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정치가 언론을 잡아먹다
<미생>의 빌런, 박과장. 그는 비리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고성을 지르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자신의 선량한 마음과 땀방울을 왜 몰라주냐며, 회사가 비즈니스의 기본 원칙도 모른다며 날 선 태도를 취한다. 결과야 모두 알 테지만 우리의 주인공, 장그래의 기지로 박과장의 비리는 그 자리에서 까발려진다. 숨기고 싶었던 아픈 곳을 그대로 내보이며 말이다.
대통령이 <글로벌 펀드 재정 공약 회의>에 참석했다.
행사가 끝난 뒤 영상기자단의 풀(pool) 영상에 대통령의 발언이 담긴다.
한국의 아침 뉴스 시간에 맞춰 영상기자들은 해당 영상을 각 방송사의 인제스트 룸에 송출한다.
대외협력실 직원이 찾아오고 문제 소지가 될 부분을 체크, 삭제 혹은 보도 자제를 요청한다.
언론인의 직업윤리에 취재원의 요청으로, 특히나 정치권력과 관련한 취재원의 요청으로 취재 자료를 삭제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연히 반대, 한국 시간으로 오전 9시 39분까지 엠바고 (특정 시간까지 특정 기사의 보도 중지)를 걸어두고 그 이후 보도에 관해선 개별 방송사에 맡긴다.
MBC를 비롯 KBS, SBS, JTBC, YTN, TV조선 등 각 방송사는 해당 발언을 '바이든'이라는 자막을 달아 보도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1조는 우리 언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그 책임과 연관되어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언론의 자유는 정치권력을 감시하기 위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보장된 언론의 자유는 시민을 향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투표권을 위해 정치권력을 알 권리가 있다. 부정한 것은 없는지, 부패한 것은 없는지. 시민은 알 권리가 있고 언론은 시민의 대리인으로, 알 권리의 지배자로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언론의 제1 원칙은 '진실의 추구'이다. 생각보다 이 과정은 어렵다. 표면적인 사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 속에 숨어있는 진의를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는 정치권력과 끊임없이 진실 추구를 위해 질문하는 기자들 사이에선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선 보도 현장의 특성상 사소한 오류들 역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때마다 언론이 법적 책임을 다 하여야 한다면 과연 언론은 본래 지니고 있던 진실 추구와 시민 사회를 위한 봉사가 가능할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론과 법은 '진실 오신의 상당성'과 '현실적 악의'라는 이론으로 정치권력을 향한 비판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정치인들 사이에선 언론의 자유를 '거짓말할 자유' 정도로 평가 절하하기도 하는데 이는 해당 정치인이 얼마나 언론감각이 없는지를 나타내는 대목이다. 앞서 말한 '진실 오신의 상당성'은 무조건 적으로 거짓말을 용인해주지 않는다. 크게 2가지 상황에서 예외이다. 첫째, 보도 당시부터 그 사실 자체가 허위임을 알았는가? 둘째, 보도를 검토할 시점부터 해당 사실이 허위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이 넘쳤는가? 이번 사안을 예로 들면 영상 기자단 사무실로 찾아온 대외협력실 직원이 처음부터 "해당 발언과 단어는 '날리면'입니다."라고 했다거나 같이 영상을 본 이들이 "아, 이건 명백하게 '날리면'으로 들리네"라고 했다면 언론사들의 보도는 악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악의'란 악랄한 마음이 아니라 알고도 모른 채 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그렇지 않았다. 대외협력실 직원은 문제의 소지가 있어 영상의 삭제 혹은 보도 자제를 요청했고 기자단과의 협의 끝에 엠바고를 거는 것으로 대체했다. 개별 방송국 역시 엠바고 이후 각자의 판단으로 영상과 자막을 달아 보도했고 보도의 내용은 역시 개별 방송국이 판단한 것이었다. 즉 이번 사안에서 언론은 자신들의 책무를 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악의'란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대통령의 사과 내지는 해명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사안이 쓸데없는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보도가 이루어진 13시간 후 대통령 홍보수석은 '바이든'이 아닌 '날리면'이라는 단어로 들어줄 것을 요청했고 문장 앞에 놓인 욕설은 미국 의회가 아닌 한국 국회를 의미한다고 했다. 사실 여기까지도 다수 국민들은 대통령이 사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결국 한국 국회를 향한 비속어를 내뱉은 건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 대통령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진상 규명을 외치고 있고 여당은 방송국의 조작과 왜곡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MBC 사장, 보도국장, 디지털뉴스팀장, 해당 기자를 고소했다.
여당은 2008년 '제2의 광우병 선동'이라는 프레임을 들고 와 MBC를 집중 공격했다. MBC가 야당과 정언유착을 했고 일부러 자막을 달아 최초 보도했다는 게 여당의 주장이다. 곰곰이 '여당이 왜 이렇게 MBC를 특정 지어 공격할까' 생각해 보 건데 떨어진 지지율의 회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당 입장에선 MBC는 이미 자신들을 공격한 선례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또다시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프레임을 씌워야 흔들리는 지지율을 회복하고 지지층의 더 큰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PD 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민, 형사상 무죄가 선고되었다. 앞서 말한 법리를 기준으로 MBC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으며 국민의 건강을 위해 제기할 수 있는 마땅한 의문과 의혹을 제기한 것뿐이었다. 결국 당시 MBC를 명예훼손의 혐의로 고소한 정부의 태도는 표현의 자유와 공인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억제한 셈인 것이다. 단언컨대 이번 사안으로 법정에 가게 되더라도 정부와 여당은 승리할 수 없다. 공직자가 언론을 상대로 낸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은 앞서 말한 이유로 대체로 이길 수가 없을뿐더러 이미 해당 사안과 똑 닮은 판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MBC 괴롭히기'라고 광고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태풍 피해와 침수 피해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자취를 감쳤고 10여 년 만에 최고를 찍은 환율 소식은 지면에서 명함을 못 내밀고 있다. 스토킹 피해는 여전한데 지혜를 모을 국회의원들은 청력 테스트나 하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가보자.
박과장의 비리를 마주 한 장그래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하나의 수는 그 이전의 수가 원인이 된다. 이 수가 왜 놓였는지 알려면 그 이전의 수를 봐야 한다."
"상대가 반발하는 걸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수 중에 무엇이 아팠는지를 알아야 한다."
"백마진 정도로 따지려고 했던 것을, 사실 그 정도가 아니란 것을 박과장 스스로가 말해주고 있다."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