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02
13.
스으-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벽 바깥에선 개가 짖는 소리가 귀에 희미하게 들어온다. 소리가 있는건 분명히 개가 짖는 소리일진데 희안하게도 아무 소리도 없는 스으-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문득 진공상태라는 건 어떤 걸까 생각해 본다. 우주비행사나 우주비행사를 준비하는 훈련생들이 진공상태인 우주에 적응하기 위해 나라에서 억대의 자금을 투입하여 만든 일종의 기계에 들어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그런 상태.
무중력.
현실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이 진공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릴 적부터 그런 경험을 해 보고 싶었지만 나 역시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진공상태라는 건 아주 가끔 놀이동산 같은데 있는 굉장히 역동적인 놀이기구에서 나마 아주 살짝 느낄 수 있는 그런 거다.
단조로운 기계음 하나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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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쯤인가 현금과 상품권을 준다길래 가입했던 인터넷 업체에서 체납금을 완납하라는 문자가 왔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에게 줄 돈은 없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알 길도 없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부터였는지 그 뒤로 셋이 서로 나 몰라라하며 살기 시작했는지 난 모르겠다.
분명히 패기 넘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군대를 제대하고부터 시작된 자취생활 초반엔 찌개나 자잘한 반찬 따위도 해 먹고 살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라면이 없으면 밥 자체를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입맛이 변해버렸다. 입맛이 변해버린 건지 타성에 젖은 건지 정말이지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다.
몸을 일으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 일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게 어떤 건지 말 해 보시라. 4개월 다닌 학원에서 작업을 한 게 포트폴리오의 전부 아니냐. 차라리 디자인 말고 영업을 해 보라던 어제 면접관의 말이 떠오른다. 그의 말이 맞다. 나의 포트폴리오엔 노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녔던 직장에서 작업물들을 업무량이 많아 바쁘다는 핑계로 가상 드라이브에 빼곡히 채워 넣지 못한 내 잘못이다.
그래서 뭐?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일침을 놓지 못하고 헤헤거리던 어제의 내가 애처로웠다. 사람의 기억이란 건 단편적이고 파격적인 이미지만 남아있게 되기 때문에 앞으로 몇 해 동안엔 이 기억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것 같다.
내가 이십대도 아니고 너 자리 잡을 때 까지 기다리기 힘들 것 같아. 힘내서 보란 듯이 살아.
그러므로 전화상으로 안녕을 고했던 마지막 여자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라는 건 눈으로 보는 구체화된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듣지 않으면 쉬이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권태라는 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닐까.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팠던 어머니의 보증 덕분에 후불제로 된 버스카드 하나 만들지 못하는 게 지난 10년 동안의 내 상황이다. 현금이 없으면 밖엘 나가지도 못한다는 게 어떤 건지 빚 독촉 전화라는 게 어떤 건지 왜 내가 이런 상황에 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은 한다.
생각은
한다.
이런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고 울어대는 내 몸이 참으로 인간적이구나 싶다. 라면을 끓이러 거실로 가는 와중에 수면 유도제 몇 알을 담고 있던 약봉지가 눈에 밟힌다. 양이 적었는지 아니면 의심의 눈초리로 매섭게 쏘아보던 의사 덕분인지 태연하게 라면을 끓이고 밥을 말아먹게 된다.
고맙다.
12.
한 번에 죽을 수 있을까?
자살클럽에서 만난 K는 나의 물음에 그럴 바엔 이왕이면 굉장히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게 낫지 않겠냐고 대답한다. 어중간한 높이에서 뛰어봤자 재수 없으면 병신만 된다며. 죽기 전에 재미 한번 보고 가자는 K의 제안에 몇 번이나 섹스를 하고 헤어진 뒤로 꾸준히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됐다. 이게 뭔가 싶다가도 늘 이런 식으로 죽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꼬시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손목을 긋는 건 쉬운 게 아니라니까. 동맥 위엔 정맥들로 가득 차 있는데,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도 몇 번이나 힘을 줘서 그어야 한다고.
애초에 K의 오피스텔로 오라는 제안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함께 술을 마시며 K가 제안하는 몇 번의 설득과 설명 끝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성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아니면 정말로 죽기 싫었는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K에게 또 연락이 온다.
이번 주말에 영화 보러 가는 건 어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여중생 이야기래.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가 주연으로 나와서 꼭 보고 싶어. 남자 혼자 그런 영화 보러 가면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자기랑 같이 보러 가고 싶어.
영화를 보고 싶은 건지 나를 보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또 잠이나 자고 싶은 건지 남자들이란 늘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재미가 없다. 내가 언제부터 자기였는지도 재미없고. 이렇듯 내 삶은 재미가 없다. 일이야 대충 회사에 헌신하는 척만 하면 누구나 인정 해 주는 단조로운 짓으로 가끔 신경을 긁는 부장이 몇 있긴 해도 그럭저럭 견뎌낼 만 하지만 이렇다 할 재미가 없다. 손 끝 하나 대지 않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왕대접 하는 남자를 만나도 다 거기서 거기, 남들 다 재미있다는 책이나 영화를 봐도 다 거기서 거기. 뭔가 더 다이나믹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뭔가 알맹이가 빠져버린 인생이랄까.
애당초 집을 나가버린 엄마와 공사판에서 추락사한 아빠의 불운한 그늘을 지워버리며 얼굴만 믿고 몸이나 파는 인생이 되지 않은 건 나로서도 참 기특한 일이긴 하지만 영 재미가 없다. K와는 그런 상황 자체가 웃겨서 여지껏 연락은 하는 상태다. 뭔가 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만남 자체가 이미 생의 끝부분에서 시작된 사이니까 못하면 못했지 더할 건 없어 보인다.
권태적인 삶이라는 게 이런 걸까. 늘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늘 똑같은 버스를 타고 회사엘 가고 늘 똑같은 업무와 늘 똑같은 일련의 반복들.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는 내 삶이 너무 지겨워 버틸 수가 없다. K에게 일단 알았다는 답신을 보내고 오늘도 늘 똑같은 식단으로 늦은 저녁을 먹는다. K도 나에게 ‘늘’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게 되는 날이 오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을 것이다. 많은 남자들에게 늘 그랬듯.
11.
요즘엔 세상도 참 좋아져서 핸드폰에 있는 어플로도 일자리를 찾을 수가 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거절을 받아온 결과, 형식상 겉치레로 올려놓은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곳을 대충 눈치는 챌 정도다. 다 먹은 라면 냄비를 치우지도 않은 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고 여기저기 구인 어플을 뒤적거린다. 전문대학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내 실정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내 나이를 뽑을 처지가 안 되는 회사들은 핸드폰 반대편에서 면접제의마저 단칼에 쳐내는 눈초리가 느껴진다.
내 나이가 어때서
그래. 정말 내 나이가 어때서다. 일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회사입장에서 보면 같은 값이나 혹은 더 싼 값으로, 내가 사장이어도 나보다 더 젊은 사람을 쓰겠다. 정말이지 입장차이가 첨예하게 갈리는 지점이랄까. 그 와중에 연봉을 가장 낮게 부르고 애초에 주6일 근무를 명시하며 기본적인 근무환경조차 제공하지 않는 회사는 나를 뽑아줄 것만 같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이 전화는 고객의 사정으로 당분간 발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할까 싶다. 늘 해오던 대로 어플 안에 있는 지원하기 버튼을 누르고 습관처럼 포털 사이트의 어플을 연다.
어제는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상대로 이런 말을 했으며 오늘은 누가 누구를 흉기로 찔렀고 내일은 비가 내릴 전망이란다. 분명히 이십대의 나는 세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야, 미국 대통령 제정신인가. 허, 저기 우리 옆 동네잖아? 길 다닐 때 조심해야겠군. 내일 출근할 땐 우산을 꼭 들고 나가야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세상과 밀접하게 관계가 없다. 미국 대통령이 무슨 말을 지껄이던 나랑 무슨 상관이람. 밖에 잘 나가지 않는데 누가 피습을 당하던 말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 알 바 아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일에 시니컬한 인간이 되어간다. 지금 당장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이니까.
그렇게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어떤 영화에서 조연이지만 진짜로 본드를 불고 연기 한 것 같았던 어느 여배우가 단독으로 주연을 맡은 작은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이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소재가 마음에 든다. 왜 나라는 인간의 취향은 이런 식으로 결정지어져 버린 걸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릴 적부터 남들이 다 좋다는 건 애써 외면하려 들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걸러지게 되는 이런 느낌.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수억 원의 투자금을 받으며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감독이 찍는 영화들은 영 입맛에 맞질 않는다. 비슷한 소재들과 비슷한 대사와 애드립들. 그리고 역시나 비슷한 연출. 한때 유행했던 강남의 성형미인들 같은 영화들이다. 바로 어제 죽을 각오로 잠이 들었던 사람치고는 주말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게 꽤 건전한 것 같았다. 그래도 주말에 할 일이 생겼으니까.
10.
뭐해?
친구로 저장되어 있지 않은 사용자라며 금전 요구 등의 메시지를 받을 경우 주의하라는 안내멘트 아래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분명 헤어진지 몇 달은 족히 되는 남자인데 시간을 보아하니 술 냄새가 내 방까지 풍기는 느낌.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텍스트를 넣는다.
자.
J는 이전 직장에서 대리로 있던 남자다. 서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사내연애를 했었는데 나름 꽤 오랜 기간 만나왔다. 애초부터 결혼이라는 걸 생각지 않고 연애를 하는 타입이라 J역시 당연히 거쳐 가는 남자겠거니 했는데, 함께 일하던 J의 동기가 우리를 봤다면서 이제는 회사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밝힐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느닷없이 회사에서 청혼까지 했었다. 내 대답은 당연히 긍정적인게 아니었기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회사생활을 하던 J를 종종 지나치곤 했다. 질척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내가 이직을 했지만 조금 분했달까. 그 뒤로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조차 애써 외면하고 살았었는데.
자면서 대답해?
J는 늘 이런 식이다. 본인이 귀여운 줄 알고 귀여운 척. 여자들은 모성본능을 끌어내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절대적인 원칙을 가지고 연애를 하는 남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할 말만 해.
보고 싶다.
술 마셨어? 술 마셨으면 곱게 집에 들어가서 자. 밤늦게 연락하지 말고.
내 메시지를 읽고는 한참 답이 없다. 이 참에 차단하면 되겠지. 라며 메인 창을 보는데 J의 얼굴이 금세 웨딩사진으로 바뀌어있다. 이렇게 찌질한 남자와 1년을 넘게 연애를 했던 내가 한심해 지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왜 꼭 결혼 전에 예전 여자에게 툭. 던지듯이 연락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뭐해? 지금 올 수 있어? 술이나 한잔 하자.
조금 짜증이 나서 K에게 연락을 했다. 시간을 보아하니 술만으론 끝날 것 같지 않을 걸 아는지 차를 몰고 한걸음에 우리 집 앞까지 왔다. 원래 약속은 내일이 아니었냐며 달뜬 얼굴로 운전석에서 묻는 K에게 건조하게 웃어보이곤 시내의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남자라는 것들은 다 똑같다니까? 결혼하기 전에 한 번 더 자볼까 하는 생각에 자기한테 연락한 거라고.
취기어린 얼굴로 일장 연설을 하는 K에게 그럼 너는 달라? 하고 물으니 본인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결혼도 한번 안 해본 주제에. 쉰 소리 그만하고 2차나 가자는 나의 말에 그럴 바엔 방을 잡고 마시잔다. 어차피 내일 영화 볼 거 아니냐면서. 남자란 것들의 머릿속엔 정말이지 술과 섹스밖에 없구나 라고 체념하며 오늘은 안할 거라는 언질을 주고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안주들을 사고 근처의 모텔까지 걸어갔다.
9.
영화는 뭐랄까. 아무것도 없는 단조로운 나의 일상에 작지만 큰 어떤 의미의 그런 것이다. 해외여행 한번 나가보지 못한 나에게 많은 생각의 여지를 열어주는 매체랄까. 뭐, 여행기를 쓴 책이나 에세이등도 유익하긴 하지만 당장 보기 시작하면 엔딩 크레딧까지 보게 되는 영화와 짚지 않으면 절대 읽는 게 시작되지 않는 책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거니까.
어제는 본의 아니게 꽤 많은 시간을 자버린 탓에 오늘 밤엔 다운 받아놓은 영화나 볼 심산으로 편의점에 들러 주전부리들을 사왔다. 없는 살림에 팔천 원, 만원도 아까운 실정이지만 뭐 어떤가. 티끌모아 티끌이라고 작은 것에 목매이면 영영 목매이며 사는 거다. 사실 지금도 돈에 목을 매이며 살긴 하지만.
알고 보면 예전엔 많은 것에 목매며 살았던 기억이다. 다달이 월세를 내고 핸드폰 요금을 내며 세금을 낸다. 적금과 각종 경조사비, 부모님 두 분의 용돈, 친구들과의 유흥비등 멀쩡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꾸준히 지출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려면 꾸준히 수입이 있어야 하는 관계로 지금은 그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렇게 산지 거의 1년 쯤 되니 가끔 연락을 먼저 해 오며 잘 지내냐고 묻던 진짜 친구들조차 이제는 안부도 묻지 않는 실정이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은 느낌.
입버릇처럼 외롭게 혼자 살다 죽어갈 거야라는 말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무섭기도 하다. 본인이 아웃사이더라 자처하는 인간들은 알고 보면 모임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고 나 혼자 살아갈 거라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인간들은 알고 보면 가장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인물이다. 이제는 외로움도 익숙함을 넘어 내 일부분이 되었지만 아주 가끔 가슴 시리게 외로울 때면 영화를 보거나 한다. 적막한 내 집에서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니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어떤 상황이든 거기에 맞게 생활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어디에 가든 어떤 현실이든 나름대로 잘 헤쳐 나가며 산달까. 근 1년 동안 타인과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아버릇해서 말하는 게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다 언어라는 걸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지 벙어리가 되어버리진 않을지 조금씩 걱정되는 실정이다.
8.
넌 왜 죽으려고 했어?
이렇다 할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K를 보고 내 생각이 맞다 싶었다. 한 번 더 묻는 나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계속 마시자며 나를 채근한다. 우리 아빠도 술을 참 좋아했었는데. 돈이나 많이 벌어오라던 엄마의 잔소리에 아빠도 별 대답 없이 술을 마시곤 했다.
남자들을 참 좋겠어. 그렇게 간단히 대답을 회피할 수 있어서.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K가 이윽고 진실을 이야기한다.
사실 백프로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으려는 여자 어떻게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도 아니었고.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을 한번 만나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그 클럽에 가입한 거였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힘들고 어려우니까.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같이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나갔던 거야.
내가 물어본 질문에 맞는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는 자기는 왜 죽으려고 했어?
난 되묻는 남자들이 참으로 싫다. 자신의 대답은 회피한 채 오히려 질문을 한다. 질문조차 새로운 것도 아닌 내가 물은 똑같은 걸로.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는 나에게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한 K에게 대답했다.
그냥 사는 게 재미가 없어. 뭐 더 이상 새로운 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 늘 똑같고 늘 지루하고 그래.
그럼 지금 나하고 있는 것도 재미없어?
응.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본심을 들려주면 실망하기 일쑤니까. 이윽고 K는 졸린 눈을 하고 내 옷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웬일로 정성을 들여 온 몸을 애무해 가는 K에게 참 열심히 사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똑같은 것들뿐인 나의 세상에서 섹스는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약간은 재미있는 구석도 있는 그런 거다. 남자들이야 다들 뻔하디 뻔한 존재지만 누구는 애무를 잘하고 누구는 성기가 크고, 또 누구는 나를 만족 시키려 애 쓰고. 눈에 보이는 뻔한 생물이니까 정성의 차이가 있달 까. 이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애무해 주는 남자는 싫지 않다.
7.
얼마 전에 고인이 된 가수가 어느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랬다. 정확하게 아침 9시에 잠이 드는 야행성 인간이 아침 형 인간보다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세상이 일으키는 소음들에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형태의 삶은 이런 걸까.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나 가끔 야식을 배달하러 다니는 배달원의 오토바이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신 아침에 잠에 들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피곤이 두 배로 몰려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은 오랜만에 아침을 먹고 점심 즈음에 극장으로 향했다.
주말치고는 너무 한산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멀티플렉스엔 사람이 없었다. 이 십대엔 주말에 혼자 극장에 와서 사람이 너무 많아, 기에 눌린 나머지 예매한 영화를 취소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사람이 많이 없었다.
멀티플렉스의 가장 큰 장점은 포인트를 모을 수 있다는 점. 단점은 말할 것도 없이 다양성의 종말이겠지만, 요즘은 선심 쓰듯 작은 영화들에게도 종종 상영관을 내어주는 실정이다. 분명히 그 작은 영화들 중에도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영화와 걸리지 못하는 영화로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하게 되었지만, 아예 상영조차 못하고 VOD로 서비스 되는 영화들이 멀티플렉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덕분에 그나마 조금 줄어든 느낌이랄까.
울릴 리 없는 나의 핸드폰에 불현 듯 진동이 온다. 어머니다.
아들 어디야?
영화 보러 극장에 왔는데요.
누구랑? 여자 친구랑?
아니 혼자.
왜 주말에 혼자 영화를 보러가. 여자 친구는 어쩌고.
여자 친구 없어요. 혼자 보러 올 수도 있지.
저번에 그 애랑 또 헤어졌어?
뭘 또야. 남녀 사이가 다 그렇고 그렇지 뭐.
얼른 결혼해서 손주 낳고 그래야지. 아들 잘 지내나 궁금해서 전화했어. 영화 재미있게 봐.
어머니는 가끔씩 이렇게 뜬금없이 전화를 하고 뜬금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예전에 한번,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 친구를 지나가는 길에 어머니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었는데, 마침 어머니네 교회에서 무슨 바자회 따위를 열었나 그래서 외할머니와 친척 누나네 식구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사시는 아저씨마저 여자 친구를 보게 되는 일이 있었던 적이 있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을 어머니에게 거의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에 다들 적잖이 놀랬던 기억이지만, 나도 내 여자 친구였던 사람도 모두 다 놀랬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건 어머니의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는 것. 살면서 한 번도 어머니의 그런 얼굴을 본적은 없는 것 같다. 참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당신의 아들은 결혼 하기는 다 틀렸답니다 어머니.
6.
아침에 뭔가 뒤척이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니 K가 또 내 아래에서 애무하고 있었다.
피곤하지도 않아?
그럼 난 자기한텐 안 피곤해. 생사를 넘나드는 사이였는데 열심히 사랑해 줘야지.
풋. 하고 비웃음이 나왔다. 생사라니. 별로 죽을 심정도 아니었던 주제에.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다 할 각오도 없이 덜컥 자살클럽에 가입하고 또 덜컥 죽겠다고 같이 죽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나가다니. 죽으려는 이유가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거면 많은 이들이 비웃겠지만 뭐 어쩌나 내가 재미가 없다는데. 하지만 확실히 손목을 긋는 건 꽤 많은 힘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죽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그만큼 노력과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게 참으로 역설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꽤나 아플 것 같다는 느낌.
근데 영화 예매하지 않았어?
시간 좀 있어. 가만히 있어봐. 여자들은 아침에 하는 게 더 기분이 좋다니까.
내 성기를 열심히 애무하던 K는 이윽고 삽입을 시작했다. 어제는 술기운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남자는 어쩌면 이렇게 잠자리에서 마저 한결같을까. 멘트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뱉는다. 무슨 녹음기들 마냥.
여러 자세로 한참을 삽입하다 지쳤는지 잠깐 쉬고 하자는 K의 말에 얼른 씻고 극장에 가자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정은 해야 한다는 되도 않는 앙탈에 이번 한번 뿐이라며 입에다 사정하는 걸 허락했다. 정말이지 남자들은 똑같다니까. 늙으나 젊으나.
5.
극장에 혼자 가면 언제나 가장 바깥쪽의 자리에 앉는다. 그래야 영화가 끝나고 나갈 때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서둘러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입장할 때는 모르겠지만 영화 상영이 끝나고 극장 내에 불이 켜진 뒤에 혼자 계단을 내려가는 게 어찌나 어색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양 옆에 타인이 앉는 것 보다 한쪽에만 앉는 게 덜 어색하달까.
극장엔 작은 영화라 그런지 다른 영화들 때 보다 사람이 더 없는 느낌이다. 멀티플렉스의 또 하나의 단점은 극 상영 전 광고가 너무 길다는 점. 본래 상영시간 전 10여분 내내 광고가 이어진다. 혼자 와서 입장 전에 별로 할 게 없어, 제시간에 입장하는 나로선 참으로 아까운 시간이 아닌가 생각 된다.
채 열 명도 되지 않아 보이는 관람객 수를 보니 이 영화도 망했나 싶지만 작품성이 꽤 있다는 평론가의 말에 역시 예술영화는 대중에게 곧잘 외면당하는 게 숙명이구나 싶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저 멀리 입구에서 한 남녀가 손을 잡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구겨진 정장차림이었고 여자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차츰 한 계단씩 올라오는 그들을 보고 설마 내 라인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영화의 오프닝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남자가 실례 합니다 라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얼른 다리를 최대한 당겨 그들을 지나가게 해주었다. 꽤 날씬한 남자의 다리가 지나가고 이윽고 여자가 지나가는 와중에 하이힐로 내 발을 밟았다.
어머, 죄송해요.
나는 여자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 영화에 집중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내 바로 옆 두 자리를 예매한 모양인 듯 조금 앉아 있다가 관객이 적은 틈에 중간 자리로 옮겨 앉았다. 여자에게 밟힌 발이 조금 아파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정 반대 자리를 예매할 걸 하고 후회했다.
4.
모텔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멀티플렉스에 주차를 하고 점심으로 먹을 겸 해서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자기는 뭐 먹을래? 나는 불고기 버거 세트.
난 치즈버거. 음료는 안 마실래. 이건 내가 살게.
햄버거를 받아들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내가 얘기했다.
근데 영화 시간 괜찮아? 이미 시작 한 거 아니야?
광고 많이 해서 괜찮을 걸? 그나저나 자기 점심으로 빵 먹어도 괜찮겠어?
응, 상관없어.
이따 저녁에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아니 영화보고 약속 있어.
상영관에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며 K에게 말했다.
왜 맨 뒤로 예매를 한 거야? 난 중간이 좋은데.
맨 뒤가 화면이 눈에 다 들어와서 보기 제일 편해. 스크린이랑 가까우면 그만큼 눈에 다 못 담는다고.
K가 예매한 좌석의 맨 끝부분엔 어떤 남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거 봐 내가 좀 일찍 오자고 했잖아.
무슨 청승맞게 남자가 혼자 이런 영화를 보러 오냐. 그것도 주말에. 좀 비켜달라고 하면 되지 뭐. 나만 따라와 자기.
K는 그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들어갔다. 곧이어 나도 따라 들어가는 와중에 발이 엉켜, 남자의 발을 밟고 말았다.
어머, 죄송해요.
아 씨.
그 남자는 정말 아팠는지 욕이라도 할 억양이었다. 이럴 때 옆에 K나 동행한 남자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여자는 살아가는데 여러모로 불편하다. 하필 K가 예매한 좌석은 그 남자의 바로 옆 두 자리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K에게 불편하니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야기 했다.
3.
영화는 너무 재미있었다. 밀양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한 한 여중생의 실화를 그려냈는데 사건 이후 의연하게 남은 생을 살아가는 여주인공이 불쌍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편한 장면은 거의 없고 감독의 표현 센스가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치들. 두 번 세 번 보지 않으면 쉬이 지나치는 장면들을 중요한 지점에 박아 넣은 것들이 많았다. 작은 규모의 예술 영화는 흥행과 반비례하는 이런 장점들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이라 거대 제작비를 받아 영화를 찍는 이들도 배를 주려가며 영화를 찍어봐야 이런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만들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왜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해?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을까봐.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늘 트라우마를 달고 살던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다. 혹시나 하는 마음보단 역시나 죽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보여준 어제의 미수는, 날 이 곳까지 인도해 줬다. 따스한 봄바람이 온 몸에 감기는 게 느껴진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지를 남겨두려 수영을 열심히 배웠지만 역시나 많은 고통 없이 한 번에 가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행인들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2.
영화를 보는 내내 K의 손이 내 젖가슴을 주물렀다. 뿌리치며 째려보니 그제야 팔을 내린다. 영화는 너무나 섬뜩했다. 셀 수도 없는 이들에게 강제로 행해진 성폭행. 나라면 저리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고분고분, 어수룩하게 나머지 생을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결국 생을 마감한 여자 주인공의 친구가 더 현실적이었다. 남자들은 이런 영화를 보며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더듬고 싶을까.
저녁시간 까지 함께 있자며 치근대던 K를 뿌리치고 혼자 담배를 태우러 극장 건물의 옥상에 올랐다. 초봄의 서늘한 따뜻함이 간밤에 녹초가 된 내 몸을 위로해 주는 느낌. 싫지 않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한 번에 깔끔하게 갈 수 있겠네.
라는 생각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찰나 반대편 난간에 서 있는 어떤 남자를 보았다.
1.
이봐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보면 몰라요? 네 모르겠는데요. 신경 끄고 담배나 마저 피시죠. 아니 아니, 죽을 거면 다른데 가서 죽으라고요. 나 목격자 되기 싫거든요. 보기 싫으면 당신이 내려가면 될 거 아냐. 당신 갈 때까지 기다려 줄 테니까 내려가. 당장 죽으려는 사람 치고 여유 많으시네요. 내려가든 안내려가든 내 자유고 일단 그쪽이나 내려와서 담배나 같이 피는 건 어때요? 혹시 당신 아까 극장에서 내 발 밟은 여자 아냐? 아, 그게 그쪽이었어요? 미안해요, 하필 오늘 힐을 신어서. 아무튼 미안하니까 잠깐 내려와 봐요. 내가 그냥 내려간다고 해도 죽으려는 사람을 직접 보곤 영 석연치 않을 거 같거든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녀에게 담배를 받아들고 두 남녀는 한참을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먼저 말을 꺼낸건 그녀였다.
거짓말 같지만 나도 지난주에 죽으려고 했었어요. 왜요? 그냥 사는 게 재미가 없어서. 그나저나 그쪽은 왜 죽으려고 해요? 난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 내 인생이 싫어서. 마치 신이 이제 그만 하라고, 모든 걸 다 포기하라고, 이제 그만 죽으라고 등 떠미는 것 같아서요. 사실 어제도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었는데, 오히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상태거든요. 그런 거 보면 아직 죽을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난 신이나 뭐 그런 건 믿지 않지만 내가 여기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쪽은 아마 지금쯤 저 아래에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는 말이 없다.
죽고 싶다는 건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랑 같대요. 난 여기 죽으러 올라온 건 아니지만 희망 없이 사는 그 쪽이나 재미없이 사는 저나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은 건 똑같은 거 같은데, 어떻게 같이 손잡고 뛰어내려 볼래요?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아니면, 같이 내려갈래요?
그는 물끄러미 무신경한 표정의 그녀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