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평온을 깨어 세상을 바라본다
뉴턴의 3법칙. 이과를 나온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법칙이다. 더러는 문과를 나온 학생들도 각 법칙의 이름 정도는 얼핏 기억하고 있다. 공대에서 언론학과로 전과해서인지 내게도 매우 익숙한 법칙이다. 때로는 익숙함을 넘어 언론 그리고 사회를 볼 때 심심찮게 활용하기도 한다. 매우 자연스럽게 말이다.
"죄송한데...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주말 오후 서울숲이었다. 나는 카메라와 수첩을 든 채 저마다의 휴식을 즐기러 나온 이들을 붙잡고 있었다. 'MZ세대'라는 용어가 가진 문제점을 꼬집어 보고자 영상을 만드는 중이었고, 영상에 담길 시민들의 생각을 취재하고 있었다. 나의 선의와 달리 사람들은 냉담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카메라와 의심쩍게 다가오는 웬 낯선 인간에 열에 여덟은 경계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았다. 다만 웃는 얼굴을 수없이 무시하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열에 여덟은 나를 경계하고 카메라를 피했지만 다행히 또 열에 둘은 흔쾌히 인터뷰에 참여했다. 성공적으로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카메라를 정리했다. 인터뷰를 따야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표정만을 관찰하던 내 시선이 서울숲의 풍경에 다다랐다. 평온했다. 누군가는 산책을, 누군가는 피크닉을,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또 누군가는 공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공간에 있는 열에 둘에게 나는 한낮의 재밌는 경험을 안겨준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열에 여덟에게는 그들의 평온을 일순간 깬 사람이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하고 싶어 한다. 즉 앞선 열에 여덟은 내가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아무런 외부의 힘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 평온을 유지하고 싶었을 그들에게 아마 나는 평온을 깨고 힘을 작용한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려 했던 햇병아리 PD인 나는 그들의 거절로 모종의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을 대가로 얻게 된다.
하지만 나의 질문으로 인해 알짜힘을 받게 된 이들은 이제 움직인다. 그들은 가속도의 법칙에 의해 내가 준 힘에 비례하는 가속도를 얻는다. 붙은 가속도로 인해 그들은 질문에 답변을 생각하게 된다. 또 답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본다. 일순간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경험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그들의 정지해 있던 평온은 깨졌지만 이들에게 전해진 알짜힘으로 인해 그들의 하루는 해 본 적 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극히 일부의 내용이지만 뉴턴의 물리학 법칙에 의하면 저널리즘은 시민의 평온을 깨는 행위이다. 가만있는데 무언갈 물어보고 괜히 일상을 성가시게 만든다. 이 때문에 때론 마치 '사이비'아니냐는 눈빛을 받게 되고 어떤 경우엔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부끄러움을 겪기도 한다. 그런데도 저널리즘은 끊임없이 묻는다.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런 일을 겪으면서까지 우리는 나서는 걸까?
저널리즘의 제1원칙인 '진실 추구'를 대전제로 놓았을 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누군가의 평온을 깰지언정,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게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또 성가시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알아내고 찾아내어 말하는 이유는 이 일로써 사람들이 세상을 더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과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지해 고요한 이들의 평온을 깨 답을 얻는 한편, 또 다른 누군가의 평온을 깨서는 세상이 지금 이렇다고 알리는 것이다.
관성을 깨고 질문을 던진다.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에 가속도가 붙는다. 수없이 오가는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찾게 된 사실이 전해진다. 사과가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한 뉴턴처럼 오늘날의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 역시 누군가의 평온을 깨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