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 인간극장 작가의 이야기에서

by 리얼팔

아침 출근길에 들은 세바시 강연은 오랫동안 KBS <인간극장>을 집필해 온 방송작가의 강연이었습니다.

강연자는 방송작가로서 30년, 그중 6년간은 KBS <인간극장>의 작가로 활동해오셨다고 소개했습니다.

무대에 선 그녀의 겉모습은 소박한 50대 주부처럼 보였지만, 말의 톤과 자세에서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다뤄온 사람만의 단단함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의 결이 무척 따뜻하고 진심 어린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힘이 있었고, 그것이 억지스러운 감동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쾌함과 진중함을 적절히 오가며 강연을 풀어갔고, 이야기의 곳곳에는 위트와 따뜻한 울림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습니다. 듣는 내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작가님이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듣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전하는 말들은 단지 콘텐츠의 소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경외와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은 단순한 직업인의 발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태도가 담긴 이야기였고, 저는 그 안에서 참된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연은 한 문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물음은 단순히 자아를 묻는 말처럼 보였지만,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실제 이야기를 통해 그 물음은 제 삶 깊숙히 던지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최애 이야기라고 소개된 이야기는 14년 차 전업주부 남편과 늦깎이 의사가 된 아내의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녀를 갖지 못한 부부는 입양을 통해 가정을 이루었고, 현재는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50대의 부부입니다. 누군가는 이들을 보며 "늦둥이를 낳았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족'에 대한 기존의 틀을 깨는 특별한 철학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철학은 명확했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만의 기준으로 살자.”

남편은 기자라는 안정된 커리어를 과감히 내려놓고, 14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습니다. 아내는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전환점마다 중심이 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지지, 그리고 "꼭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하고, 아내는 살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감동적이었지만, 제가 더욱 인상 깊게 들은 부분은 이들의 진심이었습니다.

전업주부인 남편은 자신이 커리어를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내를 돌보는 일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이의 말 한마디가 그 진심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우리 아빠가 제일 멋있을 때는 빨래를 개고 있을 때예요.”

그 말을 들으며 저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세상이 정한 '멋진 아빠'의 기준이 아닌, 가족 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가족에게도 항상 행복한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최근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가정에는 여러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족은 애증의 관계”라는 현실적인 정의 안에서, 서로의 역할을 딱딱히 구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가족의 행복의 비결이었습니다.

“꼭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어도 가족이 될 수 있다.”

“꼭 누군가의 역할을 정하지 않아도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다.”

강연자는 말했습니다. “가족이란 서로의 짐을 나누는 공동체가 아니라, 짐을 지우지 않는 공동체”라고. 강박과 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가족을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말이지요.


강연의 마지막에 다시 처음의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그 질문을 두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시선을 따라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진정으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자리는 어디이며, 그 행복을 위해 나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 질문들 속에서 ‘살림하는 아빠’가 보여준 당당함과 따뜻함은 제 삶을 향한 새로운 질문이 되었습니다.


한편, 방송작가로서의 강연자의 고민도 흥미로웠습니다. 인간극장은 보통 5부작, 총 3시간 분량의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매 회차가 끝날 때마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구성, 그것이 작가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강태공’처럼 매회 낚시하듯 시청자를 붙들 수 있어야 한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의 이야기는 별다른 장치 없이도 자연스럽게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진심 어린 삶은, 그 자체로도 드라마입니다.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담긴 인간극장 속에서 결국 도달하게 되는 한 지점은 ‘가족’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말합니다. 인간극장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비추지만, 끝내는 모두 ‘가족’의 이야기로 귀결된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인간극장을 ‘가족극장’이라 부릅니다.

가족 안에서의 기쁨과 갈등, 이해와 헌신, 사랑과 회복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이 강연을 통해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정답’을 요구합니다.

“남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여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은, 직업인은...”

그러나 이 부부는 그런 ‘정답’이 아닌, 자신들만의 기준과 삶의 방식으로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삶이지만, 정작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견고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게 진짜 용기 아닐까요?

남들이 정한 틀을 따르지 않는 용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저는 오늘 출근길에, 삶을 다시 바라보는 렌즈 하나를 선물받은 것 같습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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