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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30. 2016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출판사 '현대문학' 속에 들어있는 '폴라북스' 에서 2011년 부터 2013년까지 필립 k. 딕(이하 pkd) 의 소설들 중
총 12권의 장편과 한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이 책은 장편들 사이에서 유독 반짝반짝 빛을 낸 단편집이며
그 태생의 비밀은 순전히 영화 '토탈리콜' 의 리메이크를 기념하며 국내 이전 출판본에서도
되도록 중복되지 않은 단편들을 추려 발표된 작품이다.
(사실은 pkd의 단편집 - the collected stories of philip k. dick - 중 다섯번째 권을 번역한 것인데,
운 좋게도 앞서 국내에 발표됐던 여러 단편집들에 소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모여있는 것일 뿐이지만)

폴라북스에서 '이제는 때가 됐다' 며 pkd의 장편들을 국내에 발표하던 순간부터
나 역시 무려 4년여에 걸친 시간을 pkd와 폴라북스와 함께 한 셈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애초에 pkd를 처름 알게된 것도 호흡이 긴 장편보다는 뇌리에 깊게 박히는 '단편' 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예의 익숙함과 반가움, 그리고 pkd특유의 (세상의 종말이라던지 타임머신의 상용화 등의 소재들을)툭. 뱉어내는 화법에
경탄과 경의를 표하며 즐겁게 음미했다.

'옮긴이의 말' 에도 써 있지만, 내가봐도 pkd와 헐리우드는 '애증의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2009년까지 pkd의 장-단편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어 벌어들인 수익이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하는데,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된 pkd의 작품들 치고 원작을 그대로 따라갔던 작품은 단언컨대 단 한작품도 없기 때문이다.
감독과 제작자는 pkd 작품 특유의 '약쟁이' 같은, 원작의 '소재' 만을 차용하며 영화를 원작과 다르게 만들어 나갔었고
pkd의 팬들이 보기에 (아무리 흥행이 잘 됐던 영화라도)영 입맛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에 힘을 실어주는 헐리우드 sf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마이너리티 리포트' 를 영화화 하여 큰 성공을 거뒀었다)' 의 말을 인용하면,

"필립 k. 딕의 이야기에는 실제로 2막이나 3막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 줄거리의 도약을 위한 발판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필립 k. 딕의 팬 분들은 분명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영화 내용의 대부분은 원작의 이야기를 벗어난 곳에서 진행된다."

그래서 pkd의 팬들은 더욱 원작 소설을 손에 들게 되는 것이며,
엔간한 거장이 아니고서야 원작의 느낌을 자기 멋대로 주무르는 탓에 흥행 역시 참패하는 것이다.
(물론 '토탈리콜' 의 리메이크 역시 쪽박을 찼었다).

'헐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라는 웃기지도 않는 수식어가 붙어버린 21세기의 pkd지만,
장편보다 우월한 단편들은 pkd 본인조차도 '단편이야말로 내 장편소설의 정수인 것이다' 라고 하듯이
2014년인 지금 읽어도 늘 새롭고 정상적인 범주를 깨 부수는 통렬한 한방이 되겠다.

실제로 쓸데없는 장면들이 한없이 죽- 늘어서 있는 pkd의 장편들 보다
짧은 지면에서 본인이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딱. 보여주는 단편들이 집중도도 높고 얻는것도 많은 편이다.


아무튼 나는 새로운 옷을 입고 태어난 pkd와 4년여의 시간동안 함께 여행을 하면서
폴라북스 시리즈보다 앞서 읽었던 '유빅' 과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두권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읽은 터라,
단편들로만 이루어진 이 책이 pkd와의 여행에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는 느낌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습관적으로 좋은 구절이 있는 장이 등장하면 해당 페이지의 윗부분이나 아랫 부분을 접고는 하는데,
워낙 주옥같은 부분들이 많아, 덕분에 안그래도 두꺼운 이 단편집이 울퉁불퉁해져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재미있고 환상적이며 마치 어렸을 적 늦은 금요일 밤 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보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은 'tv판 어메이징 스토리' 를 보는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폴라북스에서 언제고 pkd의 다른 단편들(4권) 도 모조리 출간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새로운 번역본의 맛을 즐기려 폴라북스 버젼의 '유빅' 과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를 집어들기 전까진
당분간 pkd와 떨어져 있게 되지만
언제고 현실에 치여 내 머릿속에 상상력이 희미해져 갈때 다시 집어들어 읽게 될 책이다.
 

















작고 검은 상자

『조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머서가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알잖아. 당신 마음에서 읽을 수 있다고.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화면에 머서가 돌을 맞는 장면이 나왔다. 돌이 그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조앤은 감응 상자를 들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그 고통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면- 저 사람이 정말로 죽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우리도 몰라." 레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필립 k. 딕의 불세출의 명작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에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 해당 작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길을 가는 단편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를테면 현자들) 을 외계에서 지구로 온 침략자로 규정지은 그만의 상상이 재미있다.



프눌과의 전쟁

『라이트풋 대위가 헬기를 몰고 워싱턴 d.c.로 돌아오는 동안, 사로잡힌 프눌 중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네 테라인들은 대체 무슨 수로 우리가 어떻게 변장하든 꿰뚫어볼 수 있는 겁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주유소 직원, 폴크스바겐 기어 정비사, 체스 선수, 악기까지 가지고 있는 민요 악사, 정부 관료, 그리고 부동산 판매상으로까지 변장했는데-"
"네놈들 크기 때문이지." 라이트풋이 대답했다.
"그 개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네놈들은 키가 2피트밖에 안 되잖냐!"』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았던 '어메이징 스토리(tv 드라마버젼, '환상특급-twilight zone-' 으로도 불린다)' 를 보는 듯 재미있고 기괴한 엔딩이 무척 흥미를 끄는 단편이다. '저예산 지구 침략 방식' 이라 명명한 딕의 해설이 실소를 머금게 한다.



운이 필요 없는 게임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욕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오락을 향한 갈망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착지는 독특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카니발의 노점상들은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공략하기까지 했다. 터크는 생각했다. 우리가 이성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여분의 식량과 섬유만 거래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양은 아껴둘 수 있다면…… 아이들같이 되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식민지 행성에서의 삶은 지루했다. 물을 나르고, 벌레와 싸우고, 울타리를 보수하고, 계속해서 반자동 로봇 농업 기계를 수리하고 개조하기만 하는 삶…….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곳의 삶에는 문명도, 분위기도 없었다.』


필립 k. 딕의 소설은 늘 이런식이다. 공해와 핵전쟁, 그리고 인구포화로 인해 '쓸모가 없어져버린 지구' 를 대신해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여 새로운 '문명' 을 이끄는 이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거창한 새 행성의 식민 이야기' 가 아닌, 늘 지구를 그리워 하며 편집증과 무력감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처참한 모습의 인류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도 그 궤를 같이 하는데, 무료한 식민지의 일상에 목숨까지 걸며 '여흥' 에 매달리는 인간군상을 제대로 그려낸 수작이다.



귀중한 유산

『물론 그녀가 말한 대로의 폐허였다. 도시는 완전히 목이 잘려있었다. 지상 3피트 이상의 모든 것이 잘려 나간 상태였다. 건물들은 내용물 없이 텅 빈 정사각형 형태로만 남았다. 쓸모없는 고대의 안뜰이 끝없이 늘어서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이 폐허의 광경이 오래전부터 지금 모습 그대로 이곳에 있었던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언제까지, 이 광경은 이대로 남아있을 것인가?』


우주전쟁의 한복판에 낑겨, 결국 멸망해버린 지구의 모습을 참혹하게 그린 소설이다. 우주에서 주어진 임무만 맡고있던 엔지니어가 지구에 내려와 보니, 자신이 '인류' 의 마지막 생존자라는걸 깨닫는 그 '아찔함' 은 정말이지 어떤 기분일까? 그를 달래주려던 다른 외계종족의 다정한 배려가 신기하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은둔 증후군

『"이 가상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유지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매일 식사에 섞인 프로헤다드린을 일정량 섭취하는 거지요. 어쩌면 로스앤젤레스에 가느라 한 번 빼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세계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는지가 설명이 되겠지요. 아니면 박사님 설명대로 탈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경우든 내 짐작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지요. 이건 가상 세계가 맞고, 저는 혈액 성분 검사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도움 없이도 그 사실을 밝혀낸 겁니다. 캐럴은 죽었어요. 박사님도 그 사실을 알지 않습니까. 박사님은 가니메데에 있는 정신과 의사고, 저는 지금 3년째 구속되어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진실 아닙니까?』


필립 k. 딕 특유의 현실과 환상과 꿈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을 그려낸 작품이다. 독자는 이런류의 소설을 읽을때 필립 k. 딕이 설치해 놓은 미로속에 주인공과 함께 빠져, 같이 허우적댄다.



테란 오디세이

『그는 작은 전자식 덫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제작은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짐승들은 이제 평범한 수동식 덫 따위는 피하거나 파괴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양이는 아주 심하게 변이를 일으켰고, 하디 씨는 훌륭한 고양이덫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고양이덫들은 심지어 그의 쥐덫이나 개덫보다도 뛰어난 물건이었다. 이런 짐승들은 아주 위험한존재였다. 놈들은 어린아이가 보이는 대로 덮쳐 잡아먹었다-』


필립 k. 딕의 장편소설 '닥터 블러드머니' 에서 그가 직접 발췌하여 단편소설 버젼으로 짜집기 한 소설이다. 본편보다 훨씬 빈약한 인물소개와 맥을 뚝. 끊어버리는 전개 때문에 제대로된 감상은 할 수 없지만, 핵전쟁으로인해 절망속을 사는 지구의 생존자들의 실상은 정말이지 악몽같다.



약속은 어제입니다

『끔찍한 예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존재하기는 했다. 엥 역시 이런 문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이 타임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그의 입장에서는 이 타임 루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존재했다. 바로 스와블을 발명하는 일을 직접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호바트 위상은 절대 다시 발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효과적으로는.』


'시간여행' 이라는 소재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모종의 오류로 인해 반작용 되어 뒤로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이 엉켜버린 세계를 이야기 했다. 읽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 없던 소설이다. 시간여행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나면 꼭 드는 생각이 있다. '그 때 그걸-혹은 행동- 하지 않았다면 이것-혹은 이 공간- 이 지금 이렇게 내 손에-혹은 이 공간에- 있지 않았겠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무엇보다 선생 본인이 화성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나도, 우리 회사도,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생 마음속에서는 실제 여행과 같을 거예요. 그건 확실하게 보증하죠. 이주일어치의 리콜입니다. 아주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전부 들어가있죠. 이걸 기억하세요. 만약 선생이 실제로 화성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전액을 환불해드립니다. 아시겠어요?』


기억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시대, 정부의 음모와 정작 자신의 기억조차 제대로 믿지 못하는 주인공의 가공할만한 엔딩이 아주 멋진 작품이다. 이 책의 큰 제목이 된 소설이자, 영화로 리메이크됐다.



표지로 판단하지 말지어다

『그래서 그 가죽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군요. 재밌습니다. 그리고 그 워브라는 동물은 워낙 재주가 좋아서 거의 죽이기 불가능할 정도고 말입니다.』


이 소설도 앞서 나왔던 '프눌과의 전쟁' 과 비슷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책의 표지 부분의 재료가 살아있는 외계 생명체라는 설정인데, 그 외계 생명체의 힘으로 인해 책의 내용이 바뀌고, 그 책을 읽는 인간들에게 범 우주적인 메시지마저 준다는 내용이다.



복수전

『"저 투석기가 작동하려면 쇠구슬이 하나 필요할 겁니다. 그게 저 투석기의 탄환이니까요. 당신은 지금 저 기계가 쇠구슬을 손에 넣을 확률을 극단적으로 높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돕는 거예요."
기술자는 우울하게 덧붙였다.
"사실 당신이 없으면 작동하지도 않겠지요. 게임을 하는 사람은 적일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도 한 겁니다. 끝내는 게 좋겠어요, 틴베인. 이 기계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인류에게 전쟁을 일으키려는 핀볼게임' 이라는 웃기면서 헤괴한, 한편으로는 섬뜩한 내용의 소설이다. 무해한척 하고있는 위험하기 짝이없는 '장난감' 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옛 선조들의 믿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인간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내 이론은 그래요. 내 말은, 신이 있다고 해도 악이 승리하거나 사람이나 동물들이 다치고 죽는 일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는 거예요. 솔직히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그리고 당에서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미신도 배격해왔고-』


공산주의, 약물, 섹스, 신을 한데 모아 뭉뚱그려놓은 소설이다. 그래서 덕분에 굉장히 헤괴한 이야기가 되었다.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끔찍한 면이 없지 않다.



전자 개미

『그, 전자 개미라는 것이 뭡니까?"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는 있었으니까.
간호사 중 한 명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유기체 로봇이죠."
"그렇군요."
그의 몸에서 식은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의사는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모르셨던 모양이로군요."
"몰랐습니다."
"매주 전자 개미가 한 명씩은 들어옵니다. 당신처럼 차량 사고 때문에 실려 오든가, 아니면 직접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오는 이들이지요. 당신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인간들과 함께 일하면서,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던 이들 말입니다. 당신 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자신이 로봇인걸 모른다는 내용은 필립 k. 딕의 명작인 '사기꾼 로봇' 에서도 다루었던 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에선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 자체를 좌지우지하게 된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겪는 혼란스러운 엔딩이 추가됐다.



모자란 비버 캐드버리

『"선생님은 아무도 믿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자신이 모든 인류로부터 유리되어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다른 이들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게 만드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하기 전에 잘 생각해보십시오. 답이 네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선생님에게는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필립 k.딕의 단편들 중 가장 이질적인 느낌의 작품. 아마도 여러번의 결혼과 이혼의 소용돌이 속에 살던 그의 병적인 인생사를 알듯 모를듯 나름대로 잘 압축한 단편이 아닐까.



시간 여행자를 위한 작은 배려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누가 나를 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누군가 나를 알아본다면, 그래서 뭐 안 될 거라도 있습니까?"
"사람들은 비록 재진입이 실패했을지라도 미국이 수행한 최초의 시간 여행 발사가 성공적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 명의 미국 시간 여행자가 백 년 후의 미래에 다녀왔다고 말이지요- 작년 소비에트 발사이ㅡ 두 배나 먼 미래에 말입니다. 당신들이 자신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런 강박 관념 때문에 이 시간대에 다시 나타났다고 하는 쪽이 훨씬 덜 충격적일-"』


미국이 달 탐사에 성공한 시대에 삐딱한 시선으로 '시간여행' 이라는 함정을 이용, 독자들을 등장인물들과 함께 무한한 타임루프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이다. '결국 되돌아보면 우리가 이런 사건에 휘말리게 된건 결국 우리가 자초했던 일이다' 라는, 시간여행이 가진 '원인과 결과' 라는 명제안에 이야기는 영원히 돌고 돌게 된다는 내용. 정말이지 매력적인 이야기였는데, 데자뷰인지 아니면 이 소설을 전에 스치듯 읽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단편 영화나 드라마(어메이징 스토리 라던지) 를 본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 소설이라 여기서 이야기 하는 내용만큼 뭔가 묘했다.



전 인간

『이언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팔짱을 꼈다. 지금 감정이 아슬아슬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세상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평범하고 멍청한 아이라도 말이오. 그런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찾아서 매주 카운티 시설에 가곤 하지. 지금 세상은 인구 과밀 현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소.. 9조 명의 사람들이 모든 도시의 모든 골목에서 서로를 죽이는 상상을 하며 살고 있단 말이오. 그래,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부족한 상황이란 말이오. 텔레비전을 봐도, <타임>을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 아니오?"』


인구 과잉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어린 아이들을 '영혼' 이 있고-없고의 기준으로 나눈뒤, '산후 낙태' 를 저지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다만 영혼의 유무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수학 문제를 푸느냐 못 푸느냐에 달려있다는게 참 웃기지도 않지만. 필립 k. 딕은 이 소설을 발표한 직후 엄청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시달렸다고 한다.



시빌라의 눈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후,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를 적어 내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그 외계인을 생각하고는 sf 작가라고 적어 냈다.
물론 가족들은 엄청나게 화를 냈지만, 그때의 나는 가족들이 화를 낼 때면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리고 내 여자 친구인 이사벨 로맥스는 내가 그런 일을 잘하지도 못할 것이며 어쨌든 돈도 벌지 못할 것이고 sf소설은 한심한 것이며 여드름이 난 사람들만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sf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드름이 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피부가 깨끗한 사람들만 소설을 읽을 수 있다면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필립 k. 딕 특유의 신비주의적 색채가 두드러지는 작품.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그의 문제가 역시나 이채롭다.



컴퓨터씨가 나무에서 떨어진 날

『조는 항의했다.
"제 복합아파트는 어떻게 하고요? 제 직업은? 평소에 너무도 익숙해져있던 뒤틀리고 무의미한 제 일상생활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미 모든 것이 변하고 있어요, 조. 나를 만났잖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늙고 못생긴 여자일 줄로만 알았어요! 나는 아무 생각도-"
"우주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있는 법이죠." 조앤 심슨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품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컴퓨터가 인류를 돕는다는 설정을 뛰어넘어, 오류로 인해 인간에게 반항하고 인간을 조종하게 된다는 지금으로썬 벌써 진부해져버린 이야기(하지만 딕의 시절엔 초현실적이었겠지). 필립 k. 딕 소설에 딱 어울리는 우울증을 등에 업고 사는 남자 주인공과, 필립 k. 딕 소설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구원자' 역할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출구는 안으로 향한다

『"저는 탈락한 겁니까?" 바이블먼이 물었다.
"당신은 내 시험에서 탈락한 겁니다. 시험의 목적은 권위에 도전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관은 모든 면에서 '당신이 정신적으로 권위라고 생각하는 존재에게 복종하라' 라는 숨겨진 메시지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학교란 인간 전체를 만들어내기 마련이죠.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반항하는 법이란 명령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다른 사람에게 반항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시가 되는 사람, 본보기를 제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필립 k. 딕 답지 않게 젊은 층의 독자들에게 '체제에 대항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라' 라는 교훈을 주는 단편이지만 그 덕에 이도저도 아닌 작품이 되어버렸다. 그냥 일반적인 작가가 썼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 없는 그런 소설.



대기의 사슬, 에테르의 그물

『레오 맥베인은 자기 돔 안에서 가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별 근심 없이 따뜻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불법으로 자기 돔의 온도 조절 장치를 개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기 돔의 출입구에 추가로 금속 보강을 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느낌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기대감에 차있었다. 오늘은 식량 배달원이 오는 날이고, 따라서 누군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길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다.』


훗날 '성스러운 침입' 이라는 제목의 장편으로 발전되는 소설의 도입부이다. 이미 해당 소설을 읽고 이 단편을 읽은 터라, 예전에 읽었던 장편이 머릿속에 아련히 떠올랐다. 필립 k. 딕은 늘 새로운 행성에 이주한 인간들을 그릴때, 희망과 찬란한 미래에 달뜬 주인공 보다 무기력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염세주의적 삶을 사는 이주민을 곧잘 그려낸다.



죽음에 관한 이상한 기억

『아래층의 신문 자판기에 가서, 나는 오늘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집어 든다. '월요일이 싫어서' 운동장에 있는 아이들에게총기를 난사한 소녀가 법정에 선다. 곧 보호 처분을 받겠지. 그 소녀는 말하자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총을 쏜 거다. 그래, 오늘은 월요일이다. 그 소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날인 월요일에 법정에 갔다.』


소설이 아닌 수필같은 작품. 주로 필립 k. 딕의 주변 실화로 이루어져 있는 줄거리가 흥미롭다.



어서 그곳에 도착했으면

『잠시 상황을 점검하며시간을 보낸 다음, 우주선은 다시 빅터 케밍스와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케밍스 씨." 우주선이 말했다.
케밍스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런 식으로 기억 회복을 힘들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훌륭하게 작업을 수행해줬는데, 내가 전부-"
"잠깐 기다려보세요. 나는 당신의 정신을 재구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여하튼 단순한 기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원하는 것이 뭡니까? 어디에 가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어요?"
"우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어요. 이 여행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케밍스가 말했다.
아, 그렇군. 그게 해답이었어. 우주선은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우주선(컴퓨터) 가 등장하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길고 긴 우주를 여행하면서 냉동 수면에 들어간 예순 명의 인간들 중 아홉번째 인간의 용기에서 잠들지 않고 깨어난 인간을 위해 우주선이 그가 원하는 환상(혹은 꿈) 을 계속 보여준다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딕의 이야기 중 이런 류의 이야기를 선호한다.


라우타바라 사건

『"그 여자의 뭐요?" 지구인 통신사는 우리의 통신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그녀의 육체로부터 양분을 합성해 대뇌에 공급하고 있고-"
"하느님 맙소사. 그런 식으로 두뇌를 보존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두뇌가 무슨 소용입니까? 두뇌 그 자체를 위해서?"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외계인들의 시점으로 지구인들을 바라보는 소설이다. 인류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 그리스도의 현현이 악몽으로 변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외계인의 사고방식

『비상용 영화 테이프가 비치되어있습니다
"그랬지. 고맙다." 그는 테이브에 대해 기억을 해내고는, 버튼을 눌러 테이프 저장 선반의 문을 열었다.
영화 테이프는 보이지 않았다.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고양이용 장난감, 노먼을 위해 가져온 작은 샌드백뿐이었다.』


필립 k. 딕의 사망 바로 전 해에 쓰인 마지막 단편소설이다. 마트에서 고양이 사료를 사다 만난 고등학생의 의뢰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무릎을 탁. 치는 외계인의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 되겠다. 이미 앞전에 읽었던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 라는 청소년용 sf 단편 모음집에서 읽었던 소설이다. 하지만 두번 읽어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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