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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29. 2016

2007 제 8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박민규 외

수상작
박민규 | 누런 강 배 한 척

수상작가 자선작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굿바이, 제플린

추천 우수작
김애란 | 침이 고인다
김연수 | 모두에게 복된 새해
이현수 | 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들이지 마라
전성태 | 목란식당
천운영 |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편혜영 | 분실물
황정은 | 모자

수상소감
심사평
내가 만난 박민규
박민규론



앞서 읽었던 박민규의 '아침의 문' 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주저앉고 그의 단편들을 다 찾아 읽어보자 해서 보게된 책.

이 책을 읽을때만 해도 박민규의 두번째 단편 소설집(더블)이 이렇게 빨리(햇수는 5년이 걸렸다지만) 등장하리라곤 생각을 못했다.
그래도 그만의 단편을 빨리 읽고 싶은 마음과 (해당 작가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곁다리로 따라오는
국내의 여러 작가들의 단편들이 마치 양념처럼 즐비해 있기 때문에 즐겁게 읽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거의 '박민규의 스페셜북' 이라는 소제목이 어울릴정도로
그에 관해 부가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들이, 지금까지의 작품세계를 잘 분석해 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화보집 수준의 '수상소감' 또한.



수상작

박민규 | 누런 강 배 한 척
박민규의 부친에게 바치는 소설.
황혼 무렵의 주인공이 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나눠준 뒤, 곧 죽을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병이 
앞으로 삼십년은 너끈할거라는 소식을 듣고 문득, 더는 인생을 살기가 싫어져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성공하지 못한 자식을 여럿 거느린, 한 퇴직자의 인생을 1인칭 시점으로 그저 담담하게 그려냈다.
인생이란 참으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줘서 고달프고 또, 재미있다고 느꼈다.
말미에, 주인공의 재같은 마음에 한줄기 불씨가 되어준 안마사의 등장은
박민규 특유의 '뜬금없음' 을 아주 잘 표현해 냈다.
그만큼, 우리의 인생도 참 뜬금없는게 아닐까.


수상작가 자선작

박민규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이미 먼저 나온 박민규의 첫번째 단편집 '카스테라' 에서 읽었던 단편 소설.
시간이 지나 읽은 책을 또 읽는다는건, 지나간 공기의 흐름 뒤에 느껴지는 느낌이 또 다른 무언가를 가져다 준다는걸
새삼 깨닫게 해줬다. 역시나 재미있었고 인간은 참으로 상습적으로 사는게 아닐까 하고 또다시 생각해 보았다.

박민규 | 굿바이, 제플린
변리사를 꿈꾸는 이벤트 회사 직원의 이야기.
그들과 연계한 중소도시의 중소 마트의 오픈 행사때, 중소 마트 사장의 권유로 '제플린' 이라는 중소 기구를 하늘에 띄운다.
중소 마트 사장의 꿈과 이벤트 회사 사장의 꿈과 이벤트 회사 직원의 꿈을 품고.
하지만 이벤트 도중 줄이 끊어져, 주인공은 용달 트럭을 몰고 모두의 꿈을 쫓게 된다.
얼추 예상되는 이야기 전개를 살짝 비틀어, 조금은 허무했던 내용의 소설.
우리가 꾸는 꿈도, 알고보면 바람빠진 풍선 같은게 아닐까.


추천 우수작

김애란 | 침이 고인다
리얼리티가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소설.
심사평에 써있는것과 마찬가지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못썼을 만한 내용들의 이야기이다.
학원에서 국어선생으로 일하는 주인공이 사는 원룸에 느닷없이 여자 후배 하나가 찾아와 함께 동거를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을 홀로 느끼며 우리 삶을 감싸 안고 있는
추상적인 덕목들은 한갓 허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허상들이 지나간 전쟁터 같은 몸속에 남는건, 입 안 가득 고인 '침' 뿐.

김연수 | 모두에게 복된 새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서도,
그 사이 틈바구니에 형성되어 있는 '외로움' 에 대해 이야기한 소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아내의 친구라며 피아노 조율을 하러 온 외국인 친구에게,
아내가 느꼈을 '외로움' 을 목도하게 되는 독특한 소설이다.
언제쯤 인간은 외롭지 않게 되는 걸까.

이현수 | 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들이지 마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 
작가의 연륜이 뭍어나는, 자기 자식을 버린 여자와 남의 자식을 기르는 두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여성이 지니는 상징적이고 선입견적인 시선(여자니까)이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서,
그리고 서로 교감하는 것들로 인해서 나열되고 서술된,
어찌보면 참으로 슬픈 소설이다.

전성태 | 목란식당
몽골의 어느 북한계 식당을 현재 남한 사회의 축도로 설정하고 여러 인물군의 대립을 통해 민족의식의 분열상을 제시한 소설.
일개 식당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몇몇 등장인물들도 그렇지만
한 민족운운하며 식당을 등쳐먹는 남한쪽 캐릭터도 웃겼다.
이런류의 소설들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언제나 '휴전중' 이라는걸 되새기지만,
그저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왠지 어쩔줄 몰라하는 북한측 등장인물들이 측은하게 느껴진다는 느낌이 든다.

천운영 |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이제는 사람의 몸에 일종의 혐오감까지 갖게된 누드전문 사진작가의 이야기.
여행사를 하는 아내의 젊은과 초라한 자신의 늙음.
얼토당토 않게 사진을 가르치게 된 소년 j의 활기와 자신의 초라함.
대비되는 구조 투성이인 이 소설은 그만큼 어느쪽에도 깊게 정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예상을 깨는 결말은 좋았다. 파국은 없었으니, 이만하면 뭐 해피엔딩이다.

편혜영 | 분실물
앞서 읽었던 편혜영의 단편집에서 먼저 읽게 되어,
그 책과 이 책의 공백이 짧아, 읽지 않았다. 

황정은 | 모자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모자가 되었다는 신선한 환상을 잘 살린 소설이지만
설득력도 없고 그저 그 뿐이다.
아버지의 점차적인 부재를 잘 살렸던 '투명인간' 이 상당히 괜찮은 소설이었다는 걸 기억나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면목이 없네.

그리고 고맙네. 대답 대신 악수를 나누고 선배의 손을, 학생부 메달을 움켜쥐던 그 손을, 나는 힘주어 마주 잡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 또 들를 곳이 있어서 말이지. 담배를 한 대씩 나눠 피고 우리는 육교 앞에서 헤어졌다. 굳이 이렇게 좋아야 할까 생각이 들 만큼이나 화사하고, 화사한 날씨였다. 네 개의 가시오가피 박스가, 그것을 든 한 사내의 뒷모습이 화사한 봄 속으로 사라져간다. 황사가 걷힌 하늘을 올려보며, 그래서 잘 왔다고 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더없이 가벼이

화단에선가, 가로수에선가

꽃잎 몇 장이 떨어

진다, 떨어졌다. 왜 인생에선 낙법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중략)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연명(延命)의 불을 끄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박민규 | 누런 강 배 한 척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승일아. 온몸으로 밀어, 온몸으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상습적으로.

                                                 -수상작가 자선작 박민규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드림마트가 번창하면 우리도 꽤나 안정적인 회사가 될 거야. 급여도 어느 회사 부럽지 않게 줄 자신이 있어. 하지만 내 꿈은 더 큰 거란다. 회장님이 드림마트를 세운 이유는 실은 정계 진출을 위한 거야. 문화 공간, 문화 공간 떠드는 이유도 실은 그래서지. 난 회장님이 국회의원이든 시장이든 이 지역에선 모든 게 가능한 분이라 믿고 있어. 그래서 평생을 모실 생각이다. 동민아....... 그땐 니가 이 회사를 맡아줘야 해. 알겠니? 그리고 언젠가는 말이다. 너가 날 도와야 할 때가 반드시 올거야. 우린 평생 같이 가는 거다. 알겠니?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나려는 것이었다. 애꿏은 백미러를 흘기며 나는 눈물을 참았다. 뭐...... 무슨 놈의 이런...... 딸기우유처럼 달콤한 꿈이 다 있단 말인가.

                                                 -수상작가 자선작 박민규 | 굿바이, 제플린



그녀가 화들짝 깨어난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정신병자처럼 외친다. 몇 시지? 늦은 건 아니지만 늦을지도 모르는, 세계 도처에 깔린 우리들의 난처한 시간? 그 어디 즈음의 몇시 몇 분이다. 그녀가 욕실로 향한다. 그리고 변기 위에 앉아 무심코 팬티를 내려본 뒤 당황한다. 생리다. '예정일이 아닌데' 그녀는 잠옷 아래로 팬티를 벗은 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물을 받는다. '오늘은 체육대회가 있는 날인데' 그녀는 오늘 이어달리기 선수로 뛰어야 한다. 회의때, 응원이나 하겠다고 발을 뺐지만, 누구든 한 가지 종목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부장이 달리기 대회 지원자를 물었을 때, 그녀는 지목당하지 않으려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 손을 번쩍 들더니 '저는 박 선생님을 추천합니다' 라고 말했다. 퇴근 시간마다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 죽도록 뛰는 모습을 봤는데, 아주 잘 뛰더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울적한 표정으로 팬티가 물에 불기를 기다린다.

                                                 -김애란 | 침이 고인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다고 했지? 어디까지 배웠어? 베토벤? 모차르트?
글쎄, 체르니 40번까지 들어가긴 했는데...
들어가긴 했다니, 그럼 아직도 거기서 못 나왔다는 말이야?
거기서 끝난 거지, 뭐.
잘은 모르지만, 체르니 40번이라면 그래도 대단한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 대단하지 않아. 체르니 40번은 봉우리가 아니라 오르막 길 같은 거야. 거기서 길이 끝나는 게 아니야. 피아노를 치겠다면 거기서 끝나서는 안 돼. 조금 더 가야지. 그나마 나는 11번까지 치다가 관뒀으니까 더 할 말도 없어.
그런데 왜 거기서 끝난 거야?
고통스러웠으니까.
체르니 40번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건가?
응. 플랫과 샤프가. 체르니 40번을 친다는 건 고통 없이 플랫과 샤프가 네 개 이상 달린 악보를 읽는다는 뜻이거든.
고통이라고 말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건 힘들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힘든 건 마음이 힘든 거고, 고통은 몸이 고통스러운 거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고통이었겠지. 그치? 손가락이 아파서 건반을 두들길 수가 없었으니까. 근데 그건 왜 물어?
그냥.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 대문을 열라치면 창문 너머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그런 풍경. 그런데 피아노 치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건지는 미처 몰랐어.
내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대꾸가 없던 그녀는 코를 훌쩍이는가 싶더니 울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고개를 숙이고 아기처럼 엉엉 우는 그녀를 바라보자니, 내 눈에서도 조금 눈물이 나왔다. 그때 우리는 말하자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처럼. 아기 생각.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 생각 같은 것. 앞으로 언제라도 쏟아지는 눈을 볼 때면 오타루가 떠오르겠다는 생각 같은 것. 그런 것들.

                                                 -김연수 | 모두에게 복된 새해



하하하...... 그래서 석양 무렵이면 사람들이 겸손해지나 봐. 석양은 검을 머리를 흰머리로 바꿀 만큼 힘이 세기도 하지. 왜, 머리 밑이 가려우면 흰머리가 생긴다잖아. 전조의 기미로 머리 밑을 가렵게 만든 다음 핏빛 석양이 대지를 장엄하게 물들이면 검은 머리가 조금씩 세어지지. 진짜로 그렇다니까. 흰머리는 아침도 밤도 아닌 어중간한 저녁 무렵에 생긴대. 인간의 칠흑처럼 검은 머리를 하루아침에 새하얗게 만드는 건 찬란하게 떠오르는 석양이 아니라 이윽고 지고 말 저 석양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석양이 고운 게 아니라 음험하게 느껴지지.

(중략)

큰일을 하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서면 누가 먼저 쑤시고 나오는 줄 아니? 가족이야. 그래서 영웅들은 옥좌에 오르자마자 형제들 목부터 따는 거라고. 누군 따고 싶어서 따는 줄 아냐. 옆에서 깔짝깔짝, 무슨 일을 못하게 사사건건 가로막고 나와요. 신하들은 죄 인정을 해도 형제들은 영웅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아. 한솥밥 먹고 한이불 속에서 뒹군 사이라고 자신과 비슷할 거라 착각하는 거지. 영웅은 고향에서 대접받기 힘들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거라고. 힘들 때 가장 많이 도와주는 것도 가족이고, 곧 물에 빠질 듯 위태로울 때 제일 먼저 등 떠밀어 물속에 빠뜨리는 것도 가족이야.

                                                 -이현수 | 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들이지 마라



좌중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중 크게 헛기침을 놓고 목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쉰 듯 가라앉아 있었다.
"환영해 줘서 고맙소. 당신이 주인이오?"
"네, 그렇습니다."
"마침 주인이 나왔으니 내 한 가지 물으리다."
그는 물 잔을 들어 입을 축인 후 좌중을 죽 훑어보았다.
"식사를 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을 해 둘게 있소. 불쾌히 여기지 마오. 우리가 지불한 돈이 북으로 갑니까?"
"네?"
여사장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나도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삼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삼촌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고 내는 달러가 당신네 장군님한테 가냐 이겁니다."
잠시 여사장이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접대원 처녀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초조한 눈길로 여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여사장이 침을 넘기며 말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우리래 아직 수익이 발생하지 않아 이 식당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한 푼도 평양에 가지 않습니다."
목사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언뜻 스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헷갈렸다.
"솔직한 얘기인지 모르겠소만 하여튼 답변 고맙소."
하고 말해 놓고 목사는 좌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성도 여러분도 들으셨지요?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이 처한 난국을 위해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자 하나님은 사십 일 뒤에 내리실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구국을 위한 고난의 금식기도회를 시작합니다. 자, 들었다시피 정갈한 음식입니다. 오늘은 조국의 안보를 생각하면서 만찬을 즐깁시다."
목사가 말을 마치자 좌중이 기도 준비를 하느라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빼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왠지 진지한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초원의 며칠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세상이 왠지 신들린 듯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성태 | 목란식당



여자의 벗은 몸은 싸구려 트로피 같다. 아무 감동도 없는 육체. 테니스공이건 골프공이건 상관없이 자랑처럼 품은 젖가슴. 언젠가는 허물처럼 벗겨져 버릴 금도금의 맨질맨질한 피부. 승자도 없이 참가자 전원에게 지급될 똑같은 모양의 무의미한 곡선.
스튜디오 안은 코끝이 시릴 정도로 싸늘하다. 이제 막 가운을 벗고 흰색 배경지 위에 올라선 여자가 연신 팔을 쓰다듬는데도 그는 난방기를 틀지 않는다. 그는 여자의 매끄러운 피부에 소름이 돋고 그 소름 하나하나에 솜털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는 자시의 잘못이 무언지도 모른 채 벌을 서는 아이처럼 겁에 지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여자의 두려운 눈동자에 애원의 기미가 보일 때에야 비로소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천운영 |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박은 점차 말투나 안경테의 모양, 머리숱, 냄새 같은 것으로 사람을 알아보게 되었다. 점이 많아 얼굴이 검게 보이는 사람이 김이었다. 김은 사무실에서 돌기가 촘촘히 박힌 지압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는 바닥에 닿을 때마다 뭔가 후려치는 소리를 냈다. 몸이 길쭉하고 힘없이 작게 말하는 사람은 최였다. 그는 머리카락이 검고 숱이 많은 곱슬머리였다. 검은 테 안경을 낀 심에게서는 늘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박은 강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와 심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를 구별할 수 있었다. 강은 부인이 아들과 함께 외국에 나가 있어서 늘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다. 그에게서는 담배 냄새뿐 아니라 오래된 빨랫감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박은 냄새나 목소리만으로 구별되는 동료들과 마주 앉아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았고 간혹 눈살을 찌푸리며 강이나 송을 비난하는 무리에 휩쓸리기도 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상대방의 이름을 잘못 말할 때도 있었으나, 누군가의 이름을 잘못 말하는 것은 흔한 실수였으므로 박의 실수가 부각되지는 않았다.



                         -편혜영 | 분실물



그런 일이 있었어?
하고 첫째와 셋째가 물었다.
있었어.
둘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서러웠던지, 눈앞에서 아버지가 모자가 되었을 때는, 그거 고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것도 지독하네.
셋째가 말했다.
응, 하고 둘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가 기억하고 있는 상황은 이랬다.
학부모 참관일이었는데, 왠일인지 모자가 되어서 사물함 위에 얹혀 있었어.
셋째는 감자전을 한 젓가락 떼어내 우적우적 씹었다.

그게 전부야? 첫째가 물었다.
전부야.
셋째가 말했다.

                         -황정은 |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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