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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Oct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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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21세기는 허세와 감시의 시대입니다.
물론 대중들은 여전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기사 보도를 좋아합니다.
oo녀 나 xx남 따위로 규정되어지는,
자극적이고 생생한 뉴스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타고
바람따라 물따라 전혀 여과되지 않은채
우리의 손 안에까지 흐릅니다.
일찍이 한 평론가가
요즘 사람들은
... '화' 를 참는것에만 길들여져 있어,
무개념을 넘어 파렴치한 저런 행동들이
일종의 사회현상이라 여기며
'분노가 쌓여가는 대한민국' 이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자기 표현' 으로 표출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발달로 인해
남이 하면 허세요, 본인이 하면 근황보고 정도의
모종의 '과시욕' 이 불러일으키는 자신의 '영역' 에,
이름도 모르는 타인이 발을 들여놓는 것에 대한
불쾌함의 표현이라 봅니다.
분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터넷처럼 눈으로 볼 수 있고 각종 매개체를 이용해
손으로 조작할 수 있기에, 유형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타인이 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함부로 침입하여
이유없이 피해를 준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과 더불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동등한 가치를 쌓아가느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존재하지 않던 예전보다,
대중들의 자존감 자체가 월등히 솟아 올랐다는 말입니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나
자존감.
셋 모두 무형이자 유형의 존재 인데 말이죠.
한가지 예로,
제가 오늘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고 칩시다.
근데 극장 매점에서 판매하지 않는
외부 음식물을 손에 들고 있어,
상영관 입장을 거부 당했다면
애초에 외부 음식물을 가방 안에 숨겨가지 않은 저의 실수 일까요?
아니면 한번쯤 봐줄 수 있는건데,
융통성 없이 저를 출입금지시킨 직원의 실수 일까요?
여기서 약간의 말싸움이나 몸싸움이 있었다면
저는 집에 와서 극장에서 있었던 일을
지인들을 비롯,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여기저기에다 퍼 나를 수 있을겁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몸싸움하는걸 촬영했을 수도 있겠군요.
또다른 누군가는 이 사건을 보고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며
또다른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해당 극장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하겠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고 편한것들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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