지구로 오는 것부터가 그렇지. 지구에서 우리는 동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 벌레나 들쥐 한마리가 안드로이드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지."

화가 난다는 듯 갈란드는 아랫입술을 쥐어뜯었다.

(중략)

프리스는 거센 몸짓으로 한 번에 부엌을, 그리고 아파트를 가리켜 보였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외롭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라고 생각하지요. 제기랄, 화성이야말로 외로운 곳이야. 여기보다 훨씬 나빠."

"안드로이드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나요? 광고에서 언젠가 봤는데."

식탁 의자에 앉으면서 이지도어는 음식을 집어 먹었고, 곧 프리스도 와인 잔을 들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와인을 홀짝였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도와준다는 내용이었어요."

"안드로이드도 인간만큼 외롭거든요."

(중략)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던 때도 있었지. 몇 년 전만 해도 그럴 수 있었어. 하지만 이제 남은 건 먼지뿐이야. 몇 년 동안 별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최소한 지구에서는 말이야. 별을 볼 수 있는 데로 가 볼까.' 호버카가 속력을 내면서 더욱 높은 고도로 떠올랐다.














그동안 짤막짤막한 단편들 밖에 만날 수 없었던, 내가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는 sf작가, 필립 k. 딕의 첫번째 장편 소설이다. 
이 책은 1982년 필립 k. 딕이 사망하던 해에 개봉했던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이기도 하다.

여러 단편들보다 지면이 자유롭기에 필립 k. 딕만의 세계관이라던지, 
그가 가진 특유의 유머나 아찔한 정점에서 독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듯한 느낌의 글솜씨는 
그동안 내가 읽었던 그 어떤 sf소설들 보다 두텁고 견고하게 짜여져 있어서 '역시 거장'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들었다. 

예전에 이 책은 구할 수가 없어서 영화를 먼저 보게 됐었는데 너무 지루했던 나머지 중간에 포기해 버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영화 특유의 음울하고 몽환적인 스타일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처럼(남자 로봇이 빗속에서 해리슨 포드를 쳐다보던 장면), 
이 책 역시 몽환적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구를 잘 그려냈다. 
특히나 낙진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극심한 배경덕분에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뿌연 연기로 뒤덮힌 사막같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맴돈다.

다만 딱 한가지 아쉬웠던건 원작의 결말이 영화의 결말보다 깔끔하지 않다는 점. 
영화에선 안드로이드 사냥꾼이었던 주인공을 안드로이드가 살려주면서 인간의 감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던데 
소설에서의 엔딩은 초반에 펼쳐놓았던 방대한 스케일에 비해 정말 소박하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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