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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8. 2016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

공연은 정시에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밴드가 그동안 겪어온 여정을 다룬 공연 도입부 영상이 아니나 다를까 늘어졌다. 처음에는 객석에서 쏠쏠하게 터져 나오던 웃음이 갈수록 줄어들더니만 급기야 사람들은 언제쯤 밴드가 등장하나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해지고 말았다. 나중에 한 관객이 레이블 홈페이지에 관람 후기를 올려 "스스로의 유머 감각에 자뻑했는지 뭔지..." 하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으니, 아뿔싸. 그러고는 밴드가 등장했다. 첫 노래는 음반의 첫 트랙이자 공연을 통해서는 거의 처음 선보이는 <나와>였다. 역시 좋지 않았다. '장기하와 얼굴들' 의 아킬레스건인 '코러스의 음정 불안' 문제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일정을 줄인다고 줄였지만 공연에 녹음에 생업에 치여 합주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데다 원래부터 코러스가 까다로운 것이 장기하의 노래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흡족하지 않은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게다가 음향도 어딘가 맥아리가 없었고, 자잘한 연주 실수들이 끊이지 않았다. 코러스는 끝까지 불안했다.


(중략)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우리의 특성은 다니던 대학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인디 문화를 동경하고 홍대 펑크 컴필레이션 앨범인 <Our Nation>을 사서 들으면서도 정작 '크라잉넛' 이 말 달리는 클럽 드럭(Drug)에 가서 일심동체가 되진 못했던 방관자와도 같은 우리의 정서는 관악산 외진 곳에 위치한 '지독하게 넓고 고립적인' 캠퍼스의 지정학적 환경과 닮아 있지 싶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서울대입고 지하철역에서부터 '샤' 자가 그려진 대학 입구까지만 가려고 해도 버스를 타도(기다리는 시간 포함해서) 20~30분은 족히 걸린다. 그 입구에서 자기가 다니는 단과대학으로 걸어 올라가는 데도 역시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 연세대학교만 하더라도 공강 시간에 학교 밖 당구장이나 게임방에 다녀올 수 있다지만, 이 대학은 한번 학교 안에 들어서면 강의나 동아리 활동이 전부 끝날 때까지 교문 밖으로 나오기 힘들다. 술 한잔 마시러 대학 아래 상가에 가려 해도 줄 서서 버스를 타야 하니까. 이 대학의 위치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에 정해졌다는 루머가 돌곤 한다.

박통 : 서울대 애들 집회해서 골치 아픈데... 어디 다른 데로 옮겨야겠어.
부하 : 각하, 그럼 관악산 어떻습니까?

그 전까지 서울대학교는 대학로에 있었다. 우리는 이 학교가 예전처럼 대학로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하면서도 결국 산 위의 고립된 환경에 적응해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대체로 지방 학생, 자취생들이었다. 본래 서울에 살지 않았던 아이들,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과 대학 아래의 자취방 골목은 우리에게 곧 서울이라는 도시 그 자체였다. 대학 입구에 세워진 '샤' 자 토템이 지배하는 전방 5킬로미터가 우리의 세계, 'Our Nation' 이었고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재미있게 지내기 위해서는 이 작은 로컬(local)의 왕국을 우리가 재미있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고립' 되어 있던 이유이며, 다른 곳과 다른 방식의 정서와 문화를 만들어간 토대일 것이다. 나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면, 내가 나름의 음악관을 정립하던 그 시기에 홍대 인디 밴드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거나, 매일 대학로에서 놀거나 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음악을 했을 듯 하다. 이건 장기하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갑자기 서울대 출신 딴따라들이 우르르 나왔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런 지리적인 문제를 한번 염두에 두어주시면 좋겠다. 박통 만세.


(중략)


'붕가붕가 중창단' 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2000년에 내 여자친구 되는 사람 자취방에 놀러갔다가 '붕가붕가'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 단어가 애완동물의 자위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오, 발음 좋네. 뜻 좋네. 붕가붕가 좋네. 우리의 자기 충족적이고 관객 의존적이지 않은 자발적 아방가르드 문화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어인 것 같아."


(중략)


나를 포함한 '눈코' 멤버 5일은 쑥고개와 홍대 클럽을 번갈아 오가며 공연을 하고, 연습을 하고, 신곡을 만들고, 폐기했다. 전에 기하와 '그 쑥고개 시장에서 닭과 순대, 김밥을 얼마나 많이 사먹었던지" 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드럼통 하나는 충분히 채우지 않을까 싶다. 하긴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1번으로 이 연습실을 거쳐간 모든 밴드가 겪은 일일 것이다. 우리는 2005년 다른 곳으로 연습실을 옮겼는데, '브로콜리 너마저' 를 비롯한 붕가붕가 팀은 그대로 남았다. 이후 쑥고개는 그들의 역사가 되었다. 이들이 사먹은 닭과 순대, 김밥을 다 합하면 아마 트럭 한대는 충분히 채우지 않을까 싶은데, 쑥고개 연습실은 어쨌거나 이 시장풍 인스턴트 먹거리들의 향연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나는 '장기하와 얼굴들' 결성 전에 곰사장과 윤덕원에게 장난으로 '쑥고개 청년단' 이라는 야메 단체를 결성하자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었는데(로고까지 만들었다), 이런 농담 속에 나름 진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하는 음악은 저마다 다르지만 당시 쑥고개 사운드라고 할 만한 것은 있었다. 말하자면 어쿠스틱하고 투박한 펑크 스타일의 사운드랄까. 세련되기보다는 투박한 연주, 전자적이기보다는 어쿠스틱한 스타일, 비트보다는  멜로디와 가사의 울림을 중시하고, 대중에게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동시에 태생적인 로우 파이 감성으로 인해 주류다운 특색이 없는 음악이다. 이런 '쑥고개식 로우 파이' 는 일종의 개성이지만 그 자족적인 인디 사운드는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결국 녹음에 투여할 물량이 부족하다는 걸 돌려 말한 데 불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2006년 후반 쑥고개 연습실의 철거는 일종의 상징적인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기 이후로 붕가붕가의 유년기가 끝났으니까 말이다.


(중략)


하필 왜 붕가붕가를?
대중음악을 성교에 비유해보자. 사회적으로 널리 권장되는 방법은 적당한 짝을 찾아 둘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서로의 짝을 찾아 헤매고, 원하는 짝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런저런 구애의 기술을 동원한다. 이게 주류 음악의 방식이다. 여기에 상대적인 게 자위다. 자위는 자기 욕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일단 자기 욕구 해소가 중요하니 굳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거추장스러운 일이 필요 없다. 이게 인디음악의 방식이다. 그런데 붕가붕가는 오나니나 마스터베이션과는 다르다. 보통 자위가 은밀한 곳에서 혼자 있을 때 이뤄지는 것이라면, 붕가붕가는 남들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도 남의 몸 일부분에 기대 이뤄지기 일쑤다. 짝짓기랑 비슷한 이런 부분은 나름 대중 지향을 드런낸다. 한마디로 내 표현 욕구가 우선이지만 들어주는 너도 신경을 쓰겠으며, 그렇게 네가 들어주는 것이 내 욕구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솔직히 어감이 좋아서 붕가붕가라 했다. 구구절절 거기에 말을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럴싸하지 않나? 불꽃놀이 모양의 첫 번째 로고는 이러한 갖다 붙이기를 거쳐 좀 더 붕가붕가스럽게 거듭났다. 이 새로운 로고의 주인공인 개는 스스로 욕구를 해소하고자 하는 우리다. 그리고 개가 기대고 있는 테두리는 우리의 노래를 들어주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뒤로 솟아나는 태양은 우리의 포부다. 우리 강아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타인과 함께 즐기며 찬란한 아침을 맞이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주류 대중음악(일반적인 섹스)과 기존 인디음악(자위)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중지향적 인디음악' 이라는 조금은 모순적인 우리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붕가붕가다.


(중략)


그동안 서울대 근처에서만 공연을 하다가 처음으로 인디음악의 메카인 홍대 클럽으로 진출한 참이었다. 낯선 공기에 우리는 계속 조마조마했다. 공연 날에 맞춰 나와줘야 할 첫 음반이 제때 출시될까,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 준비를 모두 끝낼 수 있을까, 관객들이 안 오면 어떡하나, 심지어 공연 중간에 고사를 지내기 위해 피워놓은 양초 때문에 불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거리가 산더미였다. 역시 공연도 별 볼 일 없었다. 난데 없는 힙합 듀오(군밤장수들)의 공연에 말 가면을 쓴 사람(곰사장)이 뛰어다니는 민망한 광경이 연출되는 그런 공연이었다. 딱히 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흥행했다고도 볼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왔다. 대다수는 지인들이었다. '국지적' 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의 공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는 있었다.

"최후의 만찬에 모였던 사람은 열 세명이다. 역사적 순간에 함께하는 건 이처럼 언제나 적은 숫자의 사람이다."

1976년 6월 4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렸던 '섹스 피스톨스' 의 공연에는 달랑 마흔 두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이 밴드를 시작했고, '버즈콕스', '조이 디비전', '뉴 오더', '진저 넛' 등의 밴드는 이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날도 아마 상서로운 조짐 같은 것은 없었을 테다.


(중략)


지속가능한 개발의 작명도 따지고 보면 사실 이런 원리다.
개발이라는 게 어쨌든 자원을 써버리는 것인 만큼, 원리만 따져봤을 때는 지속이 가능할 리 없다. 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자원을 쓰면서 동시에 아끼는 역설적인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게 쉬울 리 없다. 지속가능한 딴따라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음악을 해서 돈이 벌리지 않는 것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가지면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 거의 확실한 만큼, 건전한 생계도 유지하면서 동시에 음악 작업, 그것도 자신의 표현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음악 작업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모토를 내붙인 이유는 그게 안 될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정작 몇 번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매번 안으로 움츠러들다 끝내 단순한 아마추어로 남겠다고 결심한 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만만하지 않다. 돈을 많이 넣을수록 많이 나온다는 당연한 원칙이 지배하는 곳, 심지어 이 원칙조차 때로는 작동하지 않는 곳이 예측 불허의 음악 시장이다. 음악만으로는 먹고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생업을 따로 가진다고는 하지만 비정규직이니 정리 해고니 하는 식으로 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렵고 잘리기는 쉬운 사회다 보니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다. 하나를 제대로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둘 다 하겠다고 나선 셈이었다. 적당하게 이도저도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꿈꾸는 이들에게 옛사람들이 진작부터 적절하게 충고를 해줬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기 십상이라고. '브로콜리 너마저' 와 헤어진 2008년 초엽, 더 이상 레이블을 끌고 갈 의지를 잃어버린 곰사장이 그 무렵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결국 모순적인 단어 두 개를 붙여놓은 그럴싸한 말일 뿐이었다.


(중략)


일세를 풍미한 농구만화 <슬램덩크>에는 명장면들이 많지만 그중 절정이자 백미는 주인공 강백호가 전국 최강 팀과 경기를 하다 등에 부상을 입어 선수 생명이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다. 자신의 출전을 말리는 안 감독에게 강백호가 말한다.

"제 영광의 순간은 지금입니다."

그러고는 코트를 나서며 결정적인 대사를 날린다.

"단호한 결의란 거, 이제야 생겼어요."

뒷일 따지지 않고 지금의 자기를 불태우는 뜨거운 모습, 이것이 바로 용기다. 명장면은 이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선수인 '불꽃남자' 정대만. 초반 맹활약에도 불구, 방황의 시기가 초래한 고질적인 체력 부족 탓에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막판에 쓸모없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계속 비틀거리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3점 슛을 던지며 말한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남자, 정대만이다."

승부에 대한 의지로 육체를 초월하는 것, 이것이 근성이다.


(중략)


생계야 어떻게 되건 말건 일단 음악에 매달리겠다고 질러볼 깜냥은 못 된다. 그렇다고 열악한 음악 시장 상황을 의지로 돌파해낼 만한 근성도 없다. 하지만 즐거운 음악 활동을 포기하고 돈 버는 일에 매여 살 만한 용기도 내질 못한다. 결국 어중간하게 두 가지를 함께 한다. 생업과 음악 취미 활동을 공존시키겠다는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이렇게 소심하고 근성 없는 이들이 찾은 방법이다. 지속을 위해서는 절실하게 필요한 근성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중략)


협력이 있었다. 서로 소심한 가운데서도 누군가 나락에 빠져들 지경이 되면 그걸 버텨주는 이들이 있었다. 9와의 결별로 공황 상태에 처해 있던 곰사장을 지탱해준 것은 나름 자기의 방향대로 일을 계속하고 있던 덕원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들어와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공백을 메웠던 나잠 수가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김기조는 자기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피곤해질 무렵, 다시 정신을 차린 곰사장이 나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한가지. 붕가붕가레코드가 태어날 생각도 안 할 무렵, 깜악귀가 곰사장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무조건 낫다."

이것이 붕가붕가레코드를 지속하게 했던 명제다.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계속 앞뒤를 재고 있었다면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 멍 때리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기어 나올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순간 하고 싶은게 다시 생겼을 때 그걸 붙들고 해보는 게 안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 미래의 생계 문제를 제외하고는 잃을 게 아무것도 없던 붕가붕가레코드였다. 그리고 소심했던 탓에 먼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소심했으되, 적극적으로 소심했던 것이다.


(중략)


물론 '장기하와 얼굴들' 에게도 성공의 자질은 있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괜찮았다. 장기하는 노래를 잘 쓴다. 가사에서 다루는 일상적인 정서는 공감을 살 만하다. 장기하 특유의 '말하듯 노래하기' 는 참신하다. 미미시스터즈와 함께 하는 퍼포먼스도 최근 한국 대중음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거기다 약간의 엇나감이 있다. 일단 노래 자체가 그렇게 안온하지만은 않은 데다, 밴드의 태도는 기존의 미디어와 적당한 거리를 둔다. 미디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쪽에 맞춰줄 생각도 없다. 동시에 착한 아이들이라는 느낌도 있다. 장기하가 가진 학벌 좋은 중산층 아이의 이미지는 엇나가더라도 사회를 전복할 만큼 파괴적이라고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엽기적' 이라는 얘기가 적잖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에게도 '장기하와 얼굴들' 이 인기를 끄는 까닭도 이런 안전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중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쨌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만들었다. 2008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싸구려 커피>로 '최우수 록 노래상' 을 수상할 때 장기하는 

"운이 좋았다 인디 신(scence)에게 이 상을 바친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주요 부문 중 하나인 '올해의 노래 상' 을 수상할 때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무너뜨리며

"(인디) 신에게 감사드린다" 

며 거듭 인디음악 판 전체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 소감은 절대 빈말이 아니다. 타이밍이 좋았다. 장기하의 저 소감을 일부 언론이 "신(神)에게 감사드린다" 는 식으로 보도했던 것은 사실 오보에 지나지 않지만, 만약 우연을 관장하는 게 신이라면 감사드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 '장기하와 얼굴들' 의 성공은 이런저런 이유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자아낸 일이다. 다른 때에 다른 환경에서 재현해보라고 하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운이 좋았다.


(중략)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지르는 게 맞다."

이게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다. 이제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다.


(중략)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누구세요?"

디자이너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다. 그런데 김 기조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진다. 물론 정말로 좋아하는 디자이너에 대해 묻는 거라면 여럿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저런 질문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끼친 디자이너를 묻는 것이라면, 갖고 싶은 디자인은 있지만 닮고 싶은 디자인은 없는 그에게 이처럼 난처한 질문도 없다. 김 기조는 자신이 빠져들었던 작업물의 디자이너를 알지 못한다. 그가 영향을 받는 것은 길거리 간판들이나 옛날 문고판 서적, 재개발 예정지의 놀이터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붙은 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휩싸인 유명한 것들보다는 그냥 일상의 맥락에 툭 던져진 작업들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그러니 "평소에 영감을 받는 것이 무엇이에요?" 하고 묻는 것이 옳다. 그러면 "7,80년대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보면 영감을 받아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는 요즘 풍조에서 그 획일적인 측면 때문에 디자인이 없는 물건들로 치부되는 게 대단위 아파트 단지다. 거기서 그가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 획일성이다. 아파트처럼 거대한 물질을 대량생산으로 반복해 늘어놓을 수 있었던 우리 일상의 정신은 유리창 투성이의 최신식 건물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다고 문화재로 보존되는 한옥 동네에서 이를 느낄 수도 없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 건물들은 문화재로, 최신식 건물은 일상으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그 사이의 생활은 버려졌다. 아마 그것들도 한때는 최신식이라며 대접받던 것들이고, 지금의 최첨단 역시 똑같은 논리로 폐기될 것이다. 도려내진 일상에 대한 향수와 풍자가 뒤섞여 만들어진 애증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테마다.


(중략)


붕가붕가레코드를 보면서 키치라고 하는 사람 많다. 
그러나 김 기조가 생각하는 키치는 예컨데 "유러피안을 지향합니다" 하면서 집 앞에 마차가 다니고 강가에는 부르주아풍 유럽인들이 나들이를 하고 있는 아파트 광고 같은 것이다. 아무리 고급으로 지어놓은 아파트라도 정작 실생활에선 베란다에 장독이 놓이고 현관 앞에는 분리수거장이 있는데 말이다. '취향이 느껴지지 않는, 기존의 스타일에 대한 의식 없는 모방' 이라는 키치의 원래 의미를 생각해보면, 고급스러움과 편안함, 효율성, 건설적인 지향 따위를 되는 대로 추구하다 생기는 이런 낯부끄러운 상황이야말로 키치다. 저렴하다고 키치인 게 아니다. 괴발개발에 엉성해서 저렴하게 보이는 것과 저렴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붕가붕가레코드 디자인에 돈이 많이 안들기는 하지만 대충 만들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일부러 난잡하게 만드는 건 취향에 맞질 않는다. 오히려 붕가붕가레코드의 디자인은 열과 성이 들어간 정제된 작업이다.








이 책은 2008년 혜성처럼(...)나타나 온라인을 살짝 휩쓸었던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이 소속되어 있는 
'붕가붕가레코드' 라는 레이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쓴 책이다.

해당 레이블에 관해 관심이 지대하게 있는 사람들 외에도 오직 '장기하와 얼굴들' 에게만 관심이 있던 나같은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주된 내용은 그동안 붕가붕가레코드가 걸어온 발자취,
어떻게 살아남았고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하는지 하는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나열되어 있다.

책은 인디씬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알싸한 정보들까지 얻을 수 있는,
마치 '인디 레이블을 운영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몇가지 사소한 방법들' 마냥 비슷한 길을 꿈꾸는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뭐 쉽게 얘기하자면 인디레이블의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장기하가 아직 누군지 모르고 '인디씬' 이란 단어가 뭔 외계어인가 하는 사람들에겐 별로 이득될게 없는 책.

이 책을 구매할때 무엇보다 땡겼던건 보너스로 들어있는 '붕가붕가레코드' 소속 팀들의 컴필레이션 음반이었다.
해당 뮤지션들의 대표곡들이 한곡씩 들어가 있는데, 이건 뭐 책이 부록이고 음반을 파는것 마냥 씨디에는 꽤 수작들이 들어가 있다.
장기하의 음악과 붕가붕가레코드에 약간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읽어보길 바란다.
(이 음반을 듣고 '아마도 이자람 밴드' 와 '아침' 을 좋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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