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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Oct 02. 2016

그래도 괜찮은 하루

구작가

'베니' 라는 큰 귀를 지닌 흰토끼를 그리는 구작가(구경선) 의 일러스트집이다.

왜 이 책을 구입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흰 토끼와 작가 본인의 스토리가 잘 담겨있어 읽는 내내 울컥울컥하고 감명 깊었다.


어릴 때 고열로 청각을 잃고 힘들게 들어간 고등학교 마저 자퇴한 뒤 자신의 힘으로 자립하여
작업실마저 얻은 그녀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이런 이야기들을 볼 때 평소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고있는 나조차도

왜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
왜 나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절대 상대적인 게 아니다.

어떤 심리 치료사(비스무리한) 가 타인의 불행과 가난, 궁핍을 보며 '아 나는 그래도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 거라고 한 걸 본 적이 있다.
왜냐하면 
당연한 거 겠지만, 평소 그렇게 여기며 살아가다가 자신보다 월등히 앞선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만났을때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거의 20대 중반, 힘들 삶을 시작하면서 저런 시기를 다 지나온 걸로 보이는데
뭐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질투로인해 마음이 상하는게 느껴지니까 종종.


베니를 그리는 구작가를 보며 수 없이 많은 그녀의 노력과 고생에 나는 참 안일하고 힘들지 않게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처한 상황에 버티는 법만 터득하고 생존하는 법을 찾아냈을 뿐,
여기서 더 딛고 나아가려는 노력은 열정이 활활 타올랐던 20대 때 보다 확실히 덜 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세를 조금 더 가다듬고 집중을 해야할 시기라는게 온 몸으로 느껴진다.

내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내 인생이니까.


당연한 이야긴데
우리는 언제나 당연한걸 당연하게만 여겨서 무뎌진다.

세상에 당연한건 어디에도 없고
모든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는 구작가가 대단하고 부러웠다.




















엄마는 말을 해보지 못한 제 혀가 굳을까봐 설탕을 입 주변에 묻혀 빨아 먹는 연습을 하게 했어요. 계속 움직여야만 혀가 굳질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소리를 낼 수 있게 제 손을 엄마의 목에 갖다대고 그 울림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그러고선 다시 제 손을 제 목에 갖다 대고 비슷한 울림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연습을 쉬지 않았어요.
그냥 놀고 싶었던 저와 하나라도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엄마.




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고, 어설픈 이력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만 멀쩡할 뿐, 어떤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저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어요. 모두에게 거절만 당했어요.
그때의 세상은 저에게 너무 거칠었고 차가운 잿빛이었어요.



텅텅 빈 공간에 저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 했어요. 아무도 없고,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나는 이제 필요 없어진 걸까?'



동사무소에서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민망하게 서 있는데, 친절하게 제게 다가와준 뇌성마비 여직원. 전 그분의 삐뚤빼뚤한 입모양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입모양이 정확해야 그 뜻을 알 수 있거든요. 그녀는 저를 위해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껏 힘을 주어가며 천천히 글씨를 써나갔어요.
그녀는 저와 같은 장애는 아니지만 장애를 지닌 사람으로서 제 장애를,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듯 했어요. 아니, 이해가 아니라 그냥 아는 것 같았어요. 저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가득 담아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열정이 조금씩 되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오래 쓰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였던 전구를 환하게 밝힌 것 처럼.

'나는 왜 재미없게 살고 있었을까?'
'왜 남들이 사는 대로 살려고 했을까?'

'나는 왜 절망만 했던 걸까!'



'괜찮아, 뜻이 있겠지.'
처음에는 스스로 다독이려고 주문을 걸어봤어요. 그렇지만...

왜?
어째서?
왜 나야?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되질 않았어요. 청각장애 하나로도 이제까지 충분히 버겁게 살았는데...
소리가 없어도 예쁜 옷을 사 입는 즐거움, 독특한 소품을 모으는 재미,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소소한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카카오톡 메시지. 겨우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됐는데 많은 행복들을 왜, 모두 앗아가는 거야?

내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눈을 왜 가져가려고 하는 거야?
왜 내 것만 자꾸 뺏어가는 거야?

잿빛으로 느껴졌던 세상이,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느껴졌어요.

'그럼, 앞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걸까?'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그림마저 못 그리게 된다니, 감당할 수 없는 분노만 마음속에 커져갔어요.



그렇지만 그때 필리핀 선교 프로그램을 앞두고 있었고, 이제 와서 취소할 수 없었기에 설명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한, 새까맣게 탄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떠났어요.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줄 수 있겠어요... 그때는 타인을 돌볼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그곳에서 한 소년을 만났어요. 태풍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아이.

"저는 사진작가가 되어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요."

수줍게 웃으며 소년이 제게 말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도 저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써요. 그냥 그림 한 장을 소년에게 그려줬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그 그림이 너무 좋았는지, 밥도 먹지 않고 한참을 보더니, 소중하게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았어요.

그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어요. 제 마음에 가득했던 빨간 덩어리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을 잃은 소년도 저렇게 꿈을 꾸며 좋아하는데 제게는 그래도 많은 것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아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구나... 내 작은 그림이...



다음 날, 퉁퉁 부은 마음으로 일어났는데, 창밖을 보니 첫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첫눈.
생각해보니 한 번도 첫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더라고요. 이제 와서 처음, 첫눈을 보니 그 눈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그리고 아직 첫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무엇을 본다는 건 그냥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너의 뒷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경선아, 눈이 예전보다 맑고 예쁘더라. 그 눈에 네가 눈물을 담았다면 나는 울었을 거다. 그리고... 너에게 배웠다. 어떤 만남이건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지하철 역으로 갔어요. 직장인들이 아침에 가장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 가는 내내 사람들을 보았어요. 거의 다 빠르게 걷거나, 혹은 뛰어가는 모습이기도 했어요. 느릿하게 걷는 사람은 나뿐이었어요. 역에 도착해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달랐어요, 신기하게도. 어떤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머리도 안 말린 채 연거푸 하품만 하는 사람,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 멍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 서류를 열심히 보고 또 보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하철역에는 직장인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두툼한 배낭을 메고, 무거운 책을 들고 있는 학생, 설레는 모습으로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객, 등산객 그리고 큰 보따리를 들고 가는 할머니도 있었어요. 제각각 묘하게 걸음 속도가 달랐어요. 마치, 똑같은 시나리오는 없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어요. 누구나 인생은 제각각이니까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각각 삶의 색깔이 어땠을지 궁금해졌어요. 같은 곳에서 함께 숨을 쉬는 이 시간에 '살아 있음' 을 느꼈어요.

'나, 살아 있구나.'



"내 인생에 '결혼' 이라는 단어는 절대 없을거야."

병명을 듣고 포기한 단어, 결혼.
몇 개월 후, 화장에 관심을 가지면서 립스틱도 바르고, 피부에도 신경을 쓰면서 점점 예뻐진 내 모습을 보고 조금은, 자신이 생겼어요.

'어딘가에 내 짝도 있을지 몰라! 정말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소박한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작은 부케를 들고 예쁘게 사진을 찍어서, 나도 이렇게 예쁘다고 보여주고 싶어졌어요. 어딘가에 있을 내 소중한 짝에게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



"구작가님의 글도 좋고, 그림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구작가님의 목소리가 정말 좋아요."
"어? 왜요?"

정말 의아했어요. 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전 그 말이 너무 신기했거든요.

"구작가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진심이 느껴져요. 열심히 말하려고 하는 진심이요."

처음이었어요. 이렇게 말씀해주신 분이.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제 목소리를 저는 듣지 못하지만 녹음을 해서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이죠. 아직, 이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 빛이 남아 있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여기까지예요. 눈이 안보이게 되면 저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이죠.
누구나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늘 미뤄놓기만 하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오늘이 나의 마지막 하루라면... 어떨까요. 별 생각 없었던 것들이 모두 큰 의미로 와 닿아요.
요즘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햇살을 볼 수 있는게 아주 행복한 거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여러분도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그렇다면 제게 들려주세요. 정말 소중한 오늘 하루, 내 하루만 소중한 게 아니라 여러분의 하루도 정말 소중하니까요. 당신의 버킷리스트를 듣고 싶어요. 대신, 규칙이 있어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의 버킷리스트를 고민해보세요.

그럼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까요.



소리를 잃고 시각을 잃어도 냄새는 맡을 수 있잖아요. 아직 기분 좋은 향기가 남아 있어요. 아직 제겐 많은 감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아직 느낄 수 있어요. 달콤한 향, 상큼한 향, 새콤한 향, 상쾌한 향, 여러 향기에 취해 행복하게 사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 같아요.

계속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으니까요.






+

구작가의 강연을 첨부한다.


https://youtu.be/D3Ww4MjZO1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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