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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장이 휴 Apr 28. 2021

20. 끊임없이 부유하는 마음과 생각중독

  우리는 왜 고통스러운 것일까. 우리는 왜 잊을만하면 한번씩 사는 게 힘들고 지치는걸까. 왜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설레고 들뜨고 기쁘지 않을까. 그러는 대신에, 지각할까 허둥지둥 바쁘고 쫓기고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에너지가 소진되어가고 지쳐가기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까. 삶이란 원래 고통이고 그렇게 힘든걸까. 우리는 원래 태생부터가 그렇게 삶이라는 이름의 고통을 견뎌내며 가끔 안도와 즐거움을 선물 삼아 살아가야만 하는 딱정도의 존재인걸까. 


  우리가 모두 아주 어릴 적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우리에게 지금처럼 힘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 때 우리는 누구나 하루하루가 설레고, 기뻤다. 사소한 것, 경험하는 것 하나하나가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고 축복이었다. 가장 우리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아기들을 보면, 아기들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고 훨씬 강하고 훨씬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우리 성인들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걸 보면, 어쩌면 우리는 태생 자체부터가 이렇게 고통받으며 살도록 생겨먹은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 태어난 직후의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보면, 고통과 고민에 휩싸여있지는 않은 거 같으니 말이다. 


  나와 당신은 아마 하루에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정말 많은 고민과 생각과 상상들과 걱정들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풍부(?!)하게 해댄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지탱해나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과 고난들이 있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소중한 사명, 즉  '수없이 많은 심각하고 중요한 생각들'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언가 실없는 사람이고 바보같은 사람이라  불린다. 오죽하면 '생각없는 놈'이 누군가를 욕할 때 쓰이는 말일까. 


관건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일지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하루에 몇만가지 이상의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생각없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생각없다는 표현이 통찰과 눈치가 부족하고 안목이 없고 명석하지 못하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하겠으나, 문장 그대로 생각해보면 사실 그런 사람은 우리 주위에 없다. 나는 아직까지 '생각없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관건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뜨고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유있게 이완된 채로 아침시간을 느껴보는 일은,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바삐 씻고 여유가 되면 밥을 부랴부랴 먹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기고 부리나케 나간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몸이 부산한 와중에도 우리 마음은 온갖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오늘 풀어야 할 문제집을 생각하고, 야자시간에 무슨 과목부터 공부할지 생각하고, 학원 과제를 생각한다. 자신의 최근 시험성적들을 떠올리며 한숨짓기도 한다. 기말고사가 며칠 남았는지, 언제부터 시험공부를 할지도 고민한다. 직장인들은 어제 못 마친 보고를 오늘은 할 수 있을지, 그걸로 타박을 듣지는 않을지, 새로 해야 하는 프로젝트는 어떻게 업무가 분배될지를 고민하고 내 승진과 재테크에 대한 고민을 한다. 중장년층이나 그렇지 않더라도 몸이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병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악화되면 어떡하지, 병원비는 어떡하지 등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눈을 뜨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생각에 휩싸인다. 마치 산불이 났을 때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버리는 나무들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생각에 휩싸인다. 이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면서도, 너무 매 순간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서, 우리는 이에 대해 자각하기도 힘들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 못한다. 간혹 몸이나 마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우리의 속마음과 순간순간 우리의 뇌를 스치는 생각들을 불가항력적으로 입밖에 내뱉어버리는 사람들이 살다보면 가끔 보인다. 그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 그때 횡단보도 앞에서든 지하철 안에서든 허공에다 내뱉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소위 '미쳤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단 하나다. 그들은 머릿 속에 순간순간 들어오는 생각들을 스피커 볼륨을 높여 다른 사람도 들리도록 내뱉을 뿐이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불쑥 불쑥 올라오는 그 수많은 생각들을 스피커를 아주 작게 줄인 채 다른 사람이 못 듣게 하고서 우리만 듣고 있을 뿐이다. 단지 소리내서 다른 사람이 들리게 하는지의 차이일 뿐, 사실상 그들과 우리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생각에 중독되어 삶을 잃어가는 우리


  우리는 모두 생각에 중독되어 있다. 그 어떤 다른 것들에 중독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중독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에 왜 중독되어있는지, 생각에 중독된 채 사는 것이 왜 안 좋은지 등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일단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생각에 중독된 채 살면 좋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생각을 하느라'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나와 당신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하자. 마음에 큰 근심이 있다. 가령 투자가 잘못 되어 몇천만원을 잃을 상황이라거나 교통사고를 내서 그 사람이 크게 다쳤는데 아직 전혀 상황정리가 되지 않았다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 위기에 처했다거나 상황은 천차만별일테지만, 어떤 큰 근심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황에서 가족과 도란도란 식사를 하면서 그 자리의 즐거움과 대화, 음식의 갖가지 맛을 음미하는 여유를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조금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이렇게 지금 이 순간에 있지 못하고 생각에 빠져있는 상황은 거의 삶의 모든 순간 일어난다. 회사일 때문에 걱정에 빠진 직장인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면서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이 내 피부를 타고 혈액순환을 돕고 노폐물을 씻어내려주는 산뜻하고 개운한 느낌을 그 순간에 샤워기 앞에 서서 온전히 경험하고 누릴 수 있을까. 나는 대다수의 직장인이 절.대.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샤워기로 샤워를 했다고 해서, 나나 당신이 샤워를 진정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자꾸 놓치게 되는, 결국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것인 '지금 현재'를 자꾸 이렇게 날려먹다가 삶이 다 흘러가버리게 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을 한다. 생각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다. 십중팔구 생각은 과거나 미래로 떠나있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곳이 아니라 훨훨 다른 곳으로 날아가있다.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가 있고,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 속에서 미쳐날뛰는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확률이 크다. 이게 우리의 삶을 잠식해나간다.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는 안 보고 자꾸 저번주에 직장상사나 동아리선배에게 무참히 짓밟힌 최악의 순간들을 계속 떠올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 영화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 영화티켓값만 버리고, 무엇보다 그 시간을 날려먹은 셈이 된다. 그렇게 온갖 생각들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누려야 하는 것들을 자꾸 놓치고 미루게 되면, 우리 삶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시간은 '지금'이고 '현재'이다. 미래는 먼훗날 우리에게 '현재'로서 주어지지, 절대 '미래'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서든 '현재'를 살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 짓을 계속 반복하는 순간, 우리는 사실상 우리 삶을 자꾸 변기에 쳐넣고 물을 내려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의 소중함


  장기적 관점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계획을 하고 꿈을 향해 매진하고 다 좋다. 전부 다 좋다. 하지만, 이건 일단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존재할 수 있을 때, 그 후에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현재에 머물지도 못하는 여러분과 내게,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삶을 그려보고 장기적인 시각으로 현재의 만족을 유보하여 미래를 도모하고 어쩌고 저쩌고는 어불성설이다. 그건 현재 지금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핑계이자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외면하는 일이고,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욜로가 되고 당장의 쾌락에만 집중해라는 말이 아니다. 우선은, 나나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에 가만히 서서 머무는 법을 익혀서 체화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순간을 매순간순간 '지금 현재'로서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5분을 현재에 머물 수 있게 되면, 그게 출발점이다. 자꾸 내년을, 5년 후를 기약하며 지금을 포기하고 현재에 머물지 말라고 종용하는데, 그렇게 이악물고 버티고 아득바득 해대면 점점 이상해져가는 스스로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삶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과정은 현재, 지금 이 순간이고 결과는 미래다. 과정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 엄청난 끈기와 인내심으로 견디고 버텨내는 그 삶이, 뭐 그리 부러울까. 우리가 현재 지금 이순간에 머물며 삶을 누리는 방법을 익히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매순간을 즐기고 누리는 모습의 형태로 어떤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순간을 하나의 일관적인 질서로 이어줄 삶의 방향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갈 것이라는 의미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당장 벗어나야 하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우선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명료하고 선명한 자각과 깨어있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가 갈 방향에 대해 좀 더 현명하고 직관적으로 탐색해나갈 수 있다. 솔직히 나나 여러분이나 잘 모르지 않나. 삶이 어디로 흘러가야 죽을 때 후회가 덜할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일단 냅다 경주마처럼 앞으로 뛰고 보자, 이런 마음을 갖기 전에 한번 멈춰서보자. 의외로, 좋을수도 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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