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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9. 2016

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요 전에 제 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마음에 들었던 몇개의 작품을 쓴 작가들 중에 정말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었던 편혜영 작가의 단편집을
정말로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앞서 그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계기가 된 '통조림공장' 이전에 발표했던 소설들의 묶음이라,
기대했던것 만큼의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었지만,
그녀 특유의 문체라던지, 주로 다루는 소재들이 가져다주는 '불편함' 은 100% 전달되었다.

그녀의 소설집 맨 끝에 실려있던, 작품 해설에서도 얘기한것 처럼
'일상의 악몽화' 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것보다는
일상을 판타지스럽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누구나 익히 알고, 알것 같은 일상의 여러 그림들 속에서 이러저러한 장치를 이용해,
우리가 느끼는 덤덤하고 무료한 '일상' 의 단면들을, 
세세하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한편으로는 기괴하게 다루는 그녀만의 솜씨는 
이제껏 본적이 없던 거라서 '열광' 까지는 아니더라도 박수는 쳐줄 수 있을 단편집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라던지 기승전결의 의도적 매몰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통조림공장' 처럼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그녀는,
'통조림공장' 한편으로 내 책장을 메워가게 된, 몇 안되는 국내 작가가 되었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계획을 잡기만 하면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뭔가 사정이 생겼다. 지난달에는 남자의 대학동창회가 있었다. 축구부 선생으로 자리잡은 선배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잘만 하면 그런 자리 하나쯤 소개받을 수도 있었다. 남자로서는 빠질 수 없었다. 그 전달에는 여자 때문에 못 갔다. 여자는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했다. 그들은 아쉬워하며 일정을 연기했다. 여행을 미루자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몸살은 곧 나았다. 아프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은 주말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하루라도 수업을 미룰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들은 여자에게 배우는 글짓기 말고도 배우는 게 많았다. 제각기 다른 학원 시간표를 가진 아이들을 묶어 보강시간을 잡기는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개별적으로 보강시간을 잡았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른 때보다 배는 더 피곤한 일주일을 보내게 될 것이다.


(중략)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앞차를 따라 천천히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개에 가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지도를 펼쳤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이야? 남자가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한 부분을 짚어줬다. 여기쯤일 거야.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여자가 다시 물었다. 남자는 답답한 듯 손가락 가까이 씌여 있는 지명을 읽어줬다. 낯선 지명이었다. 그들이 출발한 도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기 봐. 불빛들이 꼭 달빛 같지 않니? 남자가 생각에 잠겨 있는 여자에게 대뜸 물었다. 여자는 남자가 한 말에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어 고쳐주고 싶었다. 참신하지 않을 바에야 비유를 쓰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비유는 대개 익숙한 것일 가능성이 많았다. 농담할 작정이 아니라면 섣불리 비유를 쓰지 않는 게 나았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밴 말투가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 없었다.



                         소풍



여직원에게 통행료를 지불하며 차창을 열어 친숙하고도 익숙한 도시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폐로 들어오는 도시의 공기가 반가웠다. 도시에서 그의 집은 강의 북쪽 끝에 있었다. 북쪽 끝이라고는 해도 미세먼지 측정도나 소음 측정도, 인구 밀집도에 있어서는 행적구역 안에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먼지가 들끓고 소음이 끊이질 않으며, 거리를 지나다니면 모르는 사람의 어깨에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인 도시다운 곳에서 살아왔다. 그중에서도 그의 집은 연립주택이 밀집한 주택가였다. 그는 융자를 얻어 삼층짜리 연립주택을 샀다. 지하까지 몇 세대의 세입자를 들었어도 융자는 만원짜리를 깔아 바닥 장판을 해도 될 만큼 많았다. 아이를 키워 대학에 보내려면 정년이 되도록 다 갚아도 다 못 갚을지도 몰랐다. 이자는 갈수록 늘어났고, 융자는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집채만큼이나 커다란 융자에 허덕였지만, 집을 산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중략)


집에 돌아가기 전, 그는 창가로 가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건물마다 켜진 불이 밤의 도시를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도시가 좋았다. 특히 도심지 한복판의 빌딩 안에서 맞는 밤이 좋았다. 건물을 밝힌 불빛은 아름답고 포근했다. 그중에서도 그는 야근을 하는 밤중에 앞 건물에 켜진 환한 형광등 불빛을 좋아했다. 그 불빛으로 앞 건물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앞 건물은 육차선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불켜진 사무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그는 할수만 있다면 망원경으로 앞 건물 사람들이 무슨 일로 사무실에 남아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늦은 밤에도 그들을 찾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팩스번호를 눌렀다. 문서 절단기에 종이를 밀어넣는 사람도 있었고 진지한 얼굴로 회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여직원들도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앞 건물 사람과 눈이 마주쳐 머쓱해지고 나서야 창가를 떠났다.



                         사육장 쪽으로



늑대 우리를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왼쪽에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 우리가 있었다. 맹수 우리에는 작은 샘과 몸을 눞혀 쉴 수 있는 커다란 바위와 나무그늘이 있었다. 철창이 촘촘히 둘러쳐진 데다가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늑대 우리에 비하면 맹수 우리는 사바나에 비견할 만했다. 우리 크기에서 알 수 있듯 늑대는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없는 동물이었다. 게다가 시베리아 산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도 아니었다. 관람객이 모여드는 한낮이면 늑대는 대개 낮잠을 잤다. 일어나 있을 때는 살기 없는 눈으로 관람객을 응시했다. 관람객들은 킁킁거리지도 않고 날카로운 이빨로 생고기를 물어뜯지도 않으며 으르렁거려 자신들을 위협하지도 않는 늑대에게 실증을 내고 곧 철창 앞을 떠났다. 관람객들에게 늑대는 동물원에 기거하는 수많은 동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중략)


발사가 되나요?
사내가 총신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게 안에 있던 남자들이 피식 웃었다.
발사가 안 되면 그게 총이오?
사내는 길고 어두운 총구를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가 총을 받아들고 어색해하는 사내를 실탄사격장으로 데리고 갔다. 늑대가 사라진 이후 호황을 누린 업종 중 하나가 실탄 사격장이었다. 사격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사격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는 대학 시절에 전국 규모의 사격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다고 했다. 과연 왕년의 사격선수답게 겨냥하는 목표물을 잘도 떨어뜨렸다. 사내는 그가 가르쳐준 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사내의 총알은 사격장 뒤편의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최초로 방아쇠를 당겼을 때의 느낌은 각별했다. 총구에서 순식간에 뿜어져나간 총알은 이전까지의 사내의 삶에 찍는 요란한 종지부 같았다. 총을 손에 넣자 사내는 반드시 늑대를 잡고야 말리라고 다짐했다. 비로소 자신이 겨냥해야 할 목표가 생긴 느낌이었다. 사내는 늑대를 잡는 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략)


검은 그림자가 괴로운 듯 가끔 숨을 헐떡거렸다. 그럴 때면 사내는 독한 술을 입에 한참 동안 머금고 있었다. 높이 솟은 건물 그림자가 술을 마시고 있는 그들의 어깨 위로 찬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내는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시의 건물들이 드높게 뻗어 있었다. 아무리 고개를 뒤로 젖혀도 고층 건물에 가려진 밤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둥글고 기다란 콘크리트 철창에 갇힌 느낌이었다. 새들이 간수처럼 허공을 돌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가 피를 흘리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피가 묻은 털가죽을 쓸어보았다. 털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새들이 낮게 내려와 울었다. 누군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챈 독수리떼가 다가온 것일지도 몰랐다. 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 그들의 거대한 날개는 도시 곳곳에 기괴한 그림자를 남겼다. 새들은 밤이면 빌딩과 빌딩 사이의 그늘진 곳에 들어가 부리를 묻고 날개를 접었다. 



                         동물원의 탄생



그가 가진 것은 날이 무딘 삽과 자루가 흔드리는 낡은 곡괭이뿐이었다. 공사에 필요한 벽돌과 시멘트, 모래와 자갈뿐만 아니라 소음 발생이 적은 수동드릴까지 모두 빌려야 했다. 아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느릿느릿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그림자가 부엌 유리문에 가득 찼다. 부모가 죽은 이후로 아내는 사십오 킬로그램이나 살이 쪘다. 갑자기 찐 살이 관절과 내장을 망가뜨렸다. 팔과 다리가 시렸고 관절염과 근육통에 시달렸다. 늘어난 위장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먹어야 했다. 아내는 물컹한 몸의 연체동물, 그중에서도 미끈거리는 점액질의 달팽이를 연상시켰다. 쉴새없이 점액을 분비하며 근육발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꿈틀거려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달팽이. 아내는 실로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어다녔고 지나간 자리마다 음식물 찌꺼기를 남겼다. 


(중략)


무엇보다 그는 고분이 무서웠다.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더없이 고마웠다. 덕분에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d시의 고분으로 먹고살았다. 한식날 고분에 심을 잔디를 팔아 일 년을 먹고사는 집도 있었다. 고분의 잡초를 제거하는 공공근로사업이 무의탁노인들의 생계가 되기도 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d시 전체에 산만하게 흩어진 고분 앞에 좌판을 벌여 솜사탕이며 냉차를 팔았다.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 모형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고분은 실로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밥벌이였다.



                         밤의 공사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귀가 찢어질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은 퍼레이드 카에 장착된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왔다. 당나귀를 나팔을, 고양이는 큰북을, 개는 바이올린을, 수탉은 트럼펫을 들었다. 장난감 악기답게 제대로 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k는 탈 안에서 양 볼에 바람을 넣어가며 나팔을 불었다. 나팔은 k의 볼이 부풀거나 말거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s는 손가락으로 밸브를 눌러가며 트럼펫 부는 시늉을 했다. 그저 요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p의 바이올린에서는 팽팽한 플라스틱 줄을 튕기는 마찰음 같은 소리가 났다. 주의해야 할 사람은 e였다. 북은 자칫 세게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e는 두드리는 척하면서 두드리지 않는 기술을 발휘해야 했다. 그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고 떠벌렸으나 아무도 그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실 북을 마구 두드린대도 상관없었다. 퍼레이드카에서 틀어대는 음악소리가 워낙 커서 북소리는 관람객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퍼레이드



김이 카드를 돌렸다. 박은 슬쩍 카드를 확인하고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조는 확인한 카드를 손에 감추고 칩을 만지작거렸다. 세 사람은 신호라도 되는 듯이 서로 눈을 맞췄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간단한 안주로 맥주를 나눠마시며 게임에 몰두했다.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주로 떠드는 건 조였다. 조는 닭을 튀길 때의 기름의 온도부터 시작해서 튀기고 남은 기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전에 양계장에 가본 적이 있어요. 김이 느닷없이 조의 말에 끼어들었다. 암모니아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코를 막으면 숨을 쉬기 위해 입이 벌어지고, 벌어진 입 안으로 똥보다 더러운 닭털이 날아들어왔다고 했다. 조는 아랑곳없이 이번에는 프랜차이즈 체인사업의 문제점에 대해 떠벌리기 시작했다. 김이 다시 조의 말을 끊고 양계장 구조가 아파트와 유사하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는 왜들 닭장 같은 아파트라고 빗대어 말하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아파트처럼 층층이 세워진 닭장에서 닭들은 부리가 잘린 후에도 점점 비대해지는 몸을 견디다 못해 자기 발등을 찍고 다른 닭의 몸통을 쫀다는 말도 덧붙였다. 얘기가 길어지자 박이 슬쩍 인상을 썼다. 조는 입이 쓴 듯 침을 삼켰다. 김은 말이 길어진 걸 자책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다시 묵묵히 손에 든 카드를 뚫어져라 보았다.


(중략)


사실 그는 좋은 상사로 남고 싶었다. 사장과 어울리기보다는 직원들과 편하게 어울리고 싶었다. 남 밑에서 일하는 처지라는 점에서 보면 말단사원이나 부장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중간관리자인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면 사원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척을 했다. 할 수 없이 따라와서는 잠자코 밥만 삼켰다. 참다 못한 한 사원이 에이, 부장님, 갑자기 회식을 하자시면 안 되죠 하고 웃으며 말을 꺼내면 모두들 맞다고 입을 모았다. 밥 한 끼 같이 먹자는 게 회식인가? 그가 되물으면 부장님이 계시면 다 회식이라고 대답했다. 사원들은 미안해하지도 않고 뿔뿔히 흩어졌다. 혹시 김이 잡을까 싶어서 오히려 더 빨리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김은 당황했다. 그런 비교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신입사원 때를 떠올려보았다. 다른 약속을 못 지키더라도 회식을 하자는 상사를 따라나섰다. 그때의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김은 텅 빈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책상 한편에 실패한 기획서들이 살찐 암탉처럼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파티션으로 칸칸이 나눠진 좁은 사무실이 닭장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닭똥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김은 코를 틀어막고 책상 위의 서류더미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자신의 발등을 쪼는 것 같은 이곳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김은 승진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점점 책임이 커지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뭔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오는게 두려웠다. 모든 결정은 이전의 결정을 참고해서 내렸다. 새로운 결정으로 생기는 혼선과 책임을 떠맡고 싶지 않았다. 사원들은 그를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보수적인 상사라고 생각했다. 윗사람들은 주책맞게 부하직원 앞에서 말을 못 가리는데다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 맞는 평가였다.


(중략)


이부자리에는 몸이 빠져나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리 해놓으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일을 해주는 아주머니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왔다. 자기가 방에 들어온 걸 아이가 모르고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는 우선 아이의 책상을 훑어보았다. 학습용 참고서와 문제집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중 한 권을 빼내어 죽 훑어보았다. 문제집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 역시 학창 시절에 그러했으므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원래 자리에 문제집을 꽂아둔 후 아이의 책상서랍을 열었다. 첫번째 서랍에는 볼펜이나 노트 따위가 어수선하게 담겨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별걸 다 모은다고들 했다. 아니는 볼펜이나 노트 따위를 모으는지도 몰랐다. 그는 순서대로 세개의 서랍을 다 열어보았다. 맨 아래 서랍에 생리대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물건인 듯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봉지는 주둥이가 엉망으로 찢어진 채 내용물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은 아이가 초경을 한 것이 언제인지를 떠올려보려고 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아내는 딸아이의 초경을 지켜보지 못하고 죽었다. 아이는 초경의 혼잡스러움을 어떻게 처리한 것일까. 손수 피묻은 팬티를 빨아 널었을까. 슈퍼마켓에서 생리대를 산 후 사용방법을 읽어보고 봉지를 뜯었을까? 생리대 겉봉에 사용방법이 써있긴 한 걸까? 김은 아이의 책상서랍을 닫았다. 방을 뒤졌지만 아이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없었다. 새것인 듯 깨끗한 문제지를 보았고, 쓰지도 않는 펜들이 서랍게 가득 담긴 것을 보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이가 쓰는 생리대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언제 생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달력에는 자신의 생일이나 아비의 생일, 엄마의 제삿날 같은 것은 물론이고 친구의 생일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이는 노련한 도둑처럼 흔적 하나 남지기 않고 자기 방을 치워놓았다. 그 또래라면 흔히 들고 다닐 수첩도 보이지 않았다. 수첩이 있다고 해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닐 것이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아이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이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되는 동안 그가 한 일은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쓴 것뿐이다.



                         금요일의 안부인사



박은 점차 말투나 안경테의 모양, 머리숱, 냄새 같은 것으로 사람을 알아보게 되었다. 점이 많아 얼굴이 검게 보이는 사람이 김이었다. 김은 사무실에서 돌기가 촘촘히 박힌 지압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는 바닥에 닿을 때마다 뭔가 후려치는 소리를 냈다. 몸이 길쭉하고 힘없이 작게 말하는 사람은 최였다. 그는 머리카락이 검고 숱이 많은 곱슬머리였다. 검은 테 안경을 낀 심에게서는 늘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박은 강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와 심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를 구별할 수 있었다. 강은 부인이 아들과 함께 외국에 나가 있어서 늘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다. 그에게서는 담배 냄새뿐 아니라 오래된 빨랫감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박은 냄새나 목소리만으로 구별되는 동료들과 마주 앉아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았고 간혹 눈살을 찌푸리며 강이나 송을 비난하는 무리에 휩쓸리기도 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상대방의 이름을 잘못 말할 때도 있었으나, 누군가의 이름을 잘못 말하는 것은 흔한 실수였으므로 박의 실수가 부각되지는 않았다.



                         분실물



오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등이 모두 꺼진 계단은 어두컴컴했다. 마지막 배달물은 기다란 상자에 담겨 있었다. 상자를 흔들어보았다. 상자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냄새도 나지 않았고 국물이 흐른 자국도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국물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날도 있었다. 국물은 입고 있던 베이지색 면바지에도 얼룩과 냄새를 남겼다. 바닥에 떨어진 국물자국이 흐릿해지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어두운 계단을 올랐다. 여자에게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물건이 배송되었다. 어떤 날은 김치였고 간장게장이었고 고추장이었다. 슈퍼마켓에서 흔하게 파는 라면을 배송한 적도 있었다. 샌들과 웨스턴 스타일의 가죽부츠, 키높이 운동화도 그가 배송해주었다. 통기성이 좋은 속옷세트와 물방울무늬 원피스, 자루가 긴 스팀청소기 따위의 물건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가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주문한 물건은 그 지역에서 유일한 그의 택배회사로 건네졌다. 여자는 그가 배송해준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간장게장으로 밥을 먹은 후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외출할 거였다. 그는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략)


문에 매달린 종이 울리자 내실에 있던 사진사가 나왔다. 사진사는 눈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사진기 앞으로 다가갔다. 사진사와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여기서 살아왔다. 그가 알고 있는 이 도시 출신의 사내들은 성장한 후 대부분 다른 도시로 떠났다. 떠나지 못한 무리는 살림을 꾸리고 일거리를 찾거나 장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신도시 개발 이후의 생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진사 역시 그런 무리 중 하나였다. 아파트 공사가 끝나 입주가 시작되면 배송해야 할 물건이 많아질 거였다. 그는 그렇게 된다면 이 일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많은 물건을 하루 종일 배송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다시 암담해졌다. 차는 언제나 그의 앞날만큼이나 무거운 상자로 가득 차 있었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짐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느낌이었다. 취급소에 낸 가입 보증금을 뺄 수만 있다면 당장 떠날 생각이었지만, 보증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영영 떠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신도시가 들어선 후라면 모를까, 이런 변두리로 들어와 보증금을 내고 택배 일을 맡을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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