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의 이야기를 듣는 언론
정치는 모름지기 쟁취를 위한 행동인 듯하다. 유무형의 쟁취를 위해 집단이 표현하고 투쟁하는 게 역사의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자질구레한 호기심으로 본 정치의 현상과 역사는 쟁취를 위한 행동이었다.
20세기가 넘어가면서 과거와 달리 시민들도 정치에 직접 참여했다. 민주화의 물결이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헌팅턴은 70년대를 넘어서며 전 세계에서 발생한 민주화 흐름을 ‘제3의 물결’이라고 명명했다. 우리의 1987년 6월 항쟁도 제3의 물결의 한 장면이다.
요컨대, 현대의 정치란 제3의 물결 이후 정착된 시민 사회의 쟁취를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물론 여전히 의회와 행정부의 힘이 강하지만). 그런데 의문이 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2024년, 현대의 시민 정치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누가 주도하며 언론은 어떤 이슈를 좇아가는가? 집회와 시위의 현장에서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
지난 주말, 남대문에서 현 정권의 퇴진 집회가 열렸다. 신문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다음날 신문으로 본 집회 현장의 이슈는 이른바 보수 신문과 진보 신문의 논조가 달랐다. 흔히 보수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곳은 ‘민주노총 간부들의 불법 행위’에 관해서, 반면 진보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곳은 ‘강압적인 경찰과 공권력의 시위 제지’에 관해서 다뤘다.
개인적으로 두 언론사의 앵글(혹은 야마)에 다 공감한다. 회사의 ‘킥’의 차이가 제목과 핵심 앵글을 정했다고 본다. 다만 서로가 반론이 부족했다고 느꼈다. 보수 언론은 폭력적인 행태에 집중한 나머지 왜 현장의 사람들이 그런 행동에 도달했는지가 없었다. 집회 참여자들이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인간들로 그려지기 쉬웠다. 진보 언론은 실제로 존재한 폭력적인 행동을 무시했다. 또한 현장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경찰의 입장이 적었다. 이미 화가 나 있는 매우 선명한 취재원의 입장을 그대로 실었다.
그런데 과연 신문이 다룬, 현장에 나온 이들이 정말 다수 시민을 대변하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그들을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내보내도 되는 건가? 양극단에 갇힌 사람들이 내뱉는 저급한 발언과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행동이 정말 한국의 현대 시민 정치의 핵심은 아니다. 시민들은 안전한 사회, 공정한 사회, 그리고 풍요로운 사회를 원한다. 나만 잘 되면 상관없다는 이들이 넘치지만, 가장 평범한 곳에 사는 이들은 여전히 공동체가 잘 되길 바란다.
그런 관점에서 언론이 더 이상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에 맹렬히 주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필요성도 있다. 다만 으레 해왔던 대로 하진 않았으면 한다. 집중해서 볼 대상은 소리를 내려고 모인 그들이 아니라, 그 틈바구니에서 차마 소리 내길 꺼려하는 이들이다. 검고 하얀 어느 지대에서 시끄럽게 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회색지대의 사람들이 내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 시민들이 언론을 불신하고 조롱하는가? 나는 회색지대의 사람들의 삶과 목소리에 무관심했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언론사에 입사하면 강렬한 집회의 현장을 갈 테지만, 지금의 젊은 나와 내 동료들이 완숙해졌을 땐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그게 언론의 신뢰 회복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정치에서 20대와 30대의 부재가 크다. 보수든 집회든 노인 인구가 주도한다. 이들은 각자가 불의라고 믿는 집단의 권위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결코 그들의 삶이 쌓아온 스스로의 권위와 과거의 모습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변화를 낼 수 있는 건 청년들이다. 그런데 청년은 바쁘고 지쳤고 상처 입을까 몸을 움츠린다. 가능하다면 (내가 몸 담게 될) 언론이 청년들이 생각하고 지향하는 이야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