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두 번째 에세이집이다.
영화평론과 글로만 먹고 살았다면 지금의 이미지가 구축이 됐을까 의문스럽지만 어찌됐든 '방송인' 이자 글쟁이인 허지웅이 여전히 '잘 읽히는' 필체로 써내려나간 자신의 소일담과 여러 영화들에 대한 여전한 헌사,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을 씹는 글로 점철되어 있는 책이다.
분명히 내가 알던 허지웅의 정치적 스탠스는 '중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박근혜가 구속되고 온갖 권모술수(?) 들이 서서히 파헤쳐지면서 허지웅 역시 '상식' 운운하며 당시 여당으로 집권하고 있던 세력을 가차없이 꼬집는다. 이도저도 아닌 입장에서 돌연 '끓는점', '교황의 중립' 따위를 들먹이면서 자신 역시 그 쪽으로 치우친 모습을 보여준다. 일종의 허지웅의 정치적 커밍아웃 정도로 볼 수 있는 글들의 책인데, 어딘가 좀 얄팍해 보인달까.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좌' 와 '우' 중 딱 하나만 고르라고 시키는 이도, 누구를 지지하라고 등 떠미는 이도 없다. 하지만 방송국 물을 먹으면서 실제로 자신이 고정 엠씨로 발탁 됐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물을 먹은 후 부터 소위 '우파' 라고 불리우던 애들에게 스스로 질렸는지 이제 대놓고 (당시의 야당)현재의 정당을 지지한다. 아니, 지지까진 아니더라도 오른쪽 애들이 하는 일들이 마음에 안든다고 시종 툴툴댄다.
그런 허지웅의 뜬금없는 정치색 글들만 아니면 여전히 잘 읽히고 꽤 어려운 수사도 별로 없고 그럴싸한 영화들 한 둘은 건질 수 있는 허지웅의 책이다. 솔직히 앞서 나왔던 '버티는 삶에 관하여' 보다 재미는 없지만, 그 책 보다는 약간 버젼업 된 허지웅의 생각들을 볼 수 있어서 나름 괜찮았다.
'인간 허지웅' 따위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SNS같은걸로 논란 좀 일으키지 말고 방송도 하지말고 그냥 닥치고 글만 썼으면 좋겠다. 이 책에 담겨있던 영화, '자백(2016)' 의 평론에 설득당하며 극장을 찾게 됐을 정도로 여전히 잘 쓴다. 나쁜새끼.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나 자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심취하면 쉽게 뜨거워지고 자기 사정과 감정만이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사정에만 너그럽다보면 남의 사정은 나보다 덜한 별것 아닌 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괴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저거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아주 잠깐 불었던 20대 청년운동의 바람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윽박 아래 수렴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 위로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불리해지고, 그 불리함은 더욱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젊은이들은 거짓 위로로 가득찬 힐링 스폿들로 파편화되어 도피했다. 어른들이 만든 체계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아 그걸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명백한 죽음을 두고도 어른들은 좌와우를 나누어대며 남겨진 자들을 능욕했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근거로 엉뚱한 일을 벌이기 마련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다시 꺼내볼 때마다 전율한다. 마침내 구더어이 밖으로 나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다시 들어가 당장의 목적에 만족하고 설레어하는 풍경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선택일까. 더 권할 수 있는 삶일까.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남자를 비웃었다. 지금은 쉽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아베 고보의 '모래의 여자' 를 읽고.
어떤 면에선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그게 누구 덕이든, 나는 독립적인 어른으로 컸다. 아버지에게 거절당했듯이 다른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게 싫어서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멀쩡한 척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서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좋은 어른은커녕 이대로 그냥 독선적인 노인이 되어버릴까, 나는 그게 너무 두렵다.
왕따를 검색해 보면 연관검색어로 가장 먼저 뜨는 건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왕따를 당하고 있을 때 알려할 곳이나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을 다루는 대처법 같은 건 검색어에 없다. 예방법은 찾아보되 해결책은 포기한 병증. 그것이 지금 한국의 왕따 문제다.
(중략)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어쩌면 왕따 문제에 대해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리 가운데 상당수가 이 문제에서 심정적인 가해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고 그렇게 조직의 결속력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는 왕따라는 것도 일종의 사회화 과정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수영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매를 든 선생님이든 군대 선임이든 회사 선배든. '폭력이 동원되더라도 강하게 통제하고 억압할수록 개인에게 동기가 생기고 세상은 더 잘 굴러간다' 는 걸 겉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요즘 드물다. 그러나 그게 내심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요컨대 나도,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미 인분 교수이거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그 자신만이 그것을 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혹은 선의로 인식할 뿐이다. 악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않는다.
여전히 동성애 반대의 근거로 레위기를 거론하는 가장 고루하고 극성맞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조차 레위기에서 언급된 다른 '부정한 것들',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여성의 월경과 출산으르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지부조화의 좋은 예.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후 넋이 나간 제자들에게 "네가 이 큰 건물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마가복음 13장 2절)" 라고 말했다. 난 그가 한국의 대형 교회와 근본주의자들을 목격하면 지체없이 도장깨기를 시작하리라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나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안에선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관계를 두고는 균형을 찾을 이유가 없다. 확실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무게중심을 찾는다며 진영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은 용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