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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Dec 10. 2017

라이프 사진전 도록

누가 말했던가. 사진전이 끝나도 도록은 남는다고. 그렇다. 실내에서 일반 관객들에게는 사진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지난 라이프 사진전의 감상을 모두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미처 카메라나 스마트폰에 전시 사진을 담지 못한 관객들을 위한 굿즈 코너에서 도록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련의 작태들은 주최 측의 알량한 판매행위로 보기 충분하지만 막상 도록을 구입하고 나면 굉장한 값어치의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다(내가 지불한 돈이 아까워서 이런 멘트-나 혼자 당할 순 없지 식의-를 하는 게 아니다). 도록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사진전 전체를 회고할 수 있을 정도로 볼륨이나 구성이 굉장히 탁월하다. 그저 애교스러웠던 지난 디뮤지엄의 YOUTH전 도록에 비교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세계 역사학자가 기술한 듯한 사진들과 텍스트들 덕분에 라이프 사진전을 관람하고 나온 관객들에게 더없는 반가움을 주는 도록 되시겠다.



참고로 이 포스팅은 일전에 올렸던 라이프 사진전 후기와 상호보완관계에 있다.
(뭔소리여)



http://blog.naver.com/realnogun/221070682609



예고했던 대로(?) 라이프 사진전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도록과 북마크 하나.


꽤 소박한 굿즈지만 두 개의 값을 합치면 꽤 가격이 나간다(...).



라이프지의 사진들 중 아마 가장 유명한 '수병의 키스' 북마크.

두꺼운 종이에 코팅처리된 제품으로 꽤 고급지다.



그리고 라이프 사진전의 도록.

도록 역시 고급지다.


하드커버를 지닌 양장본으로, 총 200페이지에 달하는 텍스트와 사진들로 점철되어 있다.


라이프 사진전 도록


라이프지가 굳건히 밀고 있는(?) 메인 테마인,

TO SEE LIFE;
TO SEE THE WORLD;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라.



그리고 하나 더,

THE GREAT LIFE PHOTOGRAPHY.
위대한 라이프 사진.


..이 새겨져 있다.



200page의 볼륨♥︎



대림미술관이 주최했던 디뮤지엄의 YOUTH전 도록에 비하면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수준이다.

http://blog.naver.com/realnogun/220936258127

(유스전은 무슨 종이 쪼가리들을 도록이라고... 풋)




라이프 사진전 굿즈.



그럼 이제 도록의 페이지를 넘겨보자. 주로 내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사진들 위주로 작성되어있다.






헨리 루스의 1936년 텍스트다.

사진에 단단히 미쳐있던 작자임은 분명핢.






라이프 사진전 도록은 마치 사진전의 그것처럼 총 다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Prologue_To See Life; To See the World;
Face
Time
Change
20th Century Belle Epoque








Prologue_To See life; To See the World;



Photographer Denni Stock @ Andreas Feininger, 1951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진작가 데니스 스톡. 카메라 렌즈와 뷰파인더가 스톡의 눈을 대신하고 있다. 라이프는 1936년, 사진을 중심 언어로 사용하는 저널, 사진으로 소통하는 저널을 표방하면서 세상에 나온다. 원래 라이프는 1886년에 창간되어 그리 인기를 얻지 못한 유머잡지였다. 이 잡지를 헨리 루스(Henry Luce, 1898~1967)가 사들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창간한 것이다. 라이프는 1950~60년대 잡지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969년에는 32명의 스텝과 100명의 계약프리랜서 사진가가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였고, 발행부수는 1350만 부이지만 실제 독자는 4천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미국 잡지 전체 판매액의 14%를 차지하면서 명실공히 최고의 저널로 자리 잡았다.



DC-4 @ Margaret Bourke-White, 1939

맨해튼 상공을 날고 있는 더글러스 4(D-4). 시대를 풍미했던 라이프는 1970년대 들어 유지가 어려워진다. 제작과 관련한 거의 모든 비용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종이와 인쇄비, 임금과 잡지 발송비 등이 상승하면서 이윤이 감소했고, 여기에 광고까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라이프는 국내외의 지국을 폐쇄하고, 고용인 수를 줄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라이프는 TV에 밀려 1972년 12월 29일 최종호를 발간하였고, '그 해의 사진들' 을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 후 1978년 월간지로 복간되었고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다가 2007년 완전히 폐간되었다.






FACE


인간이 손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의 얼굴은 진실을 말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Gen. Douglas MacArthur @ Carl Mydans, 1945

링가옌 만의 미공군 착륙장으로 향하는 배의 갑판에 서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코레히도르 섬을 일본군에 빼앗기며 남긴 말처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Albert Einstein @ Alfred Eisenstaedt, 1947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 홀로 앉아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과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는 것과, 한 인간으로서 전쟁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하는 것이었다. 1999년 <타임>지는 20세기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했다.








Person of Mercy

사람들은 그들의 희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슈바이처를 성자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진실했다. 비록 사람들은 그를 성인처럼 과장되게 묘사하고 있었지만...
유진 스미스, 슈바이처 박사의 람바레네 병원에서의 사진 작업을 기억하며

Dr. Albert Scheitzer @ W. Eugene Smith, 1949

오늘날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아스펜 음악제의 모태가 된 괴테탄생 200주년 행사에 참석 중인 오르가니스트 겸 의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La Resistance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한 위대한 인물이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와할랄 네루, 간디의 장례식을 위해 쓴 조사 중에서


Mohandas Gandhi @ Margaret Bourke-White, 1946

신문 스크랩을 읽고 있는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그 옆으로는 인도 독립 투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물레가 전경을 차지하고 있다.








Troubled Korea Ioses its "Tiger"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던 경교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범인은 우익 청년 안두희. <라이프>의 칼 마이던스 기자가 사고 직후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총알이 지난 창문으로 보이는 경교장 앞뜰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김구 선생의 서거 당일 몰려든 국민들의 애도 물결이 그날의 참담한 분위기를 말해준다. 사진은 <라이프> 1949년 7월 호에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김구 선생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교장 1층 동쪽 방에 빈소를 마련하고 시신을 보고 예를 올리게 하였는데 문상 행렬이 적십자 병원을 지나 서대문 사거리까지 이어졌다.


Kim Koo @ Alfred Eisenstaedt, 1946

경교장 집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사진.






death of Kim Koo @ Carl Mydans, 1949

김구 선생의 암살 직후 경교장 뜰에 모여 애도하는 한국인들.









Freedom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은 대중음악가에게 최초로 주어졌던 대영제국훈장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게 반납하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여왕 폐하, 나이지리아-비아프라 내전에 영국이 개입한 것과 베트남 전쟁에서 영국이 미국을 지지한 것에 항의하며 이 훈장을 돌려드립니다." 존 레논의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당시 영국 정부의 정치, 군사적인 행태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국가로부터의 훈장을 반납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John Lennon @ David McGough, 1972

레코드 플랜트 스튜디오에서 <Mind Games> 앨범을 작업 중인 존 레논.











Champion

챔피언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갈망, 꿈, 비전이 그것이다. 당신은 온 힘을 발휘해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라야 한다. 당신은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기술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무하마드 알리

Cassius Clay @ George Silk, 1962

1963년 3월 13일, 뉴욕 주 뉴욕 시에 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라커룸에서 미국의 헤비급 권투 선수 캐시어스 클레이(1942~2016, 훗날 무하마드 알리로 알려짐)가 더그 존스와의 시합을 앞두고 카메라 앞에서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알리는 이 경기 10회전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A GOLDEN APPLE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
에리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불화의 여신

Marilyn Moroe @ Alfred Eisenstaedt, 1953

집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











Revolution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정치인, 의사였던 체 게바라는 20세기, 전 세계 젊은이에게 혁명과 저항, 그리고 창조적 삶의 아이콘이 되었다. 쿠바 혁명이 달성된 직후 시가를 물고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체 게바라의 사진은 20세기 최고의 '낭만적 혁명가' 로 남아있는 그의 신화를 그대로 드러낸다.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 이라고 믿었던 이 혁명가의 짧았던 생은 열정과 신념으로 가득 찼고, 어떤 경우에도 타협과 안주는 없었다. 하지만 '혁명의 불멸성' 에 대한 그의 신념은 불가능한 꿈이었을까? 체 게바라의 사후 그가 혐오하던 미국의 자본주의가 그를 소비할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들어버린 것은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rnesto "Che" Guevara @ Joseph Scherschel, 1959

불붙인 시가를 입에 물고 왼팔에 팔걸이 붕대를 한 채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 쿠바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Speaking of Pictures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여러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또 한 장의 사진이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은 언어화되지 않는 의미들을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으로 실어 나르면서 소통의 영토를 확장한다.


Philippe Halsman and Salvador Dali @ Yale Joel, 1954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찍고 있는 라트비아 태생의 미국 사진가 필립 할스만. 달리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 양 끝에 만 달러 지폐를 한 장씩 끼운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Try to Remember

아시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 '김시스터즈' 는 김해송과 이난영의 두 딸, 김숙자, 김애자와 그녀들의 사촌인 이민자로 구성된 보컬그룹이다. 김해송이 6.25 전쟁 때 납북되자, 이난영과 이봉룡은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십대인 딸들을 보컬그룹으로 결성했다.

Kim Sisters @ Robert W. Kelley, 1960







TIME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 Margaret Bourke-White, 1937

구호소에서 식량과 의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선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재민들. 아이러니하게도 뒤쪽 간판에는 '세계 최고의 생활 수준 / 미국처럼 사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고 쓰여 있다.









Banality of Evil

누구나 다 그래, 명령받은 대로 하면 되지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실행했던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후 아르헨티나에 숨어있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납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61년 4월 14일, <라이프>지는 그의 감옥 생활을 낱낱이 공개하였고, 온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다. 재판을 받는 동안 아이히만은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 이라고 되풀이했다.
재판 과정을 지켜본 독이의 철학자이자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파시즘의 광기 속에서 악을 행한 것은 그가 특별한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멈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명령을 따름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누구나 다 그래, 명령받은 대로 하면 되지" 라고 치부해버리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든 같은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체주의와 같은 사회적 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념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함을 강조한다. 악이 가진 평범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 가진 생각의 힘뿐이기 때문이다.



Adolf Eichmann @ Gjon Mili, 1961

수감 중인 이스라엘 탈라메 감옥의 운동장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Hugo Jaeger, 1939

1939년 4월 28일, 베를린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독일 국회의원들을 위에서 촬영한 사진. 이날 회의의 기조 연설은 독일의 총통이자 수상인 아돌프 히틀러(통로 쪽 책상의 왼편 맨 앞줄)가 했다. 그는 전쟁에 대한 독일의 입장을 명확히 하라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요구에 폴란드와의 불가침 조약 철폐로 응답했다.






@ margaret Bourke-White, 1945

유럽 유대인 및 기타 민족에 대한 나치의 집단학살에 희생된 남자 수감자들. 움푹 들어간 눈에 수척한 몰골을 한 이들이 가시철조망 울타리를 붙잡고 자신들을 끔찍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꺼내줄 군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 Alfred Eisenstaedt, 1945

승리의 기쁨에 취한 미군이 흰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의 허리를 뒤로 젖히며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고 있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본 패전을 축하하기 위해 타임스 스퀘어로 모여들고 있다.












The Waste Land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S.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Ralph Crane, 1953

1953년, 동베를린 구역에서 온 자동차를 서베를린 경찰이 멈춰 세우고 있다.









The Birth of a nation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행사장에 군중이 가득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 3국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은 순탄치 않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에서 당사자인 대한민국을 제외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한반도 신탁 통치안이 결정되었다. 국내에서는 신탁 통치안에 대한 반대와 찬성 측이 분리되었고,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혼란이 계속되자 1947년 9월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였으나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그 결과 남한에서만 활동했던 '유엔한국위원단' 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의 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전후 신생국가들은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패권 다툼, 독립과 자치를 원하는 약소국의 저항 사이의 혼란 속에서 탄생하였다.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1세계인 자본주의에도, 2세계인 공산주의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외교 노선을 내세웠다. 평화와 자주를 꿈꿨던 제 3세계 국가의 탄생이었다.


@ Carl mydans

대한민국 수립을 알리는 기념식에 참석한 군중들.











1968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1968년 봄, 프랑스를 점령했던 구호이다.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자발적이고 작은 시위에서 시작된 '운동' 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동참하면서 '혁명' 이 되었다. 혁명은 그 이전 시기로는 되돌릴 수 없는 어떤 불가역적 사건에 붙는 이름이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저항이자 변혁이었던 68 혁명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혁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화와 사유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가치체계에 균열을 낸 혁명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기존의 권력과 질서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꿈 꿀 상상력에게 권력을 부여하자고 외쳤던 그날의 혁명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A Bill Ray

체코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수십 대의 소련군 탱크 옆을 지나가는 한 대의 자동차.












The Black List

자유국가에서는 행동에 대해 처벌하지 결코 그가 가진 생각, 의견에 대해서 처벌하지 않는다.
해리 트루먼, 33대 미국 대통령

달톤 트럼보, 찰리 채플린, 레너드 번스타인, 오손 웰스... 이들의 공통점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는 것이다. 종전과 냉전의 시대인 1950년대 미국, 메카시 상원 의원은 문화계 내에 공산주의자의 수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주장했고, 그로부터 공산주의 색출의 광풍이 불게 된다. 시작은 1947년 미 의회의 반국가행위 조사위원회(HUAC)가 할리우드의 극장가, 감독, 배우 등을 불러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인도주의적 단체에 동정적 태도를 보이는 영화 관계자들을 고발할 것을 종용하면서부터였다. '할리우드 텐' 이라는 최초의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졌고, 점점 무차별적으로 확대되었다. 명단에는 할리우드 영화 자본과 제작사의 횡포와 착취에 노조 결성으로 맞섰던 영화인들도 이름을 올렸다.
영화계에서만 300명이 넘는 배우와 작가, 감독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들은 예술과 삶의 터전을 동시에 잃어야 했다. <로마의 휴일>의 작가 달톤 트럼보는 정체를 숨긴 채 작품을 발표해야 했고, 찰리 채플린은 미국을 떠났다.


Charlie Chaplin @ Alfred Eisenstaedt, 1931

연미복을 입은 배우 겸 감독 찰리 채플린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긴 사진.



Martin Luther King Jr. @ Paul Schutzer, 1957

링컨 기념관에서 개최된 '자유를 위한 기도 순례' 에서 연설 중인 마틴 루터 킹 목사.




@ J. R. Eyerman, 1958

자동차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십계> 에서 모세(배우 찰턴 헤스턴 분) 가 팔을 크게 벌리고 있다.













JAZZ: Wrong is right!

재즈에서 틀린 음이라는 건 없다: 음들이 틀린 장소에 있을 뿐이지. 연주하는 그 음이 틀린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오는 음이 그게 옳았냐 그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마일즈 데이비스


@ marie Hansen,1944

재즈 에세이 - 빌 스트리트, 사우스 램파트 스트리트, 베이신 스트리트, 콩고 스퀘어, 압생트 하우스, 유명 재즈 선술집들의 거리 풍경 시리즈 중 하나.



Drummer Gene Krupa @ Gjon Mill, 1960

욘밀리의 스튜디오에서 연주 중인 드러머 진 크루파.





Ray Charles @ Bill Ray, 1966

카네기 홀 콘서트에서 연주하고 있는 맹인 가수 겸 재즈 피아니스트 레이 찰스.













Ship of Miracle

1956년 7월 25일, 미국의 대서양 연안 낸터킷 섬 근처에서 이탈리아의 호화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 호가 침몰했다. 안개가 짙었던 그 밤, 스웨덴의 정기선 스톡홀름 호가 도리아 호의 측면에 충돌했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는 데는 12시간이 걸렸고, 승선해 있던 1,706명의 인원 중 사망자는 46명, 침몰하지 않았던 스톡홀름 호의 사망자는 5명이었다. 배의 크기와 인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사망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도리아 호 선원들의 적절한 대처와 구조 신호를 듣고 달려온 근처를 항해하던 선박들 덕분이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세계 해양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난구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기적을 이뤄낸 또 하나의 배가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이다. 1950년 12월 23일 한국전쟁으로 아비규환이 된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4,000명을 태우고 3일 만에 거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진정한 기적을 이뤄냈다. 항해 중 5명의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한 빅토리 호의 기적은 생명의 존엄함을 잊지 않았던 사람들의 선택이 일궈낸 것이었다.


'Andrea Doria' @ Loomis Dean, 1956

스웨덴의 '스톡홀름 호' 와 충돌한 후 침몰하고 있는 이탈리아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 호'.






@ Time Life Pictures/US Navy, 1950

한국전쟁 당시 흥남을 탈출하기 위해 한국 상륙함 및 수많은 어선의 갑판으로 밀어닥치는 북한 피난민들.













The Age of Loss

JFK가 총에 맞았을 때 세상은 단순히 뒤집힌 게 아니었다; 세상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변형되었다. 미쳐버렸다.
리즈 롱크, 2013년 11월 15일자 <타임> 기고문 중에서.


1963년 11월 22일 존 에프 케네디 암살사건은 미국인들을 경악케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에 싸인 여인의 얼굴과 그의 죽음이 대서특필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현장을 대신하여 시대가 느끼는 비극의 강도를 보여준다. 케네디의 개혁이, 마틴 루터 킹의 인권 운동이, 이유 없이 죽음에 처해야 했던 사람들의 삶이 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암살이라는 극단적 폭력은 개인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송두리째 변형시킨다.



Senator Robert Kennedy @ Bill Eppridge, 1968

머리와 목에 총상을 입고 반쯤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접시 닦기 소년 후안 로메로가 호텔 부엌에서 케네디 옆을 지키고 있다.



@ Carl Mydans

1963년 11월 22일, 통근 길에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읽고 있는 시민들.









CHANGE


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이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역량과 기술을 한데 모아 가늠해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도전이야말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고 우리의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 F. 케네디, 1962년 9월 12일 휴스턴에서 달에 가기로 한 결정에 대한 연설 중에서.





Negro to Black

사진은 차별과 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다.
고든 파크스, <라이프>지 사진기자.

<라이프>지 최초의 흑인 사진기자인 고든 파크스는 소설가이자 작곡가였고, 흑인 최초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제작한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 했던 1969년의 <더 러닝 스토리>와 흑인 영웅의 시대를 연 1971년의 <샤프트> 등이 그의 영화였다. 고든 파크스의 관심은 언제나 인종차별과 빈곤, 사회적 불평등과 같은 것들이었고,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사용하는 그의 사진은 강렬하고 용기 있게 흑인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1863년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철폐되었다고 하지만, 20세기 중반을 훨씬 넘어서까지 미국 흑인들의 인권은 심각하게 짓밟혀 졌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스스로의 인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지난한 투쟁을 펼쳐 나간다. 흑백분리주의에 입각한 버스 좌석에서 부당한 요구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로자 파크스, 운동선수인 토미 스미스와 마하마드 알리, 고든 파크스와 같은 저널리스트와 예술가, 인권 운동가인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무명의 흑인들. 결코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희생과 용기 있는 행동은 미국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고,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Tommie Smith and John Carlos @ John Dominis, 1968

1968년 10월 19일, 멕시코시티 하계 올림픽 200미터 육상경기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한 미국 육상 선수 토미 스미스(중앙)와 존 카를로스(오른쪽)가 시상대에 올라 검은 장갑을 끼고 흑인 차별에 항거하는 블랙 파워 거수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은메달리스트인 호주의 피터 노먼 선수가 서있다.



Marian Anderson @ Thomas D. McAvoy, 1939

흑인이라는 이유로 워싱턴 DAR 콘서트홀 사용을 금지당한 가수 마리안 앤더슨이 링컨 기념관에서 부활절 콘서트를 하고 있다.













Le Smoking

여성에게 입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사랑하는 남자의 두 팔이다. 이 행복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내가 있다.
이브 생로랑.

1983년, 살아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던 이브 생로랑은 평생을 걸쳐 20세기 패션에 헌신한 사람이다.
패션쇼에 음악을 처음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흑인 모델을 세웠던 첫 디자이너였고, 사파리 재킷을 일상복으로 편입시켰으며, 예술 작품을 패션에 덧입혔다. 그러나 그가 1966년에 발표한 '르 스모킹(Le Smoking, 턱시도의 프랑스 용어)' 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남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을 위한 턱시도를 새로운 이브닝 웨어로 제안했던 것이 바로 '르 스모킹' 이다.
르 스모킹은 성의 혁명(the Sexual Revolution) 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에 꼭 맞는 혁명적인 의상이었다. 생 로랑은 르 스모킹을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불렀고 1966년 이래 2002년 은퇴할 때까지 매 시즌 새로운 스타일을 소개하며 이브 생로랑 디자인 하우스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다.


Yves Saint Laurent @ Loomis Dean, 1957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후계자 이브 생 로랑이 디오르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홀로 서 있다.














Gentrification

외롭고 위태롭게 서있는 붉은 벽돌의 건물 주변으로는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있다. 배경에 위치한 20층 건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한 철거였다. 외로운 붉은 벽돌 건물은 하루아침에 공동체가 파괴되고, 개인의 선택은 무시되는 도시계획산업의 우울한 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대도시들은 낙후되어 가는 도시 공간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뉴욕 시 역시 1960년 이후 끊임없이 도시 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개발지상주의적인 도시 재정비 사업이나, 낡고 더러운 도시의 환경 개선을 청소에만 초점을 맞추고 모든 공간을 기능에 의해서만 분리하는 도시 계획은 도시의 원주민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삶의 거처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종종 이러한 계획들은 도시 공간의 공공성보다는 부동산 자본의 이익과 관련되어 진행됨으로써 특정 계급의 도시 독점을 심화시켰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_낙후된 구 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


@ Dmitri Kessel, 1959

1959년 뉴욕시 이스트 60번가의 한 공터에 올로 서있는 브라운스톤으로 지어진 건물 옆으로 몇몇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철거가 진행 중인 이 부지에는 20층짜리 건물이 들어설 계획이다.



Alan Shepard @ Ralph Morse, 1961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 최초의 유인 비행 전 우주복을 입은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
















Wonder Woman

아마도 '원더 우먼' 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다이애나 공주의 모습은 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DC코믹스에서 편집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던 앨리스 마블은 1939년 한 해 동안 윔블던과 US오픈 단식, 복식, 혼합복식 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같은 해 세계 1위에 올랐고 <라이브>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그녀는 DC코믹스에서 편집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며 '원더 우먼' 이라는 대작을 남겼다. 그리고 만화 속의 다이애나 공주가 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것처럼 그녀도 스위스에서 미국의 스파이로 활동하며 나치의 정보를 수집하다가 총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쟁 이후에는 스포츠계에서 여성의 지위와 인종차별에 대해 중요한 목소리를 내었으며, '경쟁과 의지' 에 대한 강연자로서, 또 여성을 위한 스포츠 의류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로서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녀는 진정한 '원더 우먼' 이었다.

Alice marble @ Gjon Mili, 1939

승기를 거두고 테니스 코트장 네트를 펄쩍 뛰어넘는 미국 1위 여자 테니스 선수 앨리스 마블.








20TH CENTURY BELLE EPOQUE


아무튼 난 심장이 좋아. 뇌는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거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고.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나무꾼의 이야기 중에서.





The Walk to Paradise Garden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2년간의 고통스러운 입원생활과 성형수술을 견뎌야만 했다. 그 기간 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고, 다시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1946년 어느 날이었다. 패트릭과 주아니타와 함께 힘겹게 산책을 나갔다. 나는 아이들을 따라 덤불과 나무들 사이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숲 속에 있는 모든 작은 것들에도 어찌나 기뻐하던지! 나는 그 아이들을 지켜봤다. 갑자기 그 순간,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과 내가 그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노래하고 싶어졌다. 패트릭이 무언가를 보더니 주아니타의 손을 잡고 서둘러 앞쪽으로 갔다. 나는 무언가에 몰두해 걸어가는 아이들 뒤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멈춰 섰다. 나는 고통스럽게 카메라와 사투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필름을 카메라에 넣을 수 있을 만큼만의 힘을 달라고...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마다 몰려오는 고통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그 사진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찍어야 하는 사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계속 카메라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억눌렀던 지난 2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새로운 첫 발을 내딛었다."

유진 스미스


Juanita and Patrick

사진가 유진 스미스의 자녀인 주아니타와 패트릭이 손을 잡고 어두운 수풀을 지나 밝은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 사진은 '천국 정원으로의 산책' 이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기획사진전 '인간 가족' 에 출품되어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Blind doctor

1953년 <라이프>지에는 파리 근교 작은 마을의 시골 의사 알버트 네스트(Albert-Andre nast)의 사진이 실렸다. 그가 환자들을 진료하는 일상적인 사진 몇 장이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사진들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네스트는 눈이 보이지 않는 의사였던 것이다. 1931년 그는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지만, 그의 아내 마농과 간호사, 조산사, 비서 등의 도움으로 진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외과 수술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마을 사람들의 신뢰는 무엇보다 큰 원동력이었다. 의사와 환자, 그리고 조력자 사이에 서로의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기의 등에 귀를 댄 그의 사진에는 아기의 숨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가 흐른다. 그리고 그 고요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 기술로만 가능할까' 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듯하다.


Albert A. Nast @ Thomas D McAvoy, 1952

3개월 된 아기의 등에 청진기 대신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맹인 의사 알버트 네스트.





Peter Lawford and June Allyson @ Loomis Dean, 1947

영화 '굿 뉴스' 에 출연한 배우 피터 로포드(왼쪽) 와 준 앨리스(오른쪽) 이 공원에서 춤을 추고 있다.







JUST ONE MORE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Charlie Chaplin /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 W. Eugene Smith, 1952

영화 <라임라이트> 촬영 도중 신나게 바닥을 구르며 요란하게 웃어대는 감독 겸 배우 찰리 채플린.







앞서 포스팅 했던 라이프 사진전 후기에서도 언급했듯,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두 사진(달 근처에서 본 지구 사진과 제임스 딘 사진) 이 빠져있지만 사진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성과 볼륨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알차기에 라이프 사진전 도록은 충분히 소장할만한 책이다. 이렇게 세세하게 작품들이 담겨있던 도록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앞으로도 좋은 사진전에 가면 꼭 도록을 확인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라이프 사진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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