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얼숲 Jun 28. 2020

인천국제공항의 두 날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6월의 산문 #5

"오 차장님,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이대로만 하면 정직원이 되는 거죠?"


미생의 장그래, 오 차장, 김 대리


미생은 내 인생 드라마 중 하나이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가 펼쳐 나가는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보단 덤덤하게 담아낸 개인의 삶이, 어쩌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담긴 우리 사회의 모습이 내 마음 한 구석을 건드려서 일 테다. 좋아하는 대사도 많다. 가끔은 명대사들을 곱씹으며 내 마음가짐을 다잡기도 하고 나름의 힐링도 얻는다.


드라마에서 장그래는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 신입사원이 2년간 이뤄냈다고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다 하고서도 회사의 철옹성 같은 매뉴얼을 뚫지 못한다. 사내 게시판에 동기 중 한 명인 한석율은 장그래의 지난 2년을 언급하며 과연 스펙이 뭐길래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이토록 차별받아야 되냐며 글을 쓴다.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그만의 노력을 다 한다. 그러나 결국 장그래는 떠난다. 비정규직 계약직 사원이라는 스쳐 지나가는 그 수많은 이름들처럼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장그래는 지금도 우리 삶 도처에 존재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말이다.




인천국제공항이 발표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은 여전히 메인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보도를 했고 좌우의 이념에 따라 사설을 내놓았다. 와중에 청와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결코 기존 정규직 공채를 노리던 취준생과 대학생들의 일자리를 뺏지 않을 거라고 설명했다. 물론 그 설명과는 별개로 더 힘이 센 여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정규직 전환이 되는 것이 '공정'한 것이냐는 것이다.


여론은 여론이고 나는 내 생각을 말해야겠다. 우선 여기서 '무조건적'이라는 말과 '공정'이라는 말이 썩 와 닿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무조건'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건가? 기사를 20여 개 넘게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이거 이대로 가다간 노사 갈등이 아니라 노노 갈등만 더 심해지고 사실은 흐릿해진 채 니편내편 싸움만 심해지겠구나!' 사실 무조건이라는 말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억울할 테다. 정부의 해명대로라면 2017년 5월 이후에 입사한 이들은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채용경쟁을 펼쳐야 한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떨어질 위험,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그대로 안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무조건적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울어야 할 사람들은 지금 이 섬세하지 못한 정책의 한 복판에서 비난을 하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욕을 먹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정이라는 말에도 심히 의문이 든다. 공정? 도대체 공정이 무엇인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퇴와 관련해서 딸인 조민의 부산대 의전원 입학 의혹과 대입 부정 의혹은 청년세대들에게 공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뉴스가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들의 그 애매한 경계에서 <단독>, <속보> 등의 보도를 낼 때 서울대와 고려대에서는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입장문을 냈다. 당시 나와 친하게 지내던 형과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대와 고려대 총학이 언급하는 말에 이상하게 공감이 가지 않았었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니네가 공정을?'라는 물음표였다. (이왕에 거칠 게 표현한 거 이번 글에서는 계속 거칠어야겠다)


SKY를 다니는 학생들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며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정을 말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과연 다른 학생들의 삶과 비교해 공정한 선에 있었냐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이미 서울 주요 대학들의 경우 수도권 지역의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 수가 많다. 민주당의 박경미 의원이 서울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의 대입 결과 자료에서 서울대 신입생 비율의 상위 20개 시군구 중 무려 15개의 시군구가 서울과 수도권 지방이다. 심지어 이 상위 20개 시군구의 서울대 신입생의 분포는 무려 51.8%에 달한다. 또 작년 11월 중앙일보의 한 기사에 나온 자료를 보면 SKY학생의  소득분위는 일반 타대학의 소득분위에 비해 유독 9,10 분위의 퍼센티지가 46%로 높다.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SKY 이외의 대학들이 25% 정도를 차지하는 걸 생각해 볼 때 거의 두배의 차이가 난다.


공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반문했던 작년 서울대의 대자보


태어나고 보니 갖게 된 부모의 경제력을 이유로 학생의 노력과 결과를 폄하할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애초에 그런 접근을 올바른 접근으로 생각지도 않는다. 하지만 알고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노력이라고 그토록 외치는 분야가 사실은 우리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다른 곳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을 이야기하며 학교가 각 계층이 갖게 되는 문화자본의 불평등을 마치 학력 자본의 차이인 마냥 표출하며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했다. 다시 말해 사회 안의 서로 다른 이들이 갖게 된 문화자본(경제 자본의 오랜 축적으로 발현되었다고 부르디외는 말한다)의 불평등을 마치 한 개인이 노력하지 않았기에, 좋은 대학을 못 갔겠기에 겪어야 하는 당연한 것처럼 꾸며낸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어려서부터 언어로써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교육에 관심 많은 부모 밑에서 자라지 않아 어릴 때부터 질 좋고 다양한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애초에 대학이라는 것에, 학벌이라는 것에 딱히 관심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었을까?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돌아보면 공정을 외치는 학벌 좋고 스펙 좋은 이들의 삶은 진정 공정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이 좀 길어진 듯 하지만 다시 한번 더 짚으며 가야겠다. 개인의 노력과 배경을 무시하고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목표를 향해 부단히도 달려왔고 내가 노력한 발자취와 상응하는 대가와 처우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손쉽게 얻는 것은 누구보다 싫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건 우리가 외치는 공정이라는 게 단순히 이 사회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시험이라는 제도에서 점수가 높고 학벌이 좋고 서류에 꽉꽉 채워진 자격과 이력으로만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인천국제공항으로 가 보자. 이번에 정규직 전환 대상자로 거론되는 보안검색원(청원경찰로 전환되는)들은 평균 7년 정도를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은 이들이다. 한 명 한 명의 토익 점수가 어떤지, 집안의 배경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다해가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한 비정규직을 왜 그들이 7년간 그만두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노력하기 싫어서? 아니면 정권이 바뀌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라는 로또에 확신이 있어서? 어째서 우리는 그토록이나 학벌이 다가 아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토익을 잘한다고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다 라며 떠들면서 실제 필드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해가며 일한 이들의 삶을 '알바'니 '떼쓰기'라며 쉽게 재단하는가. 타인이 나의 삶을 잘 모르기에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할 때 아픈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간 아무런 말 때문에 타인 역시 지독한 아픔에 놓일 수 있다. 진정 비판을 하고 분노를 하고 싶다면 오랫동안 자신의 소임을 다한 이들을 조롱할 게 아닌 그 주체를 명확히 바라보고 해야 할 일이다.

      



냉정한 현실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노동형태가 완전한 제로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국가들에서 고용 유연성을 이유로 비정규직을 채택하는 걸로 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노동 형태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실제 현장에서 그들이 어떤 대우와 여건에서 일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그들을 '우리도 알바나 알아보자'라는 식으로 조롱할 순 없을 일이다. 그래서일까. 출처를 알 수 없는 카톡 대화방에서의 몇 줄로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력도 하지 않은 떼쓰기 사회주의자들로 몰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실제 문제는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언론과 여론에 휩쓸리고 만 나약한 시민이 될 것만 같다.


내가 이번 인천국제공항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사를 찾아 읽고 정보를 헤집고 다녔던 이유는 비단 대학과 취업 문제만은 아니듯 하다. 까놓고 말해 제대로 된 사실의 검증도 없이, 타인을 향한 배려와 공감도 없이 내지르는 인터넷의 여론이 보기 싫어서였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노동형태는 결코 개인의 안전하고 즐거운 삶을 보장한다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고되며 삶의 가장 넓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사각지대에서 2014년엔 미생의 장그래가, 2016년엔 구의역의 김 군이, 2018년엔 보령 화력발전소의 김용균 씨가, 2020년엔 청주방송의 이재학 PD가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의 이슈는 한동안 계속해서 뉴스를 장식할 것이다.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개선되어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의 양상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로 봐야 할까. 확실한  지금  시간에도 각자의 삶을 버텨가고 있을 개별적인 청춘의 이름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싸움 붙이고 조롱해서는  된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이전글 언론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