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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Aug 26. 2017

영화 더 테이블 후기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카페의 하루.

-이 테이블에만 꽃이 있어.

-어차피 죽은 꽃이잖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직 새해라고 해도 되나?

-올해 처음봤잖아요.





그리고 어릴 때 제가 집에서 불렸던 별명은 거북이에요. 느림보 거북이.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게. 말만 해.

-나 너 못 먹여살려.

-그러다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지.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카페의 하루.



영화 더 테이블은 한예리 주연의 '최악의 하루(2016)' 를 연출한 김종관 감독의 차기작이다. 하나의 큰 거짓말 같았던 그 영화 이후, 이런 소소한 일상의 단면을 그린 작품으로 관객에게 또 하나의 실험작을 보여준다.



영화는 별 거 없다. 그저 카페에 하루 동안 여덞 명이 지나가는 이야기가 전부다. 영화의 제목에 걸맞게 카페 안의 '테이블' 에 초점을 맞추는 씬이 많아서 짐 자무시가 연출한 '커피와 담배(2003)' 가 얼핏 스치는 영화다. 하지만 해당 작품이 지닌 공기와는 전혀 다른, 한국의 여자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여배우들과 분위기를 담아냈다.










유진, 오전 열한 시. 에스프레소와 맥주.


헤어진 뒤 스타가 된 전 여자친구에게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증권가 찌라시의 사실여부.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자신과 그녀가 과거에 사귀었던 걸 믿어주지 않는다며 다짜고짜 인증샷을 찍자고 제안하는 것. 현재는 눈코뜰새없이 바쁜 배우의 삶을 살고있는 유진(정유미) 이지만 그래도 예전의 좋았던 기억이 있어, 전 남친(정준원) 과 약속을 잡고 만난 거였는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 타오르는 유진이다. 연예인이 된 자신의 이미지 때문인지 옛 연인에 대한 예의 때문인지 폭발은 하지 않는 그녀. 화를 꾹꾹 참는 정유미의 연기가 애처로움을 자극한다.












경진. 오후 두시 반. 두 잔의 커피와 쵸콜릿 무스케이크.


세 번째 만남에 사랑을 나눈 경진과 민호. 남자는 그 날 이후 곧바로 여자에게 말도 없이 몇 달간 해외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뒤다. 여행중에서도 그녀에게 연락 한 번 없었던 민호. 돌연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할지, 사업을 해야할지 다시 회사에 취직 해야할지 이제 이직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여자에게 횡설수설 있는 말 없는 말 줄줄이 내뱉지만 경진(정은채) 이 바라는 건 몇 달 전 그 날 이후를 민호(전성우) 와 이어가고 싶은 바람뿐이다. 정은채의 머뭇 머뭇거리는 연기가 정말 좋았다. 더 테이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에 특히나 클로즈업이나 카메라의 떨림이 많았던 캐릭터다. 마치 경진의 불안하지만 확답을 듣고싶은 마음을 보여주는 듯 해서 더 좋았다. 경진이 시킨 쵸콜릿 무스케이크는 그녀의 떨리는 마음 때문에 손도 대지 않고 나왔다.











은희.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따뜻한 라떼.


결혼사기로 만난 가짜 모녀 사이인 은희와 숙자. 은희는 여태껏 그래왔던 것 처럼 숙자에게 이것 저것을 설명한다. 자신의 학력, 부모의 배경, 상견례를 하는 당일 날 어머니 역할을 맡을 숙자가 실수하지 말아야 할 이런저런 것들. 대뜸 숙자(김혜옥) 는 은희가 결혼할 남자에 대해 물어보게 되고, 은희(한예리) 는 이번엔 '사기' 가 아닌, 진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라 이야기한다. 그 말을 듣고 문득 자신의 죽은 딸과 은희가 중첩되어 보이는 숙자. 스토리상으로는 네 가지의 이야기들 중에 이 두 사람의 대화가 가장 흡입력이 높았다. 그리고 연기력 또한 너무 훌륭했다. 대화가 이어지며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을 입모양과 눈빛만으로 표현해 내던 한예리와 김혜옥을 보면서 천상 배우구나 싶었다.











혜경. 저녁 아홉 시. 식어버린 커피와 남겨진 홍차.


결혼이라는 선택 앞에 놓여져 있는 혜경과 운철. 두 사람은 이미 헤어진 뒤다. 혜경은 남편이 될 사람과 함께 식장까지 잡아놓은 상태이고 운철은 형편상 그녀를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하에 깔끔하게 정리한 뒤다. 아마 혜경(임수정) 이 큰 결심을 하고 만나자고 했겠지만 운철(연우진) 은 죄를 짓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계속 단호하다. 그가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겠다는 그녀.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냐며 그러지 말라고 종용하는 그.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간 후엔 마지막이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운철도 자꾸만 흔들린다. 현실과 사랑을 눈 앞에 두고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이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걸 아주 잘 표현한 에피소드. 담배를 피우며 웃던 임수정은 정말 담배 심부름이라도 해주고 싶을 만큼 예뻤다.




영화의 분위기나 음악, 테이블, 배우들의 감정묘사, 표정, 몸짓, 말투...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고 훌륭하게 잡아낸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 네 쌍의 대화들 이후, 카페를 나선 다음이 더 궁금해지는 이야기들이다.















+

한예리는 '최악의 하루' 이후에 '은희' 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또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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