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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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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Apr 15. 2018

신용등급이야기(노군의 경우) feat. 힘이나는 글귀들

살면서 내 명의로 된 신용카드를 한 번도 써 본적이 없다. 신불자의 경우 그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본 경우랄까.


예전부터(지금까지) 우리 친가인 노씨들은 술 때문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여러 어른들은 이미 작고하셨거나 병마와 싸우시는 중이고 우리 아버지도 당연히 그런 케이스셨는데 현재는 2년 째 끊으시는 중.


아무튼 아버지의 주사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모든 트러블은 내가 다 겪었다고 보면 된다. 아버지 개인 프라이버시가 있으시니 그 얘긴 여기까지만.

수십년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어머니였지만 마지막에 가서 내가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 벌이가 없으셨던 아버지 덕분에 2년 동안 어머니가 혼자 계시며 쓸 자금을 만들어 드리느라(?) 대출 보증을 선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지.


그 때 빌리신게 1,800만원인가 그랬다.


제대 후 결국 그걸 못(안) 갚으셔서 그 빚이 보증을 섰던 내게로 우수수 떨어짊.


제대하고 바로 알았으면 내가 뭐라도 했을텐데 근 4~5년을 내게 숨기싦. 덕분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혼자 살고있는 원룸에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요원같은 남자가 밤 8시 쯤에 문을 두들기길래 열어봤더니

노군씨 연체된거 안갚아요?
이러다 당신 큰일나.



본인이 뭐라도 되는 냥 걱정되는 말투와 표정으로 정확히 저렇게 말했었다. 그 때야 법무사에 돈 얹어주며 알아봤더니 우리 어머니께서 원금을 1원도 안갚으셔서 천 팔백이 3,800만원으로 불어나 있던 상태.



지금이야 다 지난 일이라 그렇지만 당시에도 체감은 안나더라. 실제 눈앞에 있는 돈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가 쓴 돈도 아니어서. 저 사실을 알았던 시기에는 숙식하며 일했던 호텔을 나온 뒤였다. 아마 원룸으로 이사하고나서 주민등록 신고를 하니 날 찾아온 듯.
(호텔에 기거했던 1년여 동안은 연수 4단지 반지하로 주소지가 되어있었나 그랬읆)


해서 법무사를 통해서 법원에 가, 여러 절차를 밟으며 개인회생이라는 걸 난생처음 해봤다. 어머니 덕분에.


어머니는 진작에 파산 신청을 하시고 새로운 신용의 삶을 살고 계셨음(주부전용 신용카드도 만드셨음).


살면서 법원에 갈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했는데 저 시기에 진짜 내 집처럼 들락거렸었다. 나도 파산신청을 했었으면 빚도 안 갚고(내가 쓴 돈이 아니니까!) 금세 새로운 신용을 얻을 수 있었거늘 막 일 하고 새 일 찾고 할 때라 어머니가 직장 구하는데 불이익을 얻을 수 있다며 결국 면책만 신청하고 이자를 뺀 나머지 원금, 1,800만원을 5년 동안 매달 25만원씩 다 갚기로 핢.



그렇게 시간은 흘러... 5년이 지났고 최종 완납 판결(?)을 받으러 법원에 마지막으로 갔던게 2~3년 전이다. '나는 변제를 다 했어' 라는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정말 만감이 교차했던 때가 기억이 난다.

제대하고 독립 하면서 부터 신용카드가 없고 후불제 교통카드조차 만들지 못해, 현금이 없으면 밖엘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 이십대 청년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툭하면 대학 동기,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뭐 하나 비싼 걸(끽해야 20만원짜리) 사려고 하면 방세, 세금에 엄두도 못내던 그 때의 내가 떠오른다.


미납 원금 완납판결을 받고 체납 기록이 지워진 상태에도 법원에서의 공공정보가 삭제가 되지 않아, 신용 등급 자체가 조회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체납이 꾸준히 등록되어 있었고. 이 때가 가장 좋같았었는데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때라서 못해도 후불제 교통카드만큼은 발급받고 싶었거늘 제 2금융권에서 조차 대출이 불가했고 체크카드도 겨우 만들던 시기였다.


신용카드 발급을 위해 온라인 신청이라도 할라치면 늘 웹 신청에서 자동 탈락하는 묘기를 부리던 나의 신용.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면서 가장 최근에야 문제의 지점을 찾아냈다. 얼마전에 구입한 아이폰 X를 개통할 때였는데 신용 등급 자체가 나오질 않으니 인터넷이나 핸드폰 회선이 끽해야 한개 정도만 살아있었다.

두, 세 개가 된건 그나마 체납 정보가 사라진 몇 년 전이고. 통신이나 신용보증사의 정책도 매년 바뀌기 때문에 늘 새로운 불편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삶을 살아야 했다.
(예전엔 핸드폰 할부가 안돼, 현찰박치기로 기계값을 내고 그랬음)


아무튼 아이폰 7 플러스에서 아이폰 엑스로 가려는데 서울신용보증이 내 핸드폰 할부를 막아놨기에 기계값을 현찰로 다 내고 사던지 카드로 할부를 하던지 하라고 했었다.

해서 돈도 다 갚은 마당에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서울신용보증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내가 보증을 섰던 건은 끝난걸 지들도 다 알고 있단다. 하지만 돈을 빌렸던 해당 은행에서 '얘 돈 다 냈어' 라는 확인 증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어머니의 보증을 섰던 은행에 전화를 걸어 내 사정을 다 얘기하니 팩스로 보내줄 수 있다고 하더라. 그 은행 납부완료 확인증을 다시 서울신용보증에 보내니, 이번엔 '네가 면책 신청을 한 곳이 법원이니까 법원을 통해서 확인증을 다시 발급받아서 팩스로 보내거라' 하더라.

정말 이 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는지 아직도 진저리가 낢.

(모르긴 몰라도 서울신용보증과 은행 상담사가 전화를 걸면 계속 바뀌어서 10번 정도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내용을 말한 듯)


결국 몇 년 전에 체납금 납부 완료 신청서를 쓰러갔던게 마지막인 줄 알았던 법원을 몇 달 전에 다시 가서 서울신용보증이 원하는 걸 다 신청하고 한 달여가 지났다.


그랬더니 결국



인천지방법원에서 공공정보가 삭제된 걸 볼 수 있었다.


근 13년 동안 신용 없는 삶, 신용카드 없는 삶, 노대출의 삶을 살았던 거다.

신용이 아예 나오지 않던 때가 7~8년 정도.
신용 등급 8등급으로 살았던 때가 5년 정도 된다.



기록 삭제 후 등급이 확 뛰어서 처음엔 6등급, 현재는 4등급 까지 올라갔다.


무등급 - 8등급 - 6등급 - 4등급




살면서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정말 1도 없었다. 다 이유가 있었고 그 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거니 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다만 나는 내 자식에게는 절대로 저런 짓을 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은 머릿속에 분명하게 박히게 됐다.


신불자나 신용등급 낮은 사람들은 알거다.

신용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신용 없이 사는게 얼마나 좋같은지를.




친구들이야 뭐 날 얻어 쳐먹기만 하는 거지새끼라고 무시하는 개새끼들은 안 만나면 됐는데 문제는 연애 할 때였지.

차나 내 집은 고사하고 현금이 없으면 데이트 나갈 차비도 없던 시절이 왕왕 있었어서 돈 때문에 차이고 집안 때문에 차이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아직까지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뭐 내가 당신들에게 그리 해준 것도 없는 놈인데도 여지껏 만나줘서 참 고맙다.



고맙♥︎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를 옆에서 지켜봐온 사람들은 내 삶이 얼마나 거지같았는지 잘 아니까.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랄까.


빛이 보이지 않던 곳에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면 빛을 만날 수 있을거라 여겼다.

힘들어서 때려치고 자포자기 할 때도 있었고 몇 번이나 이런 삶을 살아서 뭐하나 라고 좋지 않은 생각을 먹을 때도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그 시절에(무려 얼마 전 까지임) 음악과 친구들, 그리고 신이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다.


그동안 버틴 나의 근성에 박수를 보낸다.



너무 늦게 풀린게 아닐까 싶지만
이제라도 풀려서 참 다행이다 싶다.


이제야 보통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참고로 최근들어 신용등급 조회를 해본 앱은 바로 토스다.


조회시 발생하는 이력이라던가 하는게 데미지가 없어, 참 조읆♥︎





끝으로,

좋같은 인생이었어도 나에게 늘 힘이 나게 해줬던 구절들이 적혀있는 이미지들을 올려놓고 가겠다.









































결국 나는 우리 부모님들 덕분에
술을 별로 안 좋아하게 됐고
신용카드로 무분별하게 지르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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