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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8. 2016

변신

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때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몸이 보기 흉한 해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갑각처럼 단단한 등을 지고 누워 있었으며, 머리를 약간 쳐들자 활처럼 줄이 죽죽 간 갈색의 둥근 배가 보였다. 배의 꼭대기에는 금세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듯이 이불이 간신히 얹혀 있었다. 다른 덩치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그의 눈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아른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중략)


이미 그는 조금만 더 세차게 흔들면 균형을 잃을 정도의 상태에 까지 와 있었다. 그는 어서 최종 결정을 내려햐 했다. 오 분만 더 있으면 일곱 시 십오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회사에서 누군가 온 모양이군.'

그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몸이 거의 굳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작은 다리들은 오히려 더 바쁘게 춤을 추었다. 잠시 사방이 고요했다.

"문을 열어 주지 않는군."

그는 얼토당토않은 희망을 품고서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늘 그렇듯이 가정부가 확실한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가서 문을 열었다. 그레고르는 방문객의 첫 인사말 소리만 듣고도 그게 누군지 벌써 알아챘다. 업무대리인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왜 그레고르는 조금만 지각을 해도 금방 엄청난 의심을 받는 그런 회사에서 근무해야 하는 팔자를 타고 났는가? 다른 직원들은 모두 건달들뿐이란 말인가? 그들 중에 충직하고 헌신적인 인간은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몇 시간 안 되는 아침 시간을 회사를 위해 다 쓰지 못했다고 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껴 바보처럼 침대에서 떠나지 못하는 인간은? 뭔가 알아보도록 사람을 보내려면-만약 그런 질문 짓거리가 필요하다면-수습사원을 하나 보내면 될 것 아닌가? 꼭 업무대리인이 와야 하는가? 그렇게 해서 이 의심스런 경우를 조사 하는 데에는 업무대리인의 분별만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에게 다 보여 줘야만 하는가? 올바른 판단에서라기보다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고조된 흥분 때문에 그레고르는 온 힘을 다해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중략)


"오늘은 맛있었나 보네."

그레고르가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 치운 날에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엔-물론 이런 경우가 점차 더 많아졌는데- 거의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그냥 다 남겼네."


(중략)


그레고르는 아버지에겐 회사가 망하면서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아버지는 그에게 그 반대되는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사실 그레고르 역시 그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 그레고르의 근심은 다만 온 식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아버지의 사업상의 실패를 가족들이 가능한 한 빨리 잊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바쳐 힘껏 노력 하는 쪽에 기울어 있었다. 때문에 그는 당시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거의 하룻밤 사이에 별 볼 일 없는 점원에서 영업사원이 되었다. 영업사원은 돈을 버는 방식이 아주 달라서 일의 성과를 당장 이익배당의 형태로 현금으로 받았으며 놀라워하고 행복해 하는 식구들 앞에서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때야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비록 그레고르가 나중에 많은 돈을 벌어서 온 가족의 생활비를 댈 수 있게 되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그 뒤로는 그런 시절은 적어도 그렇게 멋지게는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곧 거기에 길이 들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그레고르 역시. 가족들은 고맙다며 돈을 받았고, 그는 돈을 기꺼이 건네주었지만, 어떤 특별한 온기 같은 것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변신


(중략)


"저를 구해 주실 거죠?"

소년은 그의 상처 속의 생명에 몹시 눈부셔 하며 훌쩍이며 속삭인다. 내 구역 사람들은 이렇다. 늘 불가능한 것을 의사에게 요구한다. 그들은 옛 신앙을 상실했다. 목사는 집에 앉아 사제복을 하나씩 하나씩 쥐어뜯고 있는데, 의사에게는 그 부드러운 외과의의 손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내라 한다. 자, 그렇다면 그대들 좋을 대로 하라. 내가 자청하고 나선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대들이 나를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쓴다면, 나 그것도 되는 대로 그냥 둘 것이다. 내 뭘 더 바라겠는가, 늙은 시골 의사가. 하녀까지 강탈당한 주제에! 그리고 그들이 온다, 그 가족과 마을의 원로들이. 그들은 와서 내 옷을 벗긴다. 선생을 맨 앞에 내세운 학교 합창단이 집 앞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의 극히 단순한 곡을 부른다.

그의 옷을 벗겨라, 그러면 그는 병을 고치리라.
만약 그가 병을 못 고치면, 그래 그를 죽여라!
그는 의사이니까, 그는 의사이니까.





                                          -시골의사


(중략)


제가 말하는 출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저는 그 낱말을 그 낱말이 지닌 바 가장 평범하면서도 그 낱말의 본래 의미 그대로 사용합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자유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겁니다. 사방팔방으로 트인 자유라는 이 위대한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원숭이였을 때도 그런 감정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갈구하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자유를 옛날에도 원치 않았고 지금도 원치 않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로 너무나 빈번하게 서로 속고 속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 중의 하나인듯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더없이 숭고한 감정에 속합니다. 저는 서커스에서 무대에 서기에 앞서 어떤 곡예사 한쌍이 천장 꼭대기에서 공중그네를 다루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서로 발을 구르고, 그네를 타고, 도약하고, 서로 상대방의 팔을 향해 몸을 날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칼을 이빨로 물어서 나르지요. '저것도 인간들이 누리는 자유구나.'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혼자만 잘난 척하는 저 몸놀림.' 이런 신성한 자연을 비웃는 짓이라니! 이 광경을 보고 원숭이들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앞에서는 어떤 건축물도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이 문제의(?) 책은 어느날,
모 포털사이트 메인에 떴었던 '충격을 주는 첫 문장' 비스무리한 코너를 보고 호기심에 읽은 책이다(알고보니 단편집).

프란츠 카프카라는 작가는 관료화된 사회속에 함몰되어가는 인간의 몰개성화-비인간화에 대해 그만의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그를 떠올리면 '부조리한 사회' 라는 말을 지울 수 없는데,
책의 제목이 된 소설, '변신' 에서 그의 스타일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이 하루아침에 끔찍한 모습의 해충으로 변해있고 그에게 생계를 의존해 왔던 세명의 가족들은
거의 가족의 신처럼 떠받들던 장남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과정이 충격적이었다.
독특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내면을 파해치는 작가의 면모가 정말 남다르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괴물' 이라는 sf적인 장치는 정말 말 그대로 '장치' 에 불과할 뿐이라니.
이래서 세기가변해도 끊임없이 거론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 역시 프란츠 카프카를 동경하여 주인공 이름이 그모양이라는 소문)

하지만 함께 수록되어 있는 그 외의 단편 소설들은 해설자의 말대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글들 뿐이었다.
소설을 쓰는 내내 생업에 종사하며 마흔한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 작가는
실생활에서 오는 수많은 모순들과 부조리들을 글로 풀어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렸던 모든 작품들이 훌륭했다면 아마도 프란츠 카프카의 다른 소설들도 찾아 읽고 싶었겠지만
'변신' 한편으로 일단은 만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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