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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Sep 30. 2016

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실험적인 주류 소설과 sf 사이의 간극을 줄인 작품"

어느날, 듣도보도 못했던 정신나간 국내의 한 출판사가, 미국 내에선 이미 거의 모든 책이 출간된 '필립 k. 딕' 의 장편소설들 중, 미국의 비영리 출판사인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library of america -loa)' 에서 출간된 하드커버판 딕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 열 두편의 장편소설들을 출간하려 다짐했다.

국내에선 유독 인지도가 현저히 낮은 sf 작가인 필립 k. 딕의 소설에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며, 간헐적으로 그의 단편집을 수록한 sf 단편선들을 읽어오던 나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본 작품을 번역한 역자는 '왜 필립 k. 딕인가?' 라는 물음에 '그럴만한 시기가 되었다' 라며 담담하게 대답한다. 국내에 출간된 필립 k. 딕의 여러 단편들과, 가뭄에 콩나듯 출간되던 장편들을 거의 모두 섭렵한 나로썬 느닷없이 등장한 '폴라북스' 가 그저 고맙고 반가웠다(무려 12편이다). 더불어 필립 k. 딕의 세계관에 한발 더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게 해 준 해당 출판사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싶은 심정이다.

'화성의 타임슬립' 은 제목처럼 화성에서 일어나는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창하게 '시간여행' 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생각외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자폐아' 에 관한 내용이다.
필립 k 딕의 모든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는 그저 아주 작디 작은 소스일 뿐. 빈부의 격차가 지구에 비해 더욱 극에 달하고, 황폐한 식민지인 '화성' 에서의 일과에 거의 편집증적인 증상을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감정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극 말미, '어니 코트' 가 환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장면은 필립 k 딕이 그의 다른 소설들 속에서도 자주 이용하는 장면이라 매우 반가웠다.
지구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화성행을 택한 인물들이, 열악한 화성의 삶을 살아가며 어떻게든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내용이 정말이지 필립 k 딕 다운 책이다.
대체적으로 타 행성으로의 '여행' 이나 '이주' 는, 온갖 희망에 쩌든 화려함으로 가득 차기 마련인데 필립 k 딕은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그려내지 않아서 그의 작품들을 몹시 애정한다.


내가 영화나 소설들 중에 판타지까지는 아니고 sf장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익히 다 알고 듣고 봤던걸 또 보면 그게 재미있겠냐고 말이다.
한국도 sf장르에 좀 더 신경 썼으면 좋겠다(국내 sf소설들은 모두 '판타지' 로 치부해 버린 지금이고, 영화는 맨날 죽이고 싸우는거 아니면 사극이나 신파다).















『"내가 어렸을 무렵에는 지금 존재하는 정신병 따위는 없었어. 그래서 정신병은 시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좁은 곳에서 득시글거리고 있는 탓일까. 네가 처음 증세를 보였을 때가 기억나는군. 그보다 훨씬 전에도, 한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부터 넌 다른 사람들에게 차갑게 대하고, 아예 흥미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어. 언제나 침울한 표정이었지. 그런데 지금 바로 그렇게 보여."』



(중략)


『거비쉬! 뼈처럼 하얗고 미끌미끌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구더기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몸 안에서 구더기처럼 서식하는 거비쉬 벌레다. 높은 하늘에서 선회하는 새들이 이것을 찾아내서 먹어주면 좋을 텐데. 층계를 뛰어내리자 발이 푹푹 빠졌다. 제대로 된 판자가 없다. 체처럼 잘게 구멍 뚫린 판자 아래로 흙이 보였다. 검고 차가운 공동空洞에는 거비쉬 때문에 완전히 썩어서 축축한 가루가 된 목재의 잔해가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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