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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9. 2016

2010 제 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대상 수상작>
아침의 문 - 박민규

<자선 대표작>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 박민규

<문학적 자서전>
자서전은 얼어 죽을 - 박민규

<우수상 수상작>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 김중혁
무종 - 배수아
통조림공장 - 편혜영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 전성태
투명인간 - 손홍규
매일매일 초승달 - 윤성희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 - 김애란





순전히 박민규의 '아침의 문' 때문에 샀다.

현재 나는 과거에 열렸던 여러 중-단편 소설 문학상을 휩쓴 그의 저력을 체감하고 있다.
원래 문체 자체가 독특함을 넘어서, 박민규 특유의 어법과 스토리,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건
익히 읽은 책들 덕분에 알게 되었지만 '과연 그정도로 대단한 작가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꽤 많은 상을 타버렸기 때문에 그의 새로운 작품이 실리는 책의 빈도수와 비례하는 책값이 만만치 않아,
일부러 구입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와는 다른 매력을 지닌, 그와 함께 책에 실린 국내의 여러 실력파 작가들의 글을
의도적으로 읽고싶지 않아서 일부러 구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무슨 수상집~ 하며 국내 여러 작가가 모여 쓴 책은 확실한 장르가 아니라면 손이 가지 않는게 내 성질.
하지만 이 책은 뒤에 있는 '대상 선정 방법' 이나 '박민규식 작품론' 등이 확 와닿아 집에 데려왔던 기억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에서 또다른 작가들의 '맛' 과 그들이 이미 발표한 여러 단편집도 알게 되었으니 
이 책을 고른게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닌듯 싶다.
박민규를 대상으로 꼽은 선정위의 말처럼,
그는 이미 막다른 길에 접어든 한국 문학의 실태를 간파하여 본인의 의도대로, 본인의 글쓰기 방식을, 
그동안 써왔던 그것 그대로 밀고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이전에 발표했던 여러 중-단편들에서 뭍어나는 '무심한 척, 옆으로 다가와 집게손가락으로 옆구리를 푹 찌르고 도망가는' 식의 
글쓰기 방법은, 대중을 뛰어넘어 이제는 여러 평론가나 기라성같은 문학 상에도 먹혀 든다는걸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난 박민규의 팬으로, 그의 글이 대상으로 뽑혔다는 것 외에 그의 새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뻤다.
기본적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소설집과 거리가 멀어져 가며 자동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들이 줄고 있는 나의 경우,
봇물 터지듯 당선이 되어버리는 박민규의 새 글들을 어서 빨리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행여나 당선된 단편들을 긁어모아 새로운 단편집을 발간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아침의 문 - 박민규
'어쩜 이런 소재를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 라고 생각이 든 작품.
두명의 등장인물이 같은 말을 혼동하는 장치라던지
'왜?' 보다는 '음 그렇구나' 하는 박민규와 어울리지 않는 희망적인 스토리 변화에 또 한번 놀랐다.
영원한 팬이 될게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 박민규
작가의 전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의 작가의 말에서 예고를 했던 소설.
수상을 기념하여 실린 모양이다. 
제목을 보고 다분히 스토리(중년 남성의 고개숙인 인생..)가 예상됐지만 막상 읽어보니 뇌에 얼음을 얹어놓은듯한 스토리가 압권.
정말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준다.


자서전은 얼어 죽을 - 박민규
이상문학상 심사위원들이 박민규의 '아침의 문' 을 보고 꽤나 감명을 받았는지
박민규에게 지면을 할애해가며 '문작적 자서전' 이라는 묘한 타이틀의 글을 싣게(쓰게)했다.
제목 그대로 자신을 뽑아준 심사위원들과 함께 책에 실린 여러 작가들에게 'fuck' 을 날리는듯한 한마디는 
읽는이로 하여금 소소한 재미와 '이 인간은 이런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 김중혁
토종 sf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 sf문학으로서 어느정도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
대상 수상작인 '아침의 문' 을 포함, 이 책에 실린 우수상 수상작들을 통틀어 
가장 생각의 전환을 많이 가져다주는 작품 되겠다.
인간의 수명이 손목시계에 표기된다는 소스가 일품.


무종 - 배수아
정녕 왜 이 책에 실렸는지 모르겠는 작품이다.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아니면 어떤 시도를 하고싶던건지 정말 모르겠다.
심사평은 '호흡이 긴 문장력'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것 또한 그다지 와닿지는 않고
다시 읽어도 왜 실렸는지 모르겠는 작품이다.


통조림공장 - 편혜영
유난히 마이너한 나의 한국 작가 기호에 선택의 폭을 조금 더 열어준 작품.
이 작품 하나 읽고 곧바로 편혜영의 다른 글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만큼 작품의 내용이 기발하고, 읽는 와중에 머리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그것 때문이야!' 라는 생각을 유발케 하는 묘한 작품이다.
아주 스릴있게 읽었다.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 전성태
작가가 치매에 걸린 자신의 어머니를 위로하며, 본인의 유년기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는걸 풀어 낸 작품.
이미 우리보다 많은 세월을 지나오신 '어머니' 들의, 그나마 젊은 시절의 느낌들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는것 같아서 애달펐다.


투명인간 - 손홍규
제목만 보고는 '음.. sf인가?' 라고 생각할법한 작품.
현대 사회에서 이미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아버지' 들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접근하는 방법또한 색달랐지만 실상과 별반 다를것 없는 이야기에 그저 씁쓸했다.


매일매일 초승달 - 윤성희
자매 소매치기단을 이야기한 작품.
이것저것 끌여들여 잡다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연과 필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위태위태한 직업적 특성을 재미있고 스피디하게 그려내서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 - 김애란
한국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법한 내용의 작품.
젊은시절에 자신만 남겨두고 죽어버린 부인의 음성을 듣는, 천덕꾸러기 남자의 마음은 어떨까.
제목처럼 뭔가 아련한 느낌의 작품이다.



예전에 내가 '박민규' 라는 작가를 알게된 계기도 아마 '2004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아마도 대상은 김훈-화장)' 때 였을거다.
기억하기론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였던것 같은데
이번 작품집에서도 역시 여러 좋은 작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었던것 같아,
이런류의 시상과 출판을 매년 꾸준히 해주는 출판사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덕분에 박민규의 책은 전권을 다 읽게되었다).
국내 작가중에서 너무 유명한 명작가의 책은 일부러 관심을 끊는 나의 못된 습성 덕분에
한국 작가들의 책이 책꽂이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수상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편혜영' 의 단편집을 바로 구입했다.
전례처럼 편혜영 작가가 출간했던 소설 전권을 다 완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내년에도 좋은 시상과 출판을 부탁드린다.




















다들 카페에서 만난 사이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란 카페였고 처음엔 JD와 나 둘만의 공간이었다. 하나 둘 늘어난 회원의 수가 어느새 스무 명을 넘게 되었다. 몰랐다. 자살을 원하는 인간들이 그토록 많을 줄은 정말 몰랐다.JD는 좋은 리더였고, 유능한 리더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마지막 남은 비스킷을 털어넣고는 나는 자리를 일어선다. JD에게 불만은 없다. 수면제니 무슨 유도제니... 식단을 짜기 위해 두 차례나 상하이를 다녀온 JD였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실은 말도 못하게 희귀한 특수 체질이거나... 아니면 바로

재수가 없었다는 것.


(중략)


절대 믿어선 안 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빅 데이에 참가했다 돌아간 두 녀석도 전자의 경우였다. 말하자면 여태 독신으로 살면서 난 반드시 이혼할 거야, 를 외쳐온 셈이랄까. 물론 이것은 험담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라는 얘기다.


(중략)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단서를 떼 오라고 미친년아. 사실을 알아야 할 단 한 명의 인간은 그렇게 소리쳤었다. 거짓말을 잘하는 인간이란 건 알았찌만, 그래도 그전까지 그녀가 생각했던 인간의 범주란 게 있었다. 이제 그녀는 변했다. 인간의 범주가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머리채를 잡히고 폭행을 당하던 바로 그 순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주민등록증을 가진 괴물, 학생증이며 졸업증명서며 명함을 가진 괴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낸 단어가 인간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었다.


                         -아침의 문 - 박민규



밥 줘.

여태 식사도 안 하고 뭐했어요?

뭐-했-어-요? 이상하리만치 그 한마디에 위며 내장이며 그런 것들이 활활 불타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놈들이 여럿 내 배 속에 들어와 심장이며 허파며 되는대로 라이터를 갖다 대며 불 붙어? 붙었어? 잘 안붙는데. 붙잖아, 에이 가죽 아니네~ 야지를 놓는 기분! 안전모를 쓴 웬 또라이가 내 귓속에 드라이버를 박고 한 십 분을 돌려대다 어이, 깁자가 아닌가봐. 일자 좀 줘봐~ 외치는 소릴 듣는 기분! 그래서 달려온 동료란 놈이 날도 더운데 그냥 부수지? 눈앞에서 해머를 건네주는 딱 그 기분! 누가 봐도 이건 정당방위야, 그래서 별수 없이 변신-

파이어!


(중략)


진작 다른 길을 찾았어야 했다. 조언을 한 인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니미럴,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겠지 했는데... 아니, 실은 배운 도둑질도 할 줄 아는 일도 이거순이다. 또 무엇보다 93년 12월 이달의 세일즈맨이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생각했었다. 부끄럽지 않은 길을, 옳은 길을 걷는다고 자부해왔다. 자넨 줏대가 뚜렷하군. 세일즈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내 인생을 그렇게 평할 것이다. 그렇다. 한마디로 세상이 개판이기 때문이다. 덤핑을 하는 인간들, 실적을 가로채는 인간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선 우선 그런 인간들을 싹쓸이해야 한다. 도대체 정부는...

니미럴


(중략)


진짜 비극이 어떤 건지 당신은 모른다. 삼 년 전부터 좆은 안 서고, 일 년 가까이 돈도 못 벌고 회사에선 팽烹... 정신을 차려보니 마누라의 서랍 속엔 딜도가... 말하자면 그런 건 비극의 미끄덩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비극의 진짜 알맹이는 작은 살구씨처럼 그 속에 숨어 있다(그렇다고 비극이 피부에 좋다는 얘긴 아니다). 그 중심에, 작지만 아주 단단한 모습으로... 그런 기분을 알까 모르겠다. 마누라의 딜도는 수입 명품도 고급 진동형도 아니었다.

일반 막대형이었다.


(중략)


함께 미역국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재작년에 마누라랑 갈라섰단다. 딸은 누가 키우고? 마누라가 데려갔지. 고시원에서 일년 살다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단다. 양육비니 생활비니 골치는 아프고, 어설픈 영업은 여전히 답이 없단다. 그래, 뭘 파는데? 뭐긴 뭐겠어 자동차지, 할 줄 아는 게 그뿐인데. 그렇지, 고갤 끄덕이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이건 뭐... 내 자서전의 후반부가 아닌가.


(중략)


뻥이 아니라 참으로 담담한 마음이었다. 대리점 근처 전철역에서 토스트를 사 먹었고(니미 그 마가린 냄새 하고는),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여어 이게 누군가? 조두출이는 여전했다. 깍지 낀 손을 끄덕이는 버릇도, 이게 누군가? 웃은 다음 거두절미 나 돈 없네 말하는 싸가지도. 흐흐 돈 빌리러 온 게 아니라네 따위 멘트는 날리지도 않았다. 나는 웃었고, 넉넉히 팔짱을 낀 채 딴전을 부리듯 얘기했다. 요즘 제일 고전하는 모델이 뭔가? 물어보나 마나

캐럿(미도에서 출시한 최고급 세단. 사상 초유의 개발비를 투자했으나 고급차 시장을 장악한 수입 승용차의 브랜드파워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이지, 씨발 놈이 대답했다. 잔말 말고 한 대 꺼내줘,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화, 확실해? 놈이 물었다. 백 프로, 라고 나는 구두를 탁탁 털며 말했다. 안타깝다. 입에 좆이라도 박힌 듯한 그 표정을 당신도 봤어야 했는데. 내 차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 미도의 최고급 최신형 세단을 몰고 나는 화성으로 가고 있다. 집宇 집宙, 넒을洪 거칠荒. 우주는 확실히 말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달에 갔다고?
그렇다네.
거길 어떻게.
네비에 찍고 줄곧 가면 나온다네.
산소도 없잖나.
먹고살아야 하는 마당에 산소 따지게 생겼나?
니미럴.
거긴 아직 경쟁이 심하지 않아. 살만한 놈들이 거길 갈 리 없으니까.
그나저나 거기에도 뭐가 사나?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살아, 게다가 돈도 꽤나 돌더라구.
많이 팔았나?
제법 팔았네, 숨통이 확 트였다니까.
내가 알기론 우주엔 암흑물질인가 뭔가, 또 태양방사선이니 뭐니 겁나 위험한 곳이라던데.
여기서 돈 없이 사는 거보다 위험하진 않네.
니미럴, 방사선에 뒈지면 어쩌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느 쪽도 사과하는 놈 없기는 마찬가지지.
좆도 니기미.
다음엔 꼭 박근혜 찍을 거라네.
내 말이 그 말이네.


(중략)


춥다.
너무 춥다.

아마도 절반쯤, 소주를 비웠을 것이다. 오, 그 광경을 당신도 봤어야 하는데. 저 멀리 모래언덕을 넘어 차가 한 대 비실비실 달려오고 있었다. 날아다니는 접시니 뭐니 그런 이상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지구의 차! 이거야 원... 여기도 날샜구나, 짜증이 인 것도 사실이지만 또 한편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뿌연 먼지와 함께 차에서 내린 생물은 누가 봐도 인간이었다. 게다가 내 또래... 좆도 돈은 없어 보이고... 흑인이었다. 황당하다는 듯 놈도 뚫어지게 나를 훑어보았다. 기대 반 실망 반, 그리고

퍽 유, 화성인인 줄 알았더니!

되레 손사레를 치며 어깨를 으쓱한다. 딱 봐도 냄새가 난다. 뭔가 팔러 온 놈이고, 지지리도 퇴물이다(여기까지 온 걸 보면 말 다했지 뭐). 킁킁 세일즈의 냄새를 확인한 후, 나는 거만한 얼굴로 놈을 향해 물었다.

동남아?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놈이 아. 이내 말뜻을 알아차리는 눈치다. 미국, 하고 놈이 답한다. 앙? 하는 마음이긴 했지만 거지... 뭐 소나 말이나 키우는 그런 데겠군 싶었다. 캔사스? 아이오와? 재차 물었는데 놈의 답변이 너무나 심플하다. 뉴욕. 이런 니미... 내가 꿇리잖아. 어쨌거나 별생각 없다는 표정으로, 자넨 어디서 왔나? 놈이 물었다.

한국.
한국? 음... 첨 들어보는 나라네.
박지성 몰라?
모르는데.
리얼 마드리드도 모르면 곤란하지.
레알 마드리드라면 들어는 봤네.


(중략)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 박민규



"이제부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셋째는 스탠드의 불을 켰다가 껏다. 그러고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학기 초마다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했던 담임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자신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며 장래희망이 이게 뭐야? 하던 어느 선생님의 목소리도 생각났다. 셋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래희망 란에 '미정' 이라고 적었다. 그건 자매들의 아버지가 자주 쓰던 말이었다. 열세 살에 고향을 떠난 이후로 이십년 동안 아버지는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 모래자루를 나르던 꼬마아이가 벽돌공장의 사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견뎌야 했는지, 아버지는 셋째를 낳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매들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모두 떠나고 막내딸만 남게 되자 아버지는 쪽잠을 잤던 그 옛날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잠만 잤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서 막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꿈은 이런 게 아니었다. 셋째는 평상에 엎드려 숙제를 하면서 대꾸했다. 뭔데요? 알아서 뭐하냐? 다 지난 일인데. 아버지는 하수구를 향해 담배꽁초를 던졌다. 다 부질없어. 너도 미리 정하지 마라. 미정이야, 미정. 셋째는 숙제를 하던 노트 한 귀퉁이에 미정이라는 단어를 적어두었다. 그리고 큰언니가 쓰던 국어사전을 뒤적여 미정이 무슨 뜻인지를 찾아보았다. 셋째는 짝이 오늘은 뭐할 거니? 하고 물으면 미정이야, 하고 답하는 아이가 되었다. 


(중략)


세 자매는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향했따. 목포터미널에서 배를 탔는데, 그제야 세 자매는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다음에는 꼭 비행기를 타자." 셋째가 말했다. 파도는 거칠었다. 셋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죽으면 다 니 탓이다." 첫째가 말했다. "나는 말이다." 한참 후에 첫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죄책감이 들 때마다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본단다." 안경을 벗고 길을 걸으면 사람들의 눈, 코, 입이 뭉개져 보였다. 그러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괜찮아, 하는 말이 들려왔다.


                         -매일매일 초승달 - 윤성희




폭발음을 들으면서 2021394200은 우주를 생각했다. 그가 설치한 폭탄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건물의 한 층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후 그 파편을 우주 저 멀리 보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파편이 우주로 날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우주는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해져 있으니 더 이상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폭약을 조금 덜 쓸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뒤늦게 들었다.
그는 자동차 안의 거울을 보았다. 두 블록 뒤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로가 긴 사각형 거울이었기 때문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2021394200은 거울을 시계방향으로 구십 도 회전시켜보았다. 그래도 연기의 꼭대기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파편이 이미 우주에 닿았는지도 몰랐다. 우주에 도착하면 되돌아오긴 글러먹은 것이다. 행성의 룰은 되돌아오는 것이지만 우주의 룰은 떠도는 것이니까. 그는 내비게이션을 켜서 두 번째 목표물의 주소를 입력했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2021394200은 거울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시속 이백 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오후 다섯 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2021394200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2021394199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다.

삼심구만 사천구십구.

단번에 세 개의 숫자가 바뀐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숫자로 된 자신의 이름이 좋았다. 한 시간에 1씩 숫자가 둘어드는 게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숫자로 된 이름을 싫어하지만 2021392199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신체 어딘가가 지워지는 듯한,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얼음을 가득 채운 위스키가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자신이 좀 더 부드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특별한 사고가 생기지 않는 한 그는 앞으로 삼십구만 사천백구십구 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깜박거렸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라는 신호였다. 2021394199는 고속도로의 표지판을 확인한 후 오른쪽 길로 빠져나갔다. 도로 위는 안개로 가득했다. 뿌연 안개 속에는 붉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나선형으로 휘어진 도로를 따라가는 게 힘겨울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안개등이 비치는 삼 미터 정도 밖에는 볼 수 없었다. 허공에서 희뿌연 안개가 구름처럼 펄럭였다. 2021394199는 잠깐 눈을 감아보았다.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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